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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찬이나마 정을 담는것이 우리네 밥상

 

 

 

 

 

 

NY에 사는 어떤 이가 모 신문사 게시판에 이런 글을 올려 놓았다.


본인은 여행을 하며 그 고장의 맛 집을 들러 음식 먹는 것을 낙으로 아는 이중의 한 사람인데…
예전에 LA한인타운을 몇 차례 방문하여 이미 싸고 맛있는 한식 맛을 보았던 지라…
요 맛, 조 맛 찾아 지난(2003년) 여름 LA 한인 타운에 다시 입성하니,
인걸은 간데 없고 맛과 가격 또한 예전만 못하구나.
차라리 라티노 인구가 많으니 라틴 아메리카 음식인 또르띠야, 타코 등이 낯선 여행객에게는 허기와 입맛, 주머니 사정을 동시에 채워 주는 효자 음식이로고…
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에 온지 10년이 넘어 처음으로 한국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미국에 도착 당일부터 기대와는 달리 한식으로 길들여진 나의 식생활(난 정말 갖가지 서양식 메뉴로 우리집 식탁이 가득할 줄로만 알았다)이 한국에 간다 하여 무슨 변화가 그리 있으리요. 허나 한국에서의 김치, 나물 같은 푸성귀 반찬은 분명 무언가 다른 정겨운 감칠맛이 있었다. 그러나, 외식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던 나의 사정상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들은 소문난 맛집이 아닌 이상 LA한인타운의 맛이 훨씬 좋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왔던 것 같다. 고깃집에 가면 분명 고기 맛은 좋은 듯도 한데 같이 나오는 반찬들이 허술했다. 내가 방문을 했던 시점이 채소 가격 비싼 계절인 이른  봄이긴 했지만, 고기와 함께 먹어야 하는 야채도 풍성하지 않고, 간도 그저 그런 기억이 난다.
맛 집을 몰라서라고, 한국의 맛 집이 수도 없이 많은데 하필 맛도 없는 집만 골라서 갔느냐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교육으로 머물던 지역이 아무리 시내와는 떨어진 외곽이라고는 하여도 3층으로 올린 큰 고깃집이나, 어느 건물 2층 전체를 사용하는 삼겹살 집, 백화점 푸드코트 등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부식비가 비싼 계절엔 참 부실한 반찬들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내 나라에서 같은 동포가 해주는 밥을 먹었으니까…


우리가 일부러 맛 집만 다닐 수 없듯이 매일 먹는 끼니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인데, 어느 동네 어느 집을 가나 비슷한 정성의 맛은 선사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시청한 한 다큐멘터리에 한국 어느 지역의 1,000원 밥집에 대한 보도를 보았다.
노년으로 접어든 한 아주머니께서 장성한 자식들을 모두 출가 시키고 나니 우울 증에 걸려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렇게 허전함을 메우지 못한 채 계속 병원을 다녀오시던 어느날 길가의 노점 상인들이 얼어붙은 도시락을 먹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그들 형편에 몇 천원씩 주고 밥을 사 먹는다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나마도 잠시 짬이 나면 도시락을 먹는 것이지 때를 놓치기도 부지기 수로 보였다. 그때 이를 본 아주머니는 이런 마음이셨다 한다.


‘내가 이렇게 우울증으로 병원을 다니며 비싼 치료비를 내도 별 성과도 없는데… 차라리 그 돈으로 저렇게 힘들게 일해도 따뜻한 밥 한끼 먹기 어려운 사람들 밥이라도 제공하면 보람되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 아주머니는 가정용 식탁 두개가 단촐이 놓인 1,000원 밥집을 열었다. 한 식탁에 반찬을 그득 차려 놓고, 알아서 들 합석한 이 집 단골 손님들에게 뜨듯한 국밥 한 그릇을 1,000원에 팔고 계신다. 바빠서 식사시간을 놓친 이들도 언 몸을 녹이며 싼 값에 정성 가득한 한끼 식사를 할 수 있다.
2002년도에 경비직을 은퇴하신 아저씨도 지금은 식당 일을 돕고 계시는데, 동네의 재래 시장(시장이라기 보다는 동네 야채 가게처럼 보임)에서 그날 필요한 부식들을 사오는 것이 아저씨의 몫이라 하신다. 도매 시장이나 대형 마트를 이용하면 더 신선하고 쌀 법도 한데 이렇게 말씀하신다.


