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계절 - 차와 함께하는 일 년 24절기 티 클래스
정다형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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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다듬어나가는 일은, 무엇보다도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스스로를 들여다보지 않고 성급하게 취한 취향에서는 설익은 향이 난다. 제대로 익지 않은 취향에 대해 말할 때면, 제 몸에 착, 붙지 않아 요란스럽게 덜그럭대는 빈 수레같이 시끄럽기만 해서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이다. 차를 즐기기 시작한 지 꽤 되었지만 그에 대해 쉽게 뭐라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좀 더 잘 익히고 싶고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 일. 아직은 공부가 더 필요한 일. 내가 너무 어렵고 까다롭게 다가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 바로 '차의 세계'였다. 그런 나의 바람을 조금쯤은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책, #차의계절 을 만났다. 세상의 모든 차 산지와 차밭을 여행하며 찻잎을 고르고 이야기를 파는 사람. 영국과 인도, 그리고 일본에서 차를 공부하고 차와 관련된 다양한 경력을 쌓아왔고, 현재 티 전문 브랜드 '티에리스'의 대표 티 디렉터로 활동 중인 정다형님이 쓴 책이다.

차의 종류와 차 도구, 차 보관법, 우리는 방법 등의 기본 지식과 함께 1년 24절기에 어울리는 차를 추천하며 세계의 차 산지를 소개하고, 차와 관련된 문화 이야기를 함께 엮어내어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한 차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어서 정말 좋았다. 중국, 일본, 대만, 인도를 넘어 스리랑카와 네팔의 차에 대해서까지 알 수 있어 내 차 세계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밀크티, 아이스티, 과일 티, 리큐르 티 등 더욱 다채로운 방식으로 차를 즐길 수 있는 방법도 소개해 주어 더욱 즐거웠다. 특히 리큐르 티 말이지 후후후. 아, 그리고 티 테이스팅 용어 리스트도 있어서 앞으로 차를 마신 뒤 기록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내가 처음으로 '찻자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JTBC예능, '효리네 민박' 때문이었다. (아직도 일상의 BGM으로 틀어놓곤 하는 예능이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물을 끓이고, 퇴수기 위에 다구를 늘어놓고 보이차를 마시는 두 사람의 모습이 어찌나 근사해 보이던지. 이후로 찻자리를 자주 찾아다녔다. 집에서도 즐기고 싶어 몇몇 다구를 구매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돈이 많이 들기도 했고. 올해는 이 책을 곁에 두고 조금 더 부지런히 차와 대면해 보아야겠다. 몇 해 전에 구매했었던 절기를 소개해 주는 책 <시간의 서>와 이 책을 함께 곁에 두고 24절기를 담뿍 음미하는 한 해를 보내보려고 다이어리에 24절기를 표기해두었다. 이제 4일 뒤면 입춘이다.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계절의 시작을 추천해 주신 차와 함께 하고 싶으니 연휴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닐기리 티를 주문해 보아야겠다.


올해엔 마음에 꼭 드는 자사호 혹은 티포트를 하나 꼭 마련하고 싶다. 지난해에 도자유희전 갔을 때 마음에 들어 구매했던 저 물방울 찻잔과 세트인 티포트도 자꾸 생각나고... 아무튼 성급하게 고르지 말고 천천히 오래 공부하고 이것저것 들여다보다가 가을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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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에세이&
김현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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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님에 이어 김현 시인님의 에세이를 읽었다. 앞서 황정은 작가님의 에세이에 대한 이야기를 적으며 '소설가가 쓴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말했었는데 그것은 평범한 일상에서 '반짝이는 이야기'를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의 글이기 때문이었다. 반면 시인의 에세이는 뭐랄까, '반짝이는 이야기'보다는 '단어의 날'을 발견하는 글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자주 쓰이고, 평범하게 쓰이는 단어들을 시인의 감성과 시선으로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익숙한 의미 위에 새로운 의미를 쌓아 더욱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감각을 갈고닦아 예민하게 만들어주는 시인이 쓴 에세이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일렁이다는 물에 떠서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거나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 동사.

마음은 동사,라고 어느 글에 쓴 적 있고.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동사를 활용해 마음의 사계절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을 설명하는 일

p.26


나는 어떤 동사로 나의 사계절을 표현해 볼 수 있을까?를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장이다. 동사로 계절을 떠올리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려웠다. 비록 그럴싸한 동사의 사계절을 그려내진 못했지만 잠시라도 우리말 단어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며 계절과 어울리는 동사를 찾아보려고 애썼던 그 시간이 참 즐거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동안 얼마나 건성으로 단어들을 대했는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란 결국 나를 세우는 마음이며 그 마음만이

어쩌면, 하고 한 사람의 삶을 대신하여 살 수 있는 용기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모든 사랑은 자기에서 출발해 타인의 경유하고 마침내 우리에게 도착한다는 것을 깨치는 연쇄작용이었다.

