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스 투 줄리엣 - Letters to Jul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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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영상, 예쁜 영화. 그래서일까? 극장을 벗어나면 더 허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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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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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말해주는 몇몇 단어만 바꾼다면 바로 어제 쓰인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읽히는 소설의 힘인가 싶었다. 이 소설이 더욱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바로 주인공 필립 케어리가 나와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가 작품해설에서 말한 대로 ‘보통사람보다는 감수성이 예민하지만 그렇다고 뛰어난 정신과 영혼의 소유자는 아닌’ 그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수줍음과 열등감에 대한 묘사는 마치 내 일기장에 있는 말들을 옮겨놓은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가 나와 이렇게 닮아 있다 보니 필립의 구도(求道) 과정을 모두 읽어내면 나도 덩달아 인생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필립은 남들의 호감을 사고는 싶었지만 그들의 비위를 맞출 줄은 몰랐다. 퇴박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붙임성 있게 굴지 못했고, 아직도 여전한 수줍음을 감추느라고 입을 꼭꼭 다물고 지냈다. - 1권 446쪽에서  
   


  하지만 필립이 인생을 통해 얻어낸 결론은 너무나도 간결하고 허무했다.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삶에서 이유 없이 맞부닥치는 고통도, 더 나아가 태어남도, 죽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단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헤맬 필요도 없으며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가장 범속해 보이는 것이 사실은 가장 완전한 것이라는 작가의 통찰은 한편으로 나에게 위안을 던져주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말 전부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거창한 미래의 꿈만 바라보며 걷다가 발밑에 놓인 행복을 밟고 지나가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교훈도 좋지만, 그것이 평범함에 머물게 된 사람의 자기변명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범함에 행복이 있다고? 자기변명은 아닐까?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보면 질투심이 일 때가 있다. 때로는 예술을 하면서 돈을 경멸하고 뭔가 고상한 체 하는 사람을 비웃기도 한다. 철학이니 뭐니 하면서 도사 행세하는 사람 또한 우습게 여길 때가 많다. 저 고상하고 탁월한 사람의 뒷면에 숨겨진 허위와 가식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행동들이 그 사람들에 대한 나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들의 고상함에 대비되어 맨살을 드러내는 나의 평범함에 대한 부끄러움, 나에게 퍼부어질 ‘경멸’에 대한 방어본능에서 나도 역으로 그들을 ‘경멸’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필립도 나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다. 시인 크론쇼나 평론가 업존에 대한 냉소와 경멸이 그의 방어본능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인생에 뭔가 의미를 찾아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 예술가나 이상가, 철학자들. 그들에 대한 열등감의 방어본능으로 ‘평범한 삶이 제일이야, 인생에 의미는 없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흥미롭게도 몸(Maugham)은 물질적으로도 성공하고 장수하는 삶을 누렸지만, 대중소설가로 치부되어 평단에서의 평가는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쩌면 앞서 말한 냉소와 평범한 삶에 대한 예찬은 그의 삶에 대한 방어의 차원에서 나온 것은 아닐지. 물론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지만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내 자신도 작가에 대한 연민과 동질감, 그의 삶의 철학에 대한 공감을 느낀다. 돈도 적당히 있어야하고, 이상이란, 또는 예술이란 모두 적당히 갖추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 ‘적당히’라는 것이 참 어렵다. 돈을 적당히 가진다는 것은 1억일까, 10억일까, 100억일까. 정치적 논쟁에서 적당한 좌표에 서 있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 - 2권 363쪽에서  
   



고통은 아무 의미 없이 ‘랜덤(random)’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 필립의 인생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빈민에 대한 입장이다. 필립은 태어남과 죽음 모두 무의미하므로 인생에서 의미를 구하려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빈민계급을 돕는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본다. 빈민계급들은 그들만의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전혀 괴로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자유’라고 한다. 간섭하지 말고 그대로 두는 것을 가장 원한다는 것이다. 또, 빈민들은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고까지 주장한다. 작가는 삶에 주어지는 고통들이란 ‘랜덤’하게 주어지는 것이고, 그 고통을 겪음으로서 삶의 무늬는 더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하지만 우연하게 주어지는 보상치고는 평생 가난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죽어라 일해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행운도 우연이라면 클릭 한 번에 수십억의 불로소득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우연이라면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고통과 행운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우연히 찾아온다고 해도 그 고통과 행운을 사회적으로 평균화할 체제를 만든다면 모두 다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경기변동의 고점과 저점을 평균화하여 중간상태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본질인 것처럼. 하지만 작가는 필립의 시선을 통해 빈자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한다. 오히려 하위계층이면서도 ‘내 마음대로 살 자유’를 주장하며 노동조합에 들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기록함으로써 필립의 무관심을 정당화한다. 
  