“동네의 상점들을 이용해 줘야 동내의 경기가 살재. 큰 곳 가면 좀 더 싸게 살수도 있지만 이렇게 서로 도와야재.”


그러다 보니 인근에서 농사를 짖는 지인께서 김치거리도 무상으로 주시기도 하고 이 집 주인의 뜻에 협조해 주는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쯤 되면 경제 원칙, 원리를 따지기 이전에 사람에 대한 정(情)이 바탕이 된 이 밥집에서 무슨 반찬이 되던 맛이 없으랴.  
이런 곳이 바로 한국의 진정한 맛 집은 아닐까?


그런 맛집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구석구석 알지 못할 뿐일 게다. 그러나 아무 곳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런 맛집이 우리를 맞이해 주면 좋겠다.
NY에서 LA를 방문해 음식 맛에 실망을 했다는 그이도 그런 허전함 때문에 이번LA 한인타운 방문에서 맛 집을 찾지를 못했었나? 그렇지 않음, 진짜 혀에서만 감칠 맛 나는 그런 음식을 찾다 돌아가 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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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면 분명 저녁상을 물린 후인데도 무언가가 자꾸 생각난다. 딱히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상큼하고도 맛있는 것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 저녁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아님 겨울 밤이 길어지니 자꾸만 궁금해지는 것인지,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앉아 있자 치면 더욱 심해진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큼하고도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그 무언가가 집에 항상 있을 턱도 별반 없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만이라도 알면 상점에 가서 사다 먹을 수도 있으련만…


어릴 적엔 먹고 싶은 것들이 보다 정확했던 것 같다.
군고구마, 튀김, 떡볶이, 호빵, 초코우유, 센베이, 곰보빵 등등…
그 무엇에 대한 고유명사 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고유명사 들이 선명하지 않다. 상큼하고 맛있는 그 무언가는 원하지만 원하는 그 무엇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어릴 적 가장 먹고 싶었던 간식, 혹은 손쉽게 먹을 수 있었던 간식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초코파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1974년에 개발되어 선보인 초코파이는 동생이 태어난 해에 만들어져서인지 동생처럼 정겹다.
두 장의 비스킷 (빵이 아님) 사이에 하얀 눈 같은 머쉬멜로우를 발라 그 겉을 어린이들의 최고 사랑을 받고 귀한 음식으로 꼽히던 초콜렛을 덮어놓은 모양이란….맛있는 것 세 가지를 하나로 모아 놓은  최고의 완성품이었다. 그 초코파이는 가격도 한동안 100원대를 유지하면서 제과점의 고급 과자나 빵과는 달리 비교적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하여 이 특별난 과자는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루 애용되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2교시 끝나면 ‘간식시간’ 이란 것이 있었다. 집에서 적당한 간식을 싸 와서 당시 급식이었던 우유(돈을 내야만 먹을 수가 있었음)가 도착하는 시간에 함께 먹도록 했었다. 그러나 어린마음에도 간식 준비때문에 어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도시락을 싸 주시는 것만도 힘드신 데 감자 하나를 삶더라도 간식까지 준비하셔야 되는 어머니께 죄송하기 그지 없었다. 간식을 싸 오는지 검사도 받아야 했으므로 안 가져 갈 수 도 없고 해서, 마땅히 가져 갈 것이 없는 날은 초코파이 하나를 사서 가져 갔던 기억이 난다. 우유와 함께 먹는 초코파이는 가끔 어머니 수고도 덜어 드릴 수 있고 맛도 훌륭했다. (초코파이를 돈 주고 살 수 있는 초등학생, 우유급식 등을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집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고… 그런 가시적인 경제적 윤택함을, 어머니 아버지들의 땀이 영글어 낸 열매의 단맛을 맛보기 시작한 세대라고 이해해 주심 될 것 같음)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예전처럼 초코파이를 좋아하지는 않게 되었다. 왜냐, 먹을 수 있는 간식의 폭이 더욱 넓어졌음. 특히 돈을 내고 사 먹을 수 있는 것들이… 하지만 그것은 추억을 만드는 도구로 자리잡았다. 무언가를 기념하고 축하해야 하는 상황에 케잌을 마련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누군가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을 만들어 내었고, 그 방법은 우리들 사이에서 말없이 퍼져 나갔으니 그것은 바로 초코파이 케잌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나가 되었든 그 이상이 되었든 간에 원하는 만큼 초코파이를 쌓고 적당한 위치에 초를 꽂아 누군가를 축하하는 일에 그만한 것이 없었다. 왜? 정(情)이 담겨 있었으니까.


