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ㅣ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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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고전, 철학, 이념과 관련된 책들은 읽지 않겠노라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그 말들에서 풍기는 고루함, 완고함이 싫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책들이 풍기는 이미지가 싫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세속적인 성공과는 담을 쌓는 ‘패배자’의 사유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경계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이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의 이런 ‘금수조치’는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짧은 서평들을 쓸 때도 밑천 없이 장사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서설이 길었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바로 이제 ‘밑천’ 좀 넉넉하게 마련해보자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동안 읽기를 꺼려왔던, 그리고 내심 두려웠던 어려운 책들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처음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야 있겠냐마는 ‘친절하고 쉬운 고전 안내서’라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하게, 꾸준히 읽었는데도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다 읽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일리아스>, <안티고네>, <신곡>과 같은 책들이 그렇게 재밌는 책인지 몰랐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거대한 전환> 등 여기 소개된 책들도 꼭 시간 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강의’라는 책제목과 어울리는 편한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 막연한 부담감을 잠재워주었다. 또한, 책들이 저술된 시대와 배경, 지은이에 대한 소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흥미를 돋우었다. 또한 책의 곳곳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예시도 되어있어서 고전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이 책은 좋은 책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강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두 가지만 들자면 ‘자기분열’과 ‘학생’이 아닐까 싶다. 먼저 ‘자기분열’은 ‘어떤 행동을 하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나’로 분열된 상태를 말한다. 책에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공자의 <논어>의 세계는 정치와 윤리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였다. 공동체에서 사는 시민의 덕성이 중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생활 자체에서 윤리가 적용되는 세계다. 하지만 로크와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서구사회에서 윤리는 더 이상 공적인 영역에서 논의되지 않는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생활을 이끌어가는 가치가 더 이상 윤리가 아닌 이윤과 효율이었던 것이다. 근대 서구는 이런 의식 전환을 통해 물질적 발전은 이루었지만 오히려 인간은 그 안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 저자는 근대사회의 실패에 대한 해답을 고전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오직 돈이 숭배되는 사회에서, 한 발 물러나 다시 한 번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며 성찰해보는 자세, 이 건강한 자기분열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전에서 찾은 힌트다.

   
  대체로 사람들은 눈앞에 이익이 나타나면 그걸 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한 발짝 물러나서 그것이 의(義)인지 리(利)인지 판단하는 것이 자기반성입니다. 이 장면에는 이로움을 취하려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극기를 하기 직전의 단계입니다. 달리 말하면 좋은 의미에서 자기분열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리(利)에 밝은 사람은 자신이 얻게 될 이득에 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익에 완전히 몰두해 있습니다. 자나 깨나 돈 생각만 해야 돈을 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본문 560쪽)  
   


  하지만 우리는 성인을 존경하지만 스스로 성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더군다나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자기분열은 더더욱 피하고 싶어 한다. 일부 대형교회에서 ‘물질적인 부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설교하는데 사람이 몰리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물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칠 때 그것을 경계하기도 하는, 태초부터 분열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 분열은 죄책감에 빠지게도 하고 사사건건 행동에 제동을 걸어 귀찮기도 하다. 바로 이 때, 재부(財富)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그 갈등을 하향으로 통합해버릴 때, 우리는 분열에서 해방되고 마음 놓고 자신의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늘로부터 받은 인증서를 휘날리면서 말이다.

  저자는 건강한 자기분열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기분열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고 부끄러워하라고 다그친다. 또한, 그 자기분열이 매 순간 행동할 때마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우리더러 성인이 되라는 이야기냐고 궁시렁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저자는 현실과 이상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초월적 역사주의’라는 말로 제시하는데, 한 마디로 이거다.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 요즘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고 자신에게 한 번씩 더 물어보라는 거다.