필립의 인생론은 '먹고 살만한' 도련님의 철부지놀음일 뿐인가. 


  필립 자신도 지독한 가난에 처해봤지만 그 가난은 일흔이 넘은, 게다가 기관지염까지 있는 백부가 죽기만 하면 끝나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유산을 남겨주면 순식간에 해결되는 끝이 보이는 가난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 고난을 겪어내면서 필립 자신의 인생의 무늬는 더 아름다워졌다. 하지만 ‘백부의 유산’과 같은 것이 없는 가난이라면 다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그 가난은, 그것은 비참한 것이다. 삶이 우연이라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 고통에 대해 ‘잘 살아내십시오, 그 과정을 통해 당신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라고 조언한다면 그것은 중간계급의 철없는 기만이 아닐까. 삶이란, 고통이란, 운운하면서 ‘내가 가난을 겪어봐서 아는데~’라고 말하는 필립의 인생론은 중산층 청년의 철부지 놀음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인생을 양탄자의 무늬로 보게 된 자신의 사상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겪은 불행이란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권태이든 격정이든, 쾌락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무늬를 더 풍부하게 하니까. - 2권 420쪽에서

 
   

우리는 필립 케어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난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예민하지만 능력이 출중하지는 않은 또 하나의 필립 케어리다. 그리고 인간의 구제라는 이상에 몰입할 용기도 없다. 나는 현실 속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자, 인생의 의미란 있지도 않고 인간이 찾을 수도 없다는 서머싯 몸의 인생관에 동조하는 추종자이기도 하다. 또한, 모든 자리에서 ‘적당히’ 혹은 ‘중용’의 입장을 취하려고 노력하는 회색주의자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이 놓친 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물론 필립 케어리가 고통 속에서 찾은 정답도 ‘사랑’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불타는 사랑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랑이었다. 필립의 한계는 그것이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멈춘 것이었다. 우리의 삶과 고통과 죽음이 정말 의미 없이 ‘랜덤’하게 주어지는 것이라면, 신들이 정말 주사위놀이를 한다면, 그 이유는 그렇게 해도 인간이 서로 도우면서 살 것이라는 신의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이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필립 케어리 혹은 서머싯 몸의 한계를 넘어서는 길이 보이는 것만 같다. 사랑이 가족을 넘어 그 외연을 한뼘씩 한뼘씩 넓혀갈 때, 그때 평범한 삶은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삶은 어떤 철학자나 예술가, 이상가들의 삶보다 더 아름답고 고결해진다는 것을. 

   
  이제 보니 그가 결혼을 생각했던 것은 자기 희생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와 가정과 사랑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버리자 그는 돌연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는 그것들을 원하고 있었다. 스페인이 무엇이며, 코르도바, 톨레도, 레온 따위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게 버마의 불탑이며 남태평양의 초호(礁湖)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메리카는 다름아닌 바로 이곳에 있다. 생각해 보면 그는 그 동안 남의 말과 글이 주입해 온 이상을 좇아왔을 뿐 제 마음의 욕망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행로는 언제나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좌우되었을 뿐 제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를 따른 적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그는 이 모든 거짓을 내던져버렸다. 그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 그는 의미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가장 단순한 무늬,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그 무늬가 동시에 가장 완전한 무늬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 2권 501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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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굴레에서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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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은 동방의 어떤 임금 얘기가 생각났다. 인간의 역사를 알고 싶었던 이 임금은 한 현자를 시켜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게 했다. 나라 일로 바빴던 왕은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가 돌아와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 너무 늙어 그 수많은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어 그것을 다시 줄여오도록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늙어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 가지고 왔다. 하지만 임금은 병상에 누워 죽어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현자는 임금에게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여 말해 주었다. 그것은 이러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었다.-363쪽