그 외에도 초코파이는 오랫동안 대단한 사랑 받아 왔던 과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초코파이에 대한 연구와 그 마케팅에 대한 보고도 나올 만큼 그것이 대한민국 제과 업계에 미친 지대한 영향도 과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74년에 소개된 오리온 초코파이 이후 수많은 초코파이가 나왔지만 오리온 초코파이의 아성을 누르기에는 미흡했다. 이미 초코파이라는 이름이 고유명사 화 되어 모든 상품의 초코과자가 초코파이란 이름을 달고 상점에 나와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초코파이란 오직하나 별을 달고 한자로 정(情)을 붙인 그 초코파이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그것의 의미로 다가올 정도로 정든 초코파이이다.



출시이래 지금까지 (2001년 기준) 80억 개가 판매되었다는 초코파이는 대한민국 인구 4천 500만 명 기준으로 한 사람이 150여 개의 오리온 초코파이를 먹었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 (지금은 2003년이니 더욱 많겠죠?) 게다가 94년 이후 해외시장에 진출해 97년에는 중국 현지에 공장을  건설하기에 이르렀으니 정 초코파이는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그러한 초코파이도 80년대에 이르러 매출 감소의 위기를 맞았으나 그 아성을 회복하는 방안을 마련하였으니 그것이 광고 마케팅이었다. 제품을 잠 재우느냐, 아님 판촉을 통해 부활시키느냐의 기로에서 광고에 상품의 인성을 담아 내는 방법으로 다시 사랑 받는 제품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바로 우리가 초코파이 하면 ‘정(情)’하고 떠올리듯 텔레비전 광고에 정(情)을 모티브로 하는 시리즈 광고를 소개해 한국적 정(情)이라는 컨셉으로 다시 한번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된다. ‘초코파이는 주는 사람의 마음이자 정(情)’이라는 메시지로 소비자들의 뇌와 마음을 침범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제품을 생산하는 과학적 기술, 제품의 이미지 ‘정(情)’ 개발, 그리고 그를 포장한 마케팅 전략 등이 오늘의 초코파이의 아성을 낳게 된 것이다.
2001년 ‘내외경제’의 보고를 보면, 100년 후에도 여전히 사랑 받을 제품으로 초코파이가 네티즌들에 의해 선정되었다 한다.


