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구판절판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다치거나 망가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 망가진 사람들의 내면에 끝끝내 망가질 수 없는 부분들은 여전히 온전하게 살아 남아 있었다. 뿌리뽑히고 거덜난 삶 속에서 삶에 대한 신뢰를 발견하는 일은 늘 눈물겹다. 고난에 찬 삶을 통해서 말없는 실천에 도달한 그들의 삶은 성자의 삶처럼 보였다.
저무는 가을 논길에 경운기 한 대 지나간다. 늙은 남편이 운전을 하고, 수건을 머리에 쓴 늙은 아내는 적재함에 타도 간다. 늙은 부부는 하루종일 같은 밭에서 일해도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 돌아갈 때도 누가 먼저 가자고 하지 않아도 서로의 동작을 보면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안다. 저문 논길에 경운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늙은 부부는 거룩해 보였다. 늙은 부부가 돌아가는 논길에 개 발자국 몇 개가 찍혀 있다.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돌아다닌 극성맞은 개들의 발자국이다. 고단하고, 버려지는 삶 속에 인간다운 고귀함이 여전히 살아 있다. 여름의 여행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195쪽

슬픈 아우성
서울 지역에서 벌어지는 거리집회와 시위는 연일 150건이 넘는다. 200건에 이르는 날도 있다. 실체가 없다던 북파공작원들도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실체를 드러냈다. 미군이 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미군 가지 마라"는 시위도 있다. 가장 고통스런 시위는 추방당한 사람들의 부르짖음이다. 노점상, 세입자, 철거민, 계약직, 해고자, 해고를 앞둔 파업 노동자들이 연일 거리에서 부르짖고 있다. 경찰 지휘부는 즉각 '경력대비'를 지시한다. '경력대비'란 경찰병력으로 해산시키라는 용어다. 추방당한 사람들의 아우성은 도로교통법 시행령의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 전경들이 그 아우성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다. 한 곳에서 시위가 끝나면 전경 지휘관들은 부상자들을 점검하고 곧 다른 시위현장으로 이동한다. 봄이 무르익을수록 전경들은 밥 먹을 틈도 없이 바빠진다. 시장의 논리로 추방당한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거리에, 시장이 저들을 구원하리라는 복음이 울려퍼지고 있다. 추방은 이 사회의 오래된 문제 정리 방식이었다. 언론인을 추방하고, 교사를 추방하고, 노동자를 추방하고, 늙은이를 추방하고, 장애인을 추방해 왔다. 서울 거리에서, 시장의 힘으로 추방당한 사람은 하늘을 나는 새만치도 시장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 '경력대비'가 있을 뿐이다. -209-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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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2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uperfrog 2005-07-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네!^^ 배송완료는 됐는데 말씀이 없으셔서 어데로 사라졌나,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요. 잘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님도 건강하고 행복한 여름 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