인생을 양탄자의 무늬로 보게 된 자신의 사상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겪은 불행이란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권태이든 격정이든, 쾌락이든 고통이든, 모든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의 무늬를 더 풍부하게 하니까.-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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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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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명탐정>은 상업영화의 흥행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만약 이몽룡 같은 탐정과 방자 같은 조수가 나온다면 구태여 시간을 들여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다.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리트 같아 보이지만 행동은 ‘허당’인 탐정과 멍청해 보이지만 의외의 명석함을 보여주는 조수가 나오는 영화라면 어떨까? 아마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들은 웃기 시작할 것이다. 이 영화는 기존의 엘리트이미지가 강한 김명민과 다소 모자라 보이는 오달수를 각각 ‘허당’과 ‘볼매남(볼수록 매력있는 남자)’으로 둔갑시키면서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청순한 이미지의 한지민을 ‘팜므파탈’의 요염한 여인으로 변신시켜 남성관객들의 혼을 빼놓는 데도 또한 성공했다. 더군다나 오달수나 김명민 그리고 한지민 모두 나에게는 ‘이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는 믿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이고, 이 영화를 통해 ‘변신’까지 한다고 하니 극장으로 발을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흥행공식이라면 숨 막히는 반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전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던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영화는 티켓파워가 있는 배우를 부르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를 쓰고도 범작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영화는 그런대로 재미있고, 그런대로 교훈을 던져주며, 그런대로 볼 것이 많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민망함에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원래 원작자체가 그런 내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반전이 너무 도식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전은 한마디로 ‘뻥’이다. ‘뻥’은 그럴듯하고도 강력하게 한 번만 쳐야지 아무 때나 일삼아 치면 ‘반전’이 아니라 ‘사기’가 된다. 이 영화는 반전이랍시고 계속 ‘뻥’을 치는데, 한 번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는 더 큰 거짓말을 해야 되듯이 점점 ‘뻥’이 커진다. 그 결과 나중에는 정조(正祖)가 시골마을까지 친히 친위부대를 이끌고 내려와 주인공의 목숨을 구해주는 지경에 이른다. 이쯤되면 도저히 믿어줄려고해도 믿어줄수가 없는 ‘반전’이라는 이름의 ‘사기’다. 영화에 대한 몰입도가 후반부로 갈수록 크게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음은 물론이다. 더 웃긴 것은 그동안 숨겨놓았던 속임수들을 영화가 끝날 때 미주알 고주알 다 찾아서 직접 말해준다는 것이다.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고 여운을 느낄 여지를 전혀 남겨놓지 않는다. 끝으로, 마지막 흥행공식이라면 속편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일텐데, 이 영화도 ‘1년 후’ 라는 자막과 함께 속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엔딩크래딧을 띄우고 있다.  


  물론 반전에 대한 강박증은 비단 이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할리우드 영화도 마찬가지고 따지자면 동서고금을 통틀어 반전에 집착하지 않는 영화가 어디 있느냐고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앞서말했듯이 반전이 ‘뻥’이라면 그럴듯하게 치는 것이야말로 작가와 감독의 능력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사기전과가 없는 초범 같았다. 흥행공식을 너무 티나게 도식처럼 그려냈다. 주연 배우 모두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이들이지만 이 어색한 사기극 속에서 배우들 역시 중심을 잃고 역할과잉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는, 기대를 많이 하고 봐서 그런지 실망도 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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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2-07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멋진 영화 리뷰네요. 추천 꾹~

송도둘리 2011-02-08 08:59   좋아요 0 | URL
헤헷 감사합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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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한창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너 외롭구나>라는 책이 큰 힘이 되었다. 지금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여전하지만, 그 때는 더더욱 어디로 나아가야 좋을지 불안하면서도 나태한 내 자신에 대해 화가 많이 나있었다. 그런 나에게 던지는 김형태의 조언은 엄했다. ‘당장 일어서라. 넌 네 힘으로 충분히 일어설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 책을 떠올린 것은 비슷한 말을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형태가 쌀쌀맞지만 속은 깊은 형 같았다면 김난도는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다. 물론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아버지란 존재는 술을 드셔야 겨우 용기를 내어 그동안 마음에 담아 놓은 말들을 잔소리처럼 늘어놓으시는 분들이다. 때문에 김 교수는 내 머리 속에서 한껏 이상화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이 책은 다 알고 있는 잔소리지만 아버지 당신의 인생에 빗대어 솔직하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는 그런 조언 같았다.

