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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평점 :
이름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최소한의 증거다. 때론 그 이름은 내가 죽더라도 오랫동안 남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도 한다. 이름에 얽힌 우리에게 익숙한 사자성어가 하나 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뜻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가 지니게 되는 이름은 우리가 지닌 것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무의미한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가장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연 이름 석자가 어떤 의미를 지닐까. 행간에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헬조선'. 언제부터인지 불황을 넘어 사람으로서 살기 힘든 나라, 인간답게 살기 위해 떠나고 싶은 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유명사인 우리의 이름 자체엔 행복이 깃들어 있다. 우리보다 못 살고 있는 전 세계의 빈곤 국가에 비하면 말이다. 1967년 영국과 남아공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980년에 현재의 모습이 된 짐바브웨 공화국이 그중 하나다. 이 책은 바로 짐바브웨 공화국 출신 여성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소설적 허구가 가미되었지만 작가의 경험이 그대로 녹여져 있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짐바브웨에 살고 있는 가난한 소녀 달링이 꿈과 희망을 쫓아 기회의 땅 미국으로 건너가 살게 되면서 겪게 되는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가 본인이 달링과 같은 미국 이민자의 삶을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그네들의 삶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은 새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영어식 이름을 지어준다. 달링과 그녀의 친구들인 베스터드, 갓노즈, 스브호, 스티나, 치포는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달링과 친구들의 소원은 단 하루만이라도 배고픔을 느낄새 없이 배부르게 먹는 것이다. 맨발에 바셀린을 바르고 붉은 흙길을 달려 패라다이스로 달려가는 이유다. 그곳에 가면 적어도 동네에 즐비하게 늘어선 저택의 구아바를 몰래 훔쳐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아바를 먹고 돌아가는 길에 발견한 나무에 목을 메단 여자의 시신을 발견한 아이들은 이내 겁을 집어먹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다 문득 죽은 여자의 구두를 내다 팔면 빵을 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여자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아이들은 버젓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하려고 한다. 과연 이 아이들에게 우리는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아메리칸드림'을 외치며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유명무실해졌지만 여전히 미국이란 나라는 기회의 나라이며 꿈과 희망을 찾아 많은 이들이 떠나는 곳이다. 그러나 현실은 철저하게 냉혹하다. 미국 이민자의 삶이란 결코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업비자 기간이 만료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불법체류자라는 딱지뿐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추방당할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아메리칸드림'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소녀 달링이 미국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다. 그래서 소설 속에 그려지는 그녀의 삶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주인공 소녀 달링이 미국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소설의 제목처럼 '새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유도 알 수 없게 지어진 영어식 이름으로 살아가는 가짜 삶의 내가 아닌 진짜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내 이름'을 말이다. 가볍지 않은 이민자의 삶을 무덤덤하게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을 통해 그동안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과연 나는 '내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온 것일까'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