P127


이 책에선 이렇게 시인다운 이야기들뿐 아니라, 한편으로는 생활인으로서의 김현, 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자꾸만 특정 동네의 아파트 시세를 알아보는 이야기가 요즘 나와 너무 똑같아서 한참 웃다가, 사회가 정해놓은 길 밖에 서 있기 때문에 사회가 내어준 기회에 손조차 뻗어볼 수 없는 현실의 불합리함을 문득, 깨닫고 화가 나기도 했다. (물론 나는 작가님의 사정과는 사뭇 다른 '비혼 가구'로서의 입장이지만) 생활 동반자 법과 차별 금지법의 필요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하는 너무 현실의 싸한 쇠의 맛이 느껴졌더랬다. 그러면서도 차별과 혐오에 결코 지지 않겠다는, 지지 않기 위해 끝내 다정해지겠다는 마음이 나에게 와닿았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란 삶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환상을 버리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죽음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모든 죽음에 애도를 표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소란스럽게 앓고자 하는 이를 더는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다.

살아 있다는 이유로 고요히 소멸해가는 이와 이제 더욱 가까이 지낸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잘 이르고 싶다는 이들의 침묵에 더 마음이 쓰인다.

그런 이유로 나는 영정사진을 미리 찍어두고 수의 대신 입고 싶은 옷을 골라 놓거나

장례식장에서 계속해서 틀어놓고 싶은 음악을 미리 귀띔해 주는 사람을 벗으로 두고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P.142


현실이라는 바닥에 두 발을 착, 붙인 글이라서 좋았던 김현 작가님의 에세이에서 특히 자주 눈에 들어온 단어는 '죽음'이었다. 올해 4월,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생전 처음으로 '죽음'이 현실로 느껴졌었다. 십 년 전 친한 친구가 떠났을 때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장례의 '주체'가 아니었다 보니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이 할머니의 장례식 때, 아버지가 안 계셔서 손주인 오빠와 내가 장례의 주체가 되어보니, 갑작스레 몰려왔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습관처럼 '내 꿈은 단명'이라고 외치던 것을 멈추었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던 태도를 고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난 단어의 무게를 가벼이 느껴온 것만큼 삶의 무게 또한 가벼이 여겨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인생이라는 일 인분의 그릇을 내 힘으로 채워 왔는가,라는 물음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요즘. 죽음에 잘 이르기 위해 그릇 안에 무엇을 채워나갈지를 잘 생각해 보아 할 때다. 삶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때다.


다정하기 싫지만 다정한 시인, 김현 작가님의 문장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잘 이르고 싶다'라는 이들의 '침묵'을 배웠다. '타인의 얼굴에서 시간을, 시간에 힘입어온 기쁨과 슬픔을 읽어내려고 노력하는 것(p.149)'이 어른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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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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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사랑한다. 섬세하고, 날카롭지만 다정한. 냉정하지만, 뜨거운. 세상의 부당한 일들을 눈 감고 넘어갈 수 없어 결국 디스크와 불면에 시달리며 책상 앞에 앉아 단단한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한다. 소설 속에서 동시대의 폭력, 부당함, 부도덕함에 목소리를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황정은 작가님의 첫 에세이집이 출간되었다.

파주로 이사했고, 코로나로 인해 외출을 삼가고 있으며, 타인의 애쓰는 삶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문득, 창밖으로 보이는 경의중앙선을 바라보며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애쓰고'있음을 생각하는 사람. 나의 '무사'에서 누군가의 '분투'에까지 선을 이어낼 수 있는 부지런하고 다정한 사람. 우리에게 '건강하시기를', 하고 인사해 주는 사람. 원래도 좋아했지만, 에세이를 통해, 그리고 최근에 시작하신 책읽아웃을 통해 조금 더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다가와 주신 작가님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작가님의 글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더 크게 응원하고 싶어졌다.

특히 작가님이 자주 말씀하시는 어떤 '게으름'에 대해 생각한다. 여태 해 온 대로, 자기가 가진 것만큼만 헤아리는 게으른 태도로 내뱉는 어떤 '상투적이라서 해로운 말''에 대해 생각한다.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에 대해서도. 차별받았다는 것에 분노할 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에 대하여. 기어코, 모르겠다는 의지에 대하여. 나는 타인의 삶이 현재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을 헤아릴 줄 모르는 무지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아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차별을 차별로 치유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가. 깨어있고 싶고, 깨어있었다 말하고 싶지만 나 역시 아주 자주, 인식하지도 못한 채 차별을 하고, 혐오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습니까.

