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기 용이 있다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지음, 김유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첫 장을 여는 순간 거대한 용이 불을
내뿜으며 튀어나오는 거 아냐?'
이 책의 제목을 처음 보고 흥미를 느낀
것은 바로 앞서 말한 말도 안 되는 상상 때문이었다.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상상이며 현실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단지 책 제목만으로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책을 처음 받고 나서 든 생각은 '책
표지에 무시무시한 용이라도 한 마리 그려 넣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내가 아마추어라는 걸 깨닫게 해주는데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용이라는 상상 속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 용이 있다'라는 말 한마디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한 세계가 가득 담겨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반드시 천천히 읽을 것'이라는 조건이 붙어
한층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렇게 시작된 신비한 이야기들의 향연은
책을 읽는 내내 계속된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상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처음 가는 곳인데 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경험 말이다. 이 소설은 그와는 정반대의 경험을 선사한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저 단편적인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113편의 짧은 이야기들을 모두 읽은 후의 느낌은 묘하게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마치 용의
일부만 보고 '공룡의 날카로운 이빨일 것이다, 악어의 뾰족한 등일 것이다, 도마뱀의 기다란 꼬리일 것이다' 등등 온갖 추측이 난무하지만 그것들을
한데 모았더니 그 모든 특징들을 모두 갖고 있는 용이 되었듯이 말이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들을
써낸 작가는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명이다. 영화, 소설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며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스페인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고야 상을 무려 다섯 번이나 휩쓴 그의 경력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이 작품 <여기 용이
있다>를 통해 올해 스페인 만다라체 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얻었다. 그 상은 스페인에서 젊은 독자층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상으로서 독자들에 의한 진정한 소설가에 주어지는 최고의 상이 아닐까 싶다.
100편이 넘는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이야기는 처음 나오는 <전염병>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다. '수많은 카페와 광장, 상점에서 "낱말들이 죽어가고 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그가 생각하는 픽션의 무한함을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모든
의무와 책임, 형식을 벗어던지고 마음껏 비틀어대고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게 말이다. 낱말들의 죽음이라..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한편으론 이 짧은 이야기에 조금 더 살을 붙여 한편의 시나리오로 완성한다면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궁금증이 일기도 했다.
이야기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것이
짧든 길든 중요치 않은 듯하다.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상상의 깊이에 따라 짧은 이야기도 무한정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그렇게
만들어진 상상의 조각들이 모인다면 우주와 같은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면 소설을 읽으면서 매번 용을 만나러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불을 뿜는 커다란 용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