  이 책은 막연한 불안과 좌절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던져주고 있다. 인생을 좀 더 멀리보라는 말은 법학에서 행정학으로 그리고 다시 소비자학으로 좌충우돌하면서 진로를 변경해왔던 저자의 삶과 겹쳐져 더 절실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인생에 관한 한, 우리는 지독한 근시’라는 표현 역시 멋들어진다. 또, 좀 더 긴 호흡으로 경험을 쌓는 일에 주저하지 마라.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일이 아닌 오늘의 삶을 바꿔나가라는 조언 역시 우리 젊은 청춘들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라 생각된다. 다른 조언들도 새겨들을 만하지만 종이신문을 보라는 것이나 글쓰기 능력을 키우라는 조언은 다소 독특한 충고 같아 흥미롭다. 신문의 위기를 말하고 손으로 글 쓸 일이 줄어드는 정보화시대에 지난 시대의 유습을 권하는 것 같지만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금새 설득되고 만다.

   
  인생에 관한 한, 우리는 지독한 근시다. 바로 코앞밖에 보지 못한다. 그래서 늦가을 아름다운 고운 빛을 선사하는 국화가 되려 하지 않고, 다른 꽃들은 움도 틔우지 못한 초봄에 향기를 뽐내는 매화가 되려고만 한다. 하지만 ‘일찍’ 꽃을 피웠다는 이유만으로 매화가 세상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가? 가장 훌륭한가? - 본문 33쪽  
   


  나를 포함한 또래의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조언들이지만, 그 누가 읽더라도 좋은 이야기들인 것 같다.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인 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청춘들에게는 다소 불만족스러운 책일 수도 있다. 저자는 맹목적으로 스펙 쌓기에 몰두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허나 그것은 개인적인 해결책일 뿐, 당장 현실에서 부닥치는 구조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지방대 출신,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라든지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괴물이라고,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이야기들 할지 모르지만 가볍게 볼 문제는 아니다. 바로 몇 주 전에 나는 한 인터넷 카페에 이런 글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공무원 면접이 정말 공정한가요? 필기는 실력으로 판가름 나니까 믿을만 면접에서는 지방대출신이라고 차별받는 것은 아닐지 걱정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물론 절대 그런 일이 없다는 댓글이 다수였지만 사람들 내면에 있는 공포와 의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 수 있는 글이었다.

  개인 차원의 구도(求道)는 결국 사회 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 책은 개인 차원에서 행복을 얻는 법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회적 차원으로 시사점을 던져주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실수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라고 말한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사회가 실수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운 시도를 겁내는 것이 내가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면 그때는? 아니면 이런 상황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정책결정자가 정해진 절차를 무시하고 실수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므로 일단 내가 마음먹은대로 해보겠다고 고집하는 경우 말이다. 정책결정의 민주적 절차를 고민하지 않고도 우리는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자기계발이 자기 안의 혁명에 머무른다면, 사회 전체로 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계발의 외연이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개인의 행복은 날개 하나뿐인 행복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청춘에게 반쪽짜리 날개를 얻는 법밖에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안다, 나도. 고민하고 좌절하는 청춘들을 위해 이 책을 쓴 저자의 마음을. 나 역시 ‘사랑하는 아들아’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 울컥하기도 했다. ‘준’으로 시작되는 첫 문장에서부터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펙 만들기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말라고 할 때, 왜 우리가 스펙 쌓기에 연연하게 되었는지, 왜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된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복은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기본적으로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는 기업이나 사회에서 원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그런 학문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지성인이다. 이를 ‘학문후속세대’라고 한다. 가끔 기업의 인사담당자들이 ‘대학 졸업생을 뽑아도 바로 업무에 투입할 수가 없다. 새로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불만을 토로하는데, 나는 이것이 잘못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대학은 예비 신입사원 양성기관이 아니다. 당장 기업에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지식을 전수하는 곳이 아니라, 그런 지식을 받아들이고 비판할 수 있는 지성과 학습능력을 연마하는 곳이다. - 본문 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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