   
  고전은 개인과 공동체,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에 대해 모두 이야기합니다. 고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 삶의 비루한 모습을 볼 때에는,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것들을 생각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이 현실의 역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초월적 역사주의’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나 할까요. 또한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개인의 정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그러한 개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를 고려하는 ‘개인적 공동체주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572쪽)  
   


  이 책의 또 다른 키워드는 '학생'이다. 저자는 항상 배우려는 자세로 고전을 읽으라고 말한다. 프로이센의 신학자였던 슐라이마허는 명성을 얻은 뒤에도 ‘신학생’을 자처했다고 한다. 학생이라는 단어는 겸손함, 진지함을 의미한다. 고전공부는 오래해도 그 뜻을 다 알 수 없고, 안다는 것은 또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므로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죽은 뒤, 지방에 ‘현고학생(顯考學生)~’이라고 적히는 것도 얼마나 영예로운 이름인가 싶다. 5급 이상 사무관이 돼야 ‘학생’ 대신에 ‘현고사무관~’이라고 적힌다고 말씀하시던 어르신들이 떠오른다. 나도 그 말씀에 혹해서 공직에 진출하면 5급 이상은 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헛된 명예를 탐한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워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학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말이다.

  저자는 고전을 ‘충분히 읽고 음미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전을 언급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섣불리 아무 곳에나 고전에 대한 소감을 적는 것도 좋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고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일 터이지만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고전 그 자체로 훌륭하긴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 책에 주석을 달고, 원전에 대한 해석을 통해 지평을 넓혔기 때문에 고전이 그만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현재 나오는 책들도 후대에 고전이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또, 고전에 대한 지나친 경외감은 읽는 데 부담을 줄 수도 있고, 읽고 나서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고전에 대해서 너무 엄격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책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한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은 털어버려야 고전이 평가받아온 2000년을 넘어서, 앞으로 2000년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고전이 당대 사람에게 읽힐 때도 엄숙하게 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일리아스>나 <안티고네>와 같은 책들은 당대에 인기 있는 작품이었지 않은가.

  끝으로, 이 책을 통해서 ‘함께 읽는다는 것, 같이 배운다는 것이 정말 좋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일리아스를 읽었다면, 우리는 숨을 거두었다고 표현하지만 고대희랍에서는 눈을 감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으며 따라서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렀다는 표현의 의미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 이 책은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강의를 기초로 씌어졌다고 한다. 지역사회도서관에서 이런 좋은 강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앞으로 지역사회도서관을 좀 더 많이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재미와 생각들을 토대로 앞으로, 지금까지 기피해왔던 고전과 철학책들도 읽어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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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ㅣ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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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에서 명예는 자신을 희생해서 위험에 처한 공동체를 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공동체를 위험에서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오로지 일신상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65쪽

서평은 책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출판사에서 만드는 보도자료가 아닙니다. 이 책이 나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만을 뽑아서 쓰는 것이 서평입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이 책을 지탱하는, 이것을 빼면 책 전체 구조가 무너질 것 같은 핵심 문장을 딱 하나만 뽑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야 합니다.-90쪽

인간은 기본적으로 내면이 분열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나'가 있어야 자기의식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관조하는 힘이 있어야 자신의 현상태에 대한 자각이 가능하고 그 분열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123쪽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어질 때 윤리 역시 그만그만한 것으로 전락하며, 윤리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을 때 정치 역시 저급한 싸움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154쪽

여기서 우리는 행복의 중요한 요건은 바로 자기 안에서 완결되는 것, 즉 자족성과 완결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161쪽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재인용)-183쪽

지옥은 저 땅 밑에 있는 구체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희망을 버리면 그 순간부터가 지옥입니다. 남의 희망을 빼앗으면 그는 지옥문입니다. 남에게 지옥문 역할을 하는 것만큼이나 큰 죄악은 없을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의 지옥문 위에 쓰인 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에 대한 비유)-214쪽

사람은 자기반성을 해야 발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반성을 하더라도 어느 수준 이상은 못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목표를 삼고 있는 기준이 낮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에 영혼이 더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목표 기준을 최고 단계, 즉 신화(defication)에 맞춰야 합니다. 도저히 이를 수 없어 보이는 곳에 목표를 두어야 혼신의 힘을 다하여 올라갈 수 있습니다. -231쪽

따라서 '이념 투쟁은 그만, 이제는 실용'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근대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 하는 것이 원리적으로는 '반체제'입니다.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고 반대파를 절멸시키고 않고 끊임없이 설득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근대국가는 당연히 시끄럽습니다. 이렇게 이념투쟁하느라 시끄러운 것이 근대국가의 본질입니다. -300쪽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입니다. 지도자도 영웅도 아닌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든 희망의 좌절조차 견디어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아직 가능한 것마저도 달성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재인용)-465쪽