·        초코파이: 47%
·        새우깡: 35%
·        바나나 우유: 9%
·        맛동산: 8%


어른이 되고 나니 내게는 더 이상 초코파이가 맛나지는 않지만 미주에 살고 있는 지금, 한국 식품점에 놓여 있는 초코파이를 볼 때마다 정든 그 과자가 반갑다. 어릴 적 그 시절, 먹고 싶은 것이 확실하던 때를 생각해 보니 그렇게 대단한 과자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끝맺음으로 초코파이에 얽힌 퀴즈하나!
문제: 초코파이를 맛있게 먹으려면?
정답: ‘군대에 간다’ 가 정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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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아마도 두해남직 전의 일이었다.
봄이 가까워지고 있는 어느 금요일 날, 친구들이 모두 모여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엘 다니고 하게되니 같이 영화관에 가는 일은 좀처럼 없게 되더니 지금은 그나마 주말에 밥먹으며 비디오 한편 보는게 고작이다. 그날은 그나마 모임을 하던중 같이보기로 한 영화가 있어 특별히 준비된 것이긴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우리는 우리중에 어린이가 끼어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모임엔 솔직히 어린이 회원이 하나 있다. 남들이 보면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모임을 갖는 열린 집단인듯하나 알고 보면 어린이는 그 어린이 단 하나뿐인 이유와 함께 어린이 대접을 받는것이 아니라 어른과 같은 대우로서 한자리에 하다보니 어른들이 간과해버리는 상황이 제법있다.
예를 들면 어른들의 밥반찬에 어린이 숟가락만 하나 추가한다거나 어린이의 취침 시간에는 상관없이 모임을 진행하여 다음날 그 어린이의 배꼽시계가 아침을 차리라고 울려대도 조금 모른 채 한다던가하느 것들 외에도 우리는 가끔씩 그가 어린이 임을 잊고 행동하게 된다.

그날도 그러했다.
우리가 보기로한 영화의 제목은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썩 예술성이 있거나 세련된 구성의 영화라기 보다는 백인 우월주의가 낳은 인종혐오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 신경을 쓴 영화였는데, 한참을 보다보니 꽤 강도 높은 욕설이 계속 흘러 나옴을 감지 했을때는 이미 우리곁에 예의 그 어린이가 앉아서 같이 그것을 꽤나 오래 보고있었던 후였다.
첫번째 욕설이 흘러 나왔을때 흠칫 놀라 아이를 처다보고 다음 액션은 그옆의 엄마였나 앉아있던 누군가가 아이의 귀를 막고, 계속된 욕설이 나오자 결국은 아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아이를 다른일을 하도록 조처하고도 결국 아이엄마는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우리가 무심한 사람들의 집단인지 아님 주변에 아이가 없어 주의를 하지 않음인지 아이를 위한 배려를 그다지 신경쓰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를 무척 사랑한다. 아주 많이. 어느 정도냐면 그 아이가 걸스카웃 쿠키를 다른 아이들 보다 많이 주문 받지 못해서인지 신청이 잘못 되어서인지 판매할 물건을 배분받지 못해 기분상해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우리 삼촌들과 이모들은 맹목적이고 무모한 태도로 흥분이 극도에 달해서 ‘애가 그래서  기죽으면 안되지. 그럴땐 무지 맘 상하지’ 하며 자신의 경험을 반추, 극기야는 한사람이 30개씩 새로 주문하자며 아이편을 들고 일어섰다. 그 어느 반대 시위 때 보다도 더욱 하나로 뭉쳐 극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던 우리 집단… 동시에,