P.134

나는 정치적이고 싶다. 가능한 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편이고 싶다. 고민하는 사람이고 싶다. 기어코 모르겠다는 태도보다는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고 싶다. 게으르게 혐오하기보단 부지런하게 이해하고 싶다. 꽤 멍청하고 꽤 게으른 나에게는 섬세하고 눈 밝은 소설가분들의 글이 꼭 필요하다. 황정은 작가님의 글은, 그래서 나에게, 필요했고,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은 그 일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일들이 내 삶에 있었고 나는 삶과 읽기와 쓰기를 통해 조금씩 학습하면서

본의든 아니든 조금씩 변해왔다.

그 일은 내 전부가 될 수 없다.

P.179-180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가족에게, 친구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상처받고 있을 사람들에게 '그 일은 내 전부가 될 수 없다'라는 단단한 말은 위로가 될 수도, 용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변할 수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읽고, 쓰고, 보고, 생각한 것들을 통해 변화한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내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튼, 계속해 볼 일이다. 황정은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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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이름 -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 예술가들
권근영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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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서 지워졌던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 불러보는 책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권근영 기자의 <완전한 이름>이다. 도서관에서 <여자의 도서관>을 빌려온 다음날, <완전한 이름>의 발간에 맞추어 서평단 모집을 하는 게시글을 만난 것은 완전한 우연이었다. 서둘러 서평단을 신청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고, 운 좋게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비비드 한 컬러를 자랑하는 <여자의 도서관>과 이번에 읽은 책, <완전한 이름>을 함께 놓고 사진을 찍어본다. 단단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두 여성의 눈빛이 마음에 든다.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엘리자베스 키스, 노은님, 정직성, 베르트 모리조, 파울라 모더존베커, 버네사 벨, 천경자, 박영숙, 유딧 레이스터르, 힐마 아프 클린트, 나혜석,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아르테시미아 젠틸레스키. 14명의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불려졌다.

첫 이야기부터 강렬했다.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는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남편을 따라 아우슈비츠행을 자청, 도착 직후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는데 그날 테레진에서 아우슈비츠로 간 1550중 살아남은 112명에 그 남편이 들어있었다는 삶의 아이러니에 말문이 막혔다. 홀로코스트라는 지옥의 시대에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며 희망을 부여잡았다는 프리들이 보여준 미술이 가진 치유의 힘, 그리고 바우하우스라는 진보적 교육기관에서조차 여성을 배제했던 남성 위주 사회의 한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글이었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 속에 스며든 한국 여성의 삶에의 애정, 최근 가나아트센터에서 작품을 만나본 적 있는 노은님 작가님의 작품에 스며있는 생명의 기운, 추상도 대단히 정치적일 수 있다고, 추상을 정치에서 분리한 것은 1980년대 민중미술과 단색화가 대립하며 생긴 오해라고 말하며 한국적 조형적 질서를 화폭에 풀어내는 정직성 작가님의 작품들, 버니지아 울프의 언니 버네사 벨의 노년의 자화상 속의 당당한 눈빛, 유닛 레이스터르의 당당하고 쾌활해 보이는 자화상,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의 여성 작가들과의 연대, 아르테시미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머리와 마음에 잘 갈무리해두어야 할 빛나는 가치들이 가득 담겨있는 책.

<여자의 미술관>과 힐마 아프 클린트라는 예술가가 겹치는데, 두 작가님들의 힐마 아프 클린트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를 느낄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너무 시대를 앞서가 인정받지 못하고 외롭게 세상을 떠난 힐마 아프 클린트를 향해 우호적이고 애정어린 마음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사후 20년 동안 작품들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유언을 남긴 힐마의 선택을 한쪽은 '두고 봐라, 그때 내 그림은 분명 인정받을 것이다'라는 자기 신뢰로, 한쪽은 '소심해져'있는 상태로 읽어낸다. (어느 책이 어떻게 읽어냈는지는 비밀!) 나는 전자의 해석이 맞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소심해져 있었다면 아마도 작품을 '폐기'해달라고 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책을 연달아 읽으니, 이런 부분을 발견해낼 수 있어 더욱 즐거운 책 읽기였다.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을 읽고 솔직하게 쓴 감상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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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 알고 보면 가깝고, 가까울수록 즐거운 그림 속 철학 이야기
이진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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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온 전시를 잘 기록하고 싶어 미술 관련 책을 읽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래서 한겨레출판 인스타그램에서 이 책의 서평단 모집 글을 발견했을 때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서둘러 저요! 저요! 요즘 보고 온 전시를 잘 기록하고 싶어서 미술 책에 푹 빠진 저야말로 서평단에 가장 잘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 이렇게까지 적진 않았다.)라고 서평단 신청 접수를 했고, 지난 목요일 책을 배송받았다.