대체로 사람들은 눈앞에 이익이 나타나면 그걸 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한 발짝 물러나서 그것이 의(義)인지 리(利)인지 판단하는 것이 자기반성입니다. 이 장면에는 이로움을 취하려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극기를 하기 직전의 단계입니다. 달리 말하면 좋은 의미에서 자기분열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리(利)에 밝은 사람은 자신이 얻게 될 이득에 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익에 완전히 몰두해 있습니다. 자나깨나 돈 생각만 해야 돈을 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560쪽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子 가라사대, 배우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어둡고,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로우니라. (공자, <논어>에서 재인용)-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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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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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숨어 계시는 예수님을 외면한 채, 그분이 누우실 구유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22쪽

내 삶이 독립된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의 삶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들의 조화로운 섞임이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천사의 양식'이라는 성가를 들으며 깨달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진작 깨달았으면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어도 되었건만, 머리 나쁜 중생에게 이 간단한 깨우침을 주기 위해 이곳 아프리카까지 보내셨으니 머리가 나쁘면 수족이 고생한다는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41쪽

골통들은 운동선수들이 다리에 차고 뛰는 모래주머니 같은 아이들이다. 매고 달릴 때 힘이 들긴 하지만 계속 달리다 보면 모래주머니가 종아리에 알통이 배게 하듯 우리의 인내심에 알통이 배게 하는 인물들이 바로 요놈들이다. 잘만 하면 이 알통 덕에 나도 골통도 천국이 있는 곳까지 끝까지 함께 뛰어 같이 천국 문으로 골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57쪽

주의하라! 그 골통은 '너'도 될 수 있지만 '나'도 될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60쪽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멋진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의 영혼이 우리의 진실한 삶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한 눈빛을 통해서 예수님을 느끼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96쪽

세상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 그 좋은 예가 아닐 듯싶다. '내 탓이오!' 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가짐만 조금 바꾸면 모든 것이 쉽게 풀려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체면이나 위신 또는 자존심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 즉 타인에게로 돌리려 한다. -172쪽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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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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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볼 만한 영화 없을까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울지 마, 톤즈’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점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울먹였고, 새삼 ‘이태석’이라는 이름을 계속 떠올렸다. 2010년 1월 14일. 분명 내가 보는 신문 부고 면에 짤막한 기사라도 실렸었을 텐데, 나는 영화를 볼 때까지도 이태석이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신부님을 모르고 있었다니 때늦은 아쉬움이 들었다. 정말 후회가 막심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 미안함에 대한 속죄의 표시이고, 영화에 대한 나만의 되새김질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또는 책에 담긴 사진들을 보면서 가졌던 생각은 신부님의 미소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정말 지상에서 본 최고의 미소가 아닐까 싶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얼굴에서 미소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슬픈 운명에 대비되어 그 깊이가 더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신부님의 미소는 연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생애의 고고함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향기 같은 것은 아닐까. 이 책도 펜이 아닌 그 분의 미소로 쓴 것 같았다. 생에 대한 긍정과 깨달음이 산을 이루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 강을 이뤄 완만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해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나와 너의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이태석 신부님에게 톤즈 사람들은 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몸과 같았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신부님에게 있어 톤즈에서의 삶은 ‘희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 내 몸을 쉬게 하고 배가 고플 때 내 배를 채우듯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내 삶이 독립된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의 삶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들의 조화로운 섞임이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천사의 양식’이라는 성가를 들으며 깨달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본문 40-41쪽)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이 신부님의 삶을 흉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부님은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이방인의 삶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였는데, 나는 우리나라에 소외받고 어려운 이들의 삶을 내 삶과 연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아니다. 이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정책의 우선순위에서는 항상 배제되고, 국익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한 없이 쪼그라드는 그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 같이 잘 살자!’는 다짐은 어떨까. 그리고 ‘다 같이’의 영역이 내 가족, 내 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될 때, 세상은 이 신부님이 바랐던 그런 좋은 세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무늬만 신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가톨릭에 적을 두고 있는 터라 불편함이 덜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영화는 몰라도 책은 종교적인 거리감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신부님에게 종교가 중요하지 않았듯,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삶을 이해하는데 종교적 표현들이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신부님의 삶을 되짚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너무 늦게 그분의 이름을 찾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본문 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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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j7074 2011-01-2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너무 잘쓰셔서 퍼가요. 꾸벅꾸벅..