“@@야 쿠키 많이 안팔아도 되!”
하며 위로했던 나자신은 그들의 반응에 흠찔 놀랐던것도 사실이다.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다.
그날도 모임에 가기위해 옆건물로 걷다가 그 @@이 모녀가 차를 주차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인사를 한후 함께 모임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이란게 주섬주섬 별 필요 없는 것들도 싸들고 다니길 좋아해서 물건을 창기느라 좁은 길을 우리들 넷이 좀 막고있는 형상이었다. 길 옆은 평탄한 잔디. 때마침 정면에 쇠몽둥이를 흔들며 다가오던 한 젊은이 길을 비켜 달라던가 아니면 조금 비껴가는 액션을 취하지도 않고는 우리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강도깊게 욕을 해댔다. 순간 화가난 나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평소의 나는 조용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으로 살아왔으나 미국 생활을 하다가 늘어난 것은 제대로된 것을 따져보면 손해볼 것은 없다는 것과 누군가에게 혐오스러운 말을 들으며 발끈 해지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화를 좀 내게되었다.
머리를 박박 민 모습이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서 본 Skinhead같은 모습이었지만 그 사건 이전엔 난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었다. 아뭏든 그사람이 우리에게 욕을했다는 사실과 그것도 애가 있는데 '이땅에서 주눅이 들까봐'라는 생각만을 고려해서 나도 조용히 욕 한마디를 해주었다. 그러자, 조용히 우리 네사람이 모퉁이를 돌 무렵 그 녀석이 쫓아 왔다. 예의 그 쇠파이프를 들고... 그러더니 더 심한 말을 해대기에 그에 대응하는 욕이라기보다는  말장난으로 되받아 주었더니 덩치큰 녀석이 붉으락 푸르락 해졌다. 내 옆의 일행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 난 정말 주변상황이 정리가 되지앉은 채 마구 녀석을 약올렸다. 사람들이 조용히 말렸다. 그만하라고. 물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사람을 약올리던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걸으면서  말장난을 좀 쳐주었다. 녀석이 약오르니까 계속해서 따라온 것이지. 그러니까 모임장소인 집까지는 고지가 머지 않은 상태. 조금은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와 길을 가던 어린이에게 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아차 싶었다. 결국 녀석이 대범해서 나같은 사람은 건들지 않는게 낫겠다 싶어서 였는지, 아님 통이 작아서인지 코너를 돌지 않고 그냥 가버렸고 난 야단을 맞고 말았다. 넌 아이도 있는데 저녀석이 덤비면 어쩌려고 그랬느냐고. 난 이렇게 대답했다. '동양인이라고 아무말 안하고 가만 있으니 더 우습게 보고 욕하는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라고... 더구나 아이까지 있는데 기죽는건 더 싫었다.

