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멋진 바바리코트의 깃을 세우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숨조차 새어 나오지 못하도록 입을 꾹 다물고 뚫어질 듯 날카로운 눈매로 신문을 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모델 또는 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그는 얼핏 보면 1950년대 젊음과 반항아적인 면모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섹시 스타 제임스 딘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 남자는 결코 모델이나 배우 따위가 아니다. 그는 작가다. 그것도 그냥 작가가 아닌 위대한 작가다. 그의 이름은 알베르 카뮈다.

프랑스가 낳은 위대한 작가 알베르 카뮈의 모습은 강렬하다. 그의 작품 <이방인> 속 인물인 뫼르소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뫼르소는 카뮈 자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그만큼 카뮈와 <이방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다시 말하면 그와 그의 작품은 한 몸이자, 분신이다. 알베르 카뮈를 빼놓고 <이방인>을 말할 수 없듯이 <이방인>을 빼놓고 카뮈를 논할 수 없다.

실존주의 문학의 정수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방인>은 삶과 현실에서 자신을 소외시켜버린 한 남자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된 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맞이하게 될 운명 같은 죽음 앞에서 초연한 남자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종국에 가서야 그 남자는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초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모순으로 점철된 관습과 부조리가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개인은 철저하게 소외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카뮈의 <이방인>에서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현대인의 그것과 너무다 비슷해 보인다.

<이방인>은 작가 개인의 인상만큼이나 강렬함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그런 만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아왔고 수많은 버전의 번역본이 등장했으며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고 논해졌다. 그래서일까. 또다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는 카뮈의 <이방인>이 그리 새롭게 느껴지진 않았다. 사실 그게 이 책의 첫인상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한 문장은 그간 출간된 번역본에서 느꼈던 동질감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끌었다. 카뮈와 <이방인>을 백 퍼센트 다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태 한 번도 '아니다'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이방인>을 만났다. 아니, 진짜 이방인을 이제야 만났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지 모르겠다. 조금 충격이었다. 말이란 본디 점 하나에도 그 의미가 전차 만별 달라진다. 처음 <이방인>을 읽은 지가 벌써 10년 전의 일이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엔 역부족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번역의 <이방인>이 카뮈를 처음 읽는 이들에겐 더 나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소설 속 문장들이 모두 유연하게 연결된다. 어색하지 않고 매끄럽게 하나의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느낌이다. 그렇게 뫼르소가 죽기 전 들었던 소리의 정체와 의미가 정확히 파악된다.

새롭게 번역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면서 오랜만에 카뮈를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껏 알고 있던 <이방인>에 대한 의문과 동시에 번역의 중요함을 새삼 알게 된 듯하다. 번역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말을 본 기억이 난다. 때론 번역자가 원작자보다 더 나은 작품으로 재탄생 시키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짧은 견해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전의 <이방인>과 새로운 <이방인> 모두를 읽고 개인적인 판단을 내려보기를 권한다. 이것이 번역문학을 접하는 나와 같은 독자가 고수해야 될 입장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그 속에서 진짜 카뮈가 전하고자 했던 <이방인>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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