송도둘리 2011-01-24 08:53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조광조 -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증보신장판)
정두희 지음 / 아카넷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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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가 또는 이상주의자. 조광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무척이나 단편적이다. 그리고 그의 개혁정치는 너무 이상적이었고 과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아니 그 이상의 관심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조광조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역사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엄격하고 완벽해서 가까이 가기 힘든 이미지이다. 이 책은 조광조의 인간적인 면을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실록과 <정암선생문집> 등 접근 가능한 사료들을 분석하여 조광조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조광조가 이상주의자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조광조의 개혁이 과격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당시 시대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중종반정으로 무너졌지만 반정세력들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종은 반정세력들의 ‘바지사장’일 뿐이었고, 반정의 주역들은 몰염치하고 무능했다. 그들은 연산군 조정의 신료들이었고, 그들도 연산군의 정치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별 공도 없는 친인척들을 정국공신 목록에 올림으로써 공분을 자아냈다. 한마디로 정권의 도덕성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황이었다.

  조광조는 이러한 국정파탄의 원인을 ‘국가의 근본’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그는 왕에서 조정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명도근독(明道謹獨)’, 즉 성리학의 정신을 따르고 홀로 있을 때조차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국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면에서 조광조는 극도의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조광조는 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기 먼저 솔선수범하여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사림들의 대표가 되고 조정에서도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개혁이 과격하지는 않았다. 과거제를 대체하는 현량과, 즉 추천제 임용을 제안하면서도 대신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절충안을 채택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과거제를 운용하되 별시를 현량과로 운용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개혁은 조선의 체제에서도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국공신들은 크게 위협을 느꼈고, 조광조 일파를 급습해서 개혁을 무위로 돌려놓는다. 조광조는 정치를 알지 못했다.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혁명이 아닌 이상에야 정치가 필요함을 몰랐던 것 같다. 군권을 장악한다든가 완급을 조절한다든가의 대비가 전혀 없었다. 어쩌면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그가 현실 정치에 발을 붙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자체가 비극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능한 정치인이 행동으로 보이고 조광조가 뒤에서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더라면 개혁의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조광조가 하려고 했던 개혁은 민생과는 조금 거리가 먼 작업이었다. 그리고 조광조가 원했던 나라는 이후에 실제로 도래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의 성리학이 유일한 학문으로 자리 잡은 조선은 그리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어쩌면 조광조의 개혁은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민초들의 삶과는 무관한 지배층 내부의 노선투쟁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조광조 본인도 유력 가문 출신이었고, 그가 주장하는 성리학 사회가 되면 민초들의 삶이 거대한 이데올로기 속에 갇혀 더 부자유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개혁이 갖는 가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 때문일 것이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조광조는 배운 것을 토대로 사회의 불의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현재 정국의 문제점을 간파해 당시 지배층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현실 정치에 들어와서도 꼿꼿한 지식인의 모습을 유지했음은 물론이다. 지금 조광조와 같은 지식인의 전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에도 폴리페서라고 불리는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이 많고,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데도 끊임없이 정치참여의 요구를 받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정치와 학문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도 각자의 할 일이 따로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와 학문은 각자 서기에는 너무나도 취약한 것 같다. 조광조가 살던 시대에는 정치와 학문이 분리되지 않았던 때라 정치에 휩쓸려 조광조가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실천적 지식인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토대를 닦고, 현실정치인은 그 토대 위에서 수준 높은 정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언제쯤 가능할까.

  이 책은 지나치게 학술적이지도 않고, 대중적으로 치우치지도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좋은 책이다. 또, 조광조라는 한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전후를 모두 추적하면서 자칫 인물중심으로 흐를 수 있는 시선에 균형을 잡았다. 절판된 것이 무척이나 아쉽지만 찾아서 본다면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16세기 조선사와 조광조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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