그러나 나의 두가지 잘못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첫째, 아이 앞에서 욕을 한 점. 둘째,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까지도 위험하게 만들 정도로 무모한 일을 했다는 것. 결국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안그러마하고 다짐했다.

얼마전 음식 백화점에서 있었던 일.
음식을 시켜놓고 손을 씻으러 화장실엘 갔는데 겨우 자신의 의사표시나 할 수 있을까 싶은 어린아기가 기저기 가는 받침대에 앉아 울고있었다. 곧이어 들어온 엄마, 다시는 떼쓰지 말라며 아이를 꾸짖더니 확 들고 나가버렸다.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데 곧 다시 들어온 모녀. 울어대는 아이를 그대로 올려놓고 막 화를 냈다. 짐짓 교양있는 말투로 여러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그녀가 퍼붓던 말은
“PUBLIC에서 어떻게 그따위 행동을 하느냐, 다시 또 떼를 쓸거냐. 알아 듣겠는냐…”  쉼 없이 쏟아붓던 그 말투와 그녀의 중압적인 목소리가 어른인 내가 들어도 공포스러웠다. 아이는 겁에 질려 안그러겠다고 했지만 그후로도 몇번을 화장실을 다녀가며 같은 행동을 되풀이 했다. 그녀의 이야기중에 엄마라는 말대신 선생님이라고 잘못 지칭했던 것으로 보아 직업이 선생님이었던것 같은데 아이를 맡기기엔 너무 공포스런 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그녀가 말한 “PUBLIC” 에서 그녀가 더 교양없이 어린아이에게 화를 내며 일반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서는 사과도 없이 소리쳐 대고는 음식 백화점 한가운데서 남편과 아이와 셋이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이란… 겁에 질린 아이는 엄마가 주는 밥숟가락을 제대로 받아먹지 못하고 아빠품에 안겨 밥을 먹게 되었다. 지나치게 엄격하여 오히려 일반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엄한 모정이 무조건 오냐오냐해주는 모정에 비해 별반 나을 것도 없는 모습이였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옛 사람들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린이 예찬에 빠뜨리지 않는 문구이다. 어린이를 존중하다보면 어른의 행동도 그야말로 ‘바른 생활’이 되겠지. 그래도 어느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어린이를 대하기란 참 힘든 일이다.
한때 학부에서 에세이만 썼다하면 꼭 나오던 그 주제를 기억하는지들. 어린이를 더욱 자유로운 환경에서 사실을 인지하며 자라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동화와 같이 아름답고 예쁜 것만 보여주며 인위적인 현실을 머리속에 그리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 한번씩은 했을 것이다. 나는 열렬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쪽이었는데 그현실을 어떤식으로 보여 주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나이가 드니 더욱 더 난감해진다. 어린이를 친구처럼 대하고는 싶은데 어떤식으로인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심한 욕도 들려주어서는 안되겠고 지나치게 엄격하여 오히려 주변을 부담스럽게 하기도 싫고, 너무 위한다고 자기만 생각하도록 하고 싶지도 않고 지나치게 영악하지 않았으면 하며 가끔씩은 하고싶어도 할 수 없는 절망감이란 어떤 것인지 알았으면하고… 정의로우며 순수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어린이 만들 지혜로운 방법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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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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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처럼 붉은 저녁놀이 비치는 창가에서
내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하는. 한가로운 저녁이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보이지 않던 어린 아들이...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작은 미소를 띠면서
부엌으로 들어왔다.

한 손에는 무엇인가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작은 종이를 들고서 말이다..

아들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들고 있던 종이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아내는 앞치마에 천천히 손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읽어 가기 시작했다.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나도
그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궁금해져서
아내 옆으로 가. 그것을 같이 읽었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잔디 깎은 값 5 달러
*이번 주에 내 방 청소한 값 1 달러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센트
*엄마가 시장 간 사이에 동생 돌본 값 25센트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 달러
*숙제를 잘 한 값 5 달러
*마당을 청소하고 빗자루 질을 한 값 2 달러
*전부 합쳐서.. 14달러 75센트..

거기까지 다 읽은 다음,
아내는 무언가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지 알 수 있었다..
다정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던
아내는 연필을 가져와서..
아들이 쓴 종이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무료
☞네가 아플 때 밤을 새워 가며 간호하고 널 위해 기도한 값→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힘들어하고 눈물 흘린 값→전부
무료
☞너 때문에 불안으로 지샌 수많은 밤들과. 너에 대해 끝없이 염려해
야 했던
시간들→모두 무료
☞장난감, 음식, 옷, 그리고 심지어 네 코를 풀어 준 것까지도→전부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 무료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어느 새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꼭 껴안고 있었다...
" 엄마, 사랑해요! "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 전부 다 지불되었음! " ----


왜 자꾸 흔들어~~~
------------------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중 가장 많이 쓰는 프로그램이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윈도우 시스템인데,
그 프로그램을 쓰다보면 잠시 기다리시라는 의미로
커서 옆에 모래시계가 나타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인터넷을 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연결이 늦어지는 경우 잠시 기다리라는 의미로 또한
이 모래시계가 커서 옆에 나타난다.

한 친구가 그럴 때 마다 마우스를 좌우로 방정맞게 흔드는 것을
보고 궁금한 나머지 물었다.

 

“왜 자꾸 흔들어?”

“응? 빨리 연결되라구....”

 

아니,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우스를 좌우로 방정맞게 흔든다고 컴퓨터가 빨리 돌아가남?

하지만 그 친구는 이렇게 하면 정말 화면이 빨리 변한다며
무척 자신있는 말투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
.
.
.
.
.
.
.
.
.
.
.

“모래가 빨리 떨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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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Dear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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