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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 - 오래된 지식, 새로운 지혜 ㅣ 고전 연속 강의 1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10년 4월
평점 :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고전, 철학, 이념과 관련된 책들은 읽지 않겠노라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그 말들에서 풍기는 고루함, 완고함이 싫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런 책들이 풍기는 이미지가 싫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세속적인 성공과는 담을 쌓는 ‘패배자’의 사유에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경계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이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나의 이런 ‘금수조치’는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짧은 서평들을 쓸 때도 밑천 없이 장사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서설이 길었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바로 이제 ‘밑천’ 좀 넉넉하게 마련해보자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동안 읽기를 꺼려왔던, 그리고 내심 두려웠던 어려운 책들에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처음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야 있겠냐마는 ‘친절하고 쉬운 고전 안내서’라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하게, 꾸준히 읽었는데도 한 달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다 읽고 나서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일리아스>, <안티고네>, <신곡>과 같은 책들이 그렇게 재밌는 책인지 몰랐다. <직업으로서의 정치>, <거대한 전환> 등 여기 소개된 책들도 꼭 시간 내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강의’라는 책제목과 어울리는 편한 대화체 형식의 글들이 막연한 부담감을 잠재워주었다. 또한, 책들이 저술된 시대와 배경, 지은이에 대한 소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흥미를 돋우었다. 또한 책의 곳곳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예시도 되어있어서 고전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이 책은 좋은 책이기 이전에 재미있는 강의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두 가지만 들자면 ‘자기분열’과 ‘학생’이 아닐까 싶다. 먼저 ‘자기분열’은 ‘어떤 행동을 하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나’로 분열된 상태를 말한다. 책에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공자의 <논어>의 세계는 정치와 윤리가 동떨어지지 않은 세계였다. 공동체에서 사는 시민의 덕성이 중요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생활 자체에서 윤리가 적용되는 세계다. 하지만 로크와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서구사회에서 윤리는 더 이상 공적인 영역에서 논의되지 않는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생활을 이끌어가는 가치가 더 이상 윤리가 아닌 이윤과 효율이었던 것이다. 근대 서구는 이런 의식 전환을 통해 물질적 발전은 이루었지만 오히려 인간은 그 안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 저자는 근대사회의 실패에 대한 해답을 고전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오직 돈이 숭배되는 사회에서, 한 발 물러나 다시 한 번 자신의 행동을 되짚어보며 성찰해보는 자세, 이 건강한 자기분열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고전에서 찾은 힌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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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사람들은 눈앞에 이익이 나타나면 그걸 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한 발짝 물러나서 그것이 의(義)인지 리(利)인지 판단하는 것이 자기반성입니다. 이 장면에는 이로움을 취하려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극기를 하기 직전의 단계입니다. 달리 말하면 좋은 의미에서 자기분열이 일어난 상태입니다. 리(利)에 밝은 사람은 자신이 얻게 될 이득에 푹 빠진 나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기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익에 완전히 몰두해 있습니다. 자나 깨나 돈 생각만 해야 돈을 번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합니다. (본문 56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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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성인을 존경하지만 스스로 성인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더군다나 건강하든 건강하지 않든 자기분열은 더더욱 피하고 싶어 한다. 일부 대형교회에서 ‘물질적인 부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설교하는데 사람이 몰리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물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칠 때 그것을 경계하기도 하는, 태초부터 분열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 분열은 죄책감에 빠지게도 하고 사사건건 행동에 제동을 걸어 귀찮기도 하다. 바로 이 때, 재부(財富)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그 갈등을 하향으로 통합해버릴 때, 우리는 분열에서 해방되고 마음 놓고 자신의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늘로부터 받은 인증서를 휘날리면서 말이다.
저자는 건강한 자기분열은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자기분열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고 부끄러워하라고 다그친다. 또한, 그 자기분열이 매 순간 행동할 때마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 우리더러 성인이 되라는 이야기냐고 궁시렁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다. 저자는 현실과 이상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초월적 역사주의’라는 말로 제시하는데, 한 마디로 이거다. 인간의 한계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 요즘 드라마에서 유행하는 -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고 자신에게 한 번씩 더 물어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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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개인과 공동체, 현실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에 대해 모두 이야기합니다. 고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 삶의 비루한 모습을 볼 때에는,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것들을 생각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이 현실의 역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초월적 역사주의’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나 할까요. 또한 우리는 고전을 읽을 때 개인의 정체성을 중시하면서도 그러한 개인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를 고려하는 ‘개인적 공동체주의’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5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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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또 다른 키워드는 '학생'이다. 저자는 항상 배우려는 자세로 고전을 읽으라고 말한다. 프로이센의 신학자였던 슐라이마허는 명성을 얻은 뒤에도 ‘신학생’을 자처했다고 한다. 학생이라는 단어는 겸손함, 진지함을 의미한다. 고전공부는 오래해도 그 뜻을 다 알 수 없고, 안다는 것은 또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므로 공부에는 끝이 없다는 뜻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죽은 뒤, 지방에 ‘현고학생(顯考學生)~’이라고 적히는 것도 얼마나 영예로운 이름인가 싶다. 5급 이상 사무관이 돼야 ‘학생’ 대신에 ‘현고사무관~’이라고 적힌다고 말씀하시던 어르신들이 떠오른다. 나도 그 말씀에 혹해서 공직에 진출하면 5급 이상은 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헛된 명예를 탐한 것은 아니었는지 부끄러워진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학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말이다.
저자는 고전을 ‘충분히 읽고 음미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전을 언급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라고 말하며 더 나아가 ‘섣불리 아무 곳에나 고전에 대한 소감을 적는 것도 좋지 않다’고까지 말한다. 고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일 터이지만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고전 그 자체로 훌륭하긴 하지만 후대 사람들이 그 책에 주석을 달고, 원전에 대한 해석을 통해 지평을 넓혔기 때문에 고전이 그만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현재 나오는 책들도 후대에 고전이 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또, 고전에 대한 지나친 경외감은 읽는 데 부담을 줄 수도 있고, 읽고 나서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고전에 대해서 너무 엄격해지지 않았으면 한다. 책을 너무 가벼이 여기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치게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경계해야 한다. 고전에 대한 엄숙함은 털어버려야 고전이 평가받아온 2000년을 넘어서, 앞으로 2000년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고전이 당대 사람에게 읽힐 때도 엄숙하게 읽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일리아스>나 <안티고네>와 같은 책들은 당대에 인기 있는 작품이었지 않은가.
끝으로, 이 책을 통해서 ‘함께 읽는다는 것, 같이 배운다는 것이 정말 좋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 일리아스를 읽었다면, 우리는 숨을 거두었다고 표현하지만 고대희랍에서는 눈을 감았다고 표현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으며 따라서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찔렀다는 표현의 의미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또 하나! 이 책은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강의를 기초로 씌어졌다고 한다. 지역사회도서관에서 이런 좋은 강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앞으로 지역사회도서관을 좀 더 많이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재미와 생각들을 토대로 앞으로, 지금까지 기피해왔던 고전과 철학책들도 읽어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