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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의 검 ㅣ 소설NEW 3
김이수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12월
평점 :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임진왜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가토 기요마사에게 단검이 하사된다. 전쟁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일본 검에
불과하지만 그 검이 지니는 의미는 남다르다. 바로 조선 침략의 위대한 명분이 깃들어 있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다시 현재. 뼈아픈 과거를
뒤로한 채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채결하고 문화적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고리는 남아있으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풀어야 할 숙원으로 남아 있다.
일본과의 역사적 사건은 소설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속 소재로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다. 어쩌면 이 소설도 그 일환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 소설적 허구를
겻들여 현실이 처한 단면을 꼬집고 있다. 소설이 갖는 힘이 아닐까 싶다.
지방의 언론사를 거쳐 국회를
출입하는 기자가 된 영민에게 어느날 형사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자신의 형이 뺑소니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형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서 본 형의 모습은 단순한 교통사고 흔적으로 치부하기엔 어딘지 석연치 않다. 깨끗하게 잘린 한쪽 귀와 둔기로 얻어 맞아 심하게 깨진
머리는 뺑소니라고 할 수 없다. 그로인해 사건 담당 형사는 교통사고가 아닌 살인사건으로 여기고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피해자의 동생이자 기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하기로 한 영민은 의문 가득한 형의 죽음을 파혜쳐 나간다. 죽은 형의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 형이 일하던 인천 세관에
방문하데 된 영민. 영민은 그곳에서 형이 압류물품 창고에서 물건을 빼돌린 사실을 알게된다. 평소 형의 소심한 성격을 잘 아는 영민은 그와 같은
형의 행동에 배후가 있음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담당 형사가 은밀히 흘린 정보를 통해 사건 용의자의 윤곽을 알게 된다. 하지만 사건
용의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국회 기자로 활동하면서 자주 봐오던 양보좌관이었는데... 형과 양보자관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걸까? 양보좌관이
모시는 국회의원이 최근 금란가사 문화재 반환을 성사시킨 것과 연관이 있는걸까? 형이 압류물품 창고에서 빼돌린 물건이란 대체 무엇일까? 영민의
계속된 조사속에서 점점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진실은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결말로 치닫게 되는데... 과연 형의 죽음에 얽힌
진실은 무엇일까.
소설 <가토의 검>은 현재까지
그 존재 유무가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유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국과 일본의 국제적 정치 상황을 보여준다. 한국의 정치인의 수명은 짧다. 재선,
삼선을 통해 오랫동안 정치판에 일해온 사람은 그 권력과 이권에 눈이 멀어 정치는 뒷전이 되고 만다. 오로지 자신의 자리보전에 신경 쓸 뿐이다.
과거 일본은 온건
세력과 극우 세력이 번갈아가며 정치권을 장악해왔다. 온건세력이 장악했던 시기는 일본 안팎으로 발전을 꾀했던 시기다. 반대로 극우 세력이 장악한
시기는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기다. 현재 일본의 정치 현황은 현 정권을 필두로 극우
성향의 세력을 높여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문화재 반환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자 함에 뜻을 모은다. 한국의 정치인은
금란가사 문화재 반환이라는 외교를 통해 재선을 노리고 일본 극우 정치인은 가토의 검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과 뜻에 대한 명분을 세우고자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한일의
정치적 이권 다툼 속에서 또 한 명의 권력 욕망을 드러나는 제삼자가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이 이 소설의 반전 포인트이지 씁쓸함을 감출 수 없게
만드는 점이다. 자신도 모르게 권력에 편승해 가는 인간의 모습이 자못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쩌면 그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치밀하다. 물론 어릴 적 자신이 처한 가정환경이 지금의 그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소설을 읽으며 단순하게 그저 일본의 극우
세력에 반하는 정치적 그리고 외교적인 해피 엔딩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허를 찔릴 줄은 몰랐다. 그것도 처참하고 분하도록
말이다. 살인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그 배후가 결국 제삼자였다는 점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의 현실이라는 점에 체념하게 된다. 그래서 아쉽고 아쉽다. 소설에서만이라도 현실을 뛰어넘는 해피엔딩을 바라는것은 너무 큰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