철학과 미술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사유하게 만드는 데 그 아름다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

미술을 대하면서, 혹은 삶을 살아가면서 즐거운 철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부끄러움을 다소 덜어내고 이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 사회는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매여 있습니다.

정해진 답을 기를 쓰고 찾기보다는 스스로 좋은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로,

또 답이 될 수 있는 선택지를  획기적으로 늘려내는 철학자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철학자의 미술관 이용법> 들어가는 말 중


책의 들어가는 말을 읽으면서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철학,이라는 단어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졌던 책이 한결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 느낌대로 너무 먼 곳을 바라보기보단 바로 지금 우리의 삶과 그림, 그리고 철학을 연결 짓는 작가님의 탁월한 솜씨가 매우 돋보이는 책이었다. 자신의 전공과 그림을 연결 지어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는 작가분들이 계셔서 정말 행복하다.


첫 챕터부터 그림 자체는 익숙하지만 단 한 번도 손을 클로즈업해 볼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그림 '천지창조'를 통해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던 니체를 그림 앞으로 불러오고, 영원회귀하는 우리 인생을 영원히 반복되어도 만족스러울만한 아름다운 삶으로 한 차원 고양시키자고,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드높이는 삶을 살자고 말하는 작가님의 글 솜씨에 감탄하며 책에 빠져들었다. 책가도를 바라보며 '가치 다원주의'를 이끌어내고 어린아이가 사과를 따고 있는 톰 시에라크의 작품 '빨간 모자'에서 홉스와 로크, 그리고 루소까지 이어지며 정치 국가의 사회계약설을 훑어낸다. 파울 클레 Paul Klee의 <상대의 지위가 더 높다고 믿는 두 사람의 만남, 1903>으로 루소의 자연 상태를 풀어내는데, 그 괴이하고 코믹한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최근 다른 책에서 <앙겔루스 노부스>라는 그림으로 만난 적이 있었던 '파울 클레'가 좋아져 버리고 말았다. 파울 클레는 특히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서, 이 책에서 많은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스쳐 지나가는 화가 중 하나일 뻔했던 파울 클레가 이 책을 통해 이름을 단단히 기억하는 화가가 되었다.




Paul Klee | Two Men Meet, Each Believing the Other to Be of Higher Rank, 1903

이미지 출처 :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62643



작가님은 위의 그림, <상대의 지위가 더 높다고 믿는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루소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펼쳐내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교와 허영의 문화를 돌아보게 만든다.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남과 비교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 비교가 단지 비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 두기며 혐오로 번지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p.107)'는 문장의 서늘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뒤에서 정의의 여신상에 대한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좀 더 심화시키는데, 아파트 브랜드나 타는 차, 가지고 있는 가방이나 옷차림 등으로 '전혀 필요 없는 곳에까지 구석구석 눈가리개를 치워놓고는 타인을 훔쳐보고 재단하려는 (...) 감아야 할 곳에서 눈을 부릅뜨고, 날카롭게 쳐다보아야 할 곳에서 눈을 감는(p.186)'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곱씹어 생각하게 만든다.



클림트가 작업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 강당의 천장 <철학>, <의학>, <법학>을 모호한 개념의 반대되는 이미지를 통해 더 강렬하게 본질을 드러낸다고 설명하며 철학자 '주디스 슈클라'의 사상을 소개하고, 작가님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파울 쿨레의 그림들을 여럿 소개하며 '관념을 눈에 보이게 하는 작품들. 사람들에게 물음표를 띄우고 사유하게 만드는 작품들(p.196)'의 매력을 엿보았다. 나는 실은 지독한 허무주의자이면서 냉소주의자인데, 이 책은 그런 나에게 내내 거기에서 머무르지 말라고, 한 차원 더 나아가 만물을 유쾌하고 성스럽게 긍정하는 어린아이의 단계로 다시 나아가라고 말해준다.



인간은 비어있는 존재다. 

어느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불행한 인간이 아니라 그저 불행한 순간이 나를 지나갈 뿐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 아니라 악한 마음이 잠시 나를 스쳐갈 뿐이다.

나는 명예로운 인간이 아니라 명예가 잠시 나에게 와서 머물 뿐이다.

우리가 비어있다는 점, 딱딱한 돌이나 껍데기처럼 굳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존재로 말랑하게 변신할 수 있는 능력자라는 점은 

우리 삶을 한층 다양하고 즐겁게 한다.

비어 있는 구멍을 좋은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하고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P.208


어제까지는 냉소주의자였을수도 있다. 불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일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우리는, 마음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자다. 이 문장을 읽은 순간 가슴속에 응어리져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변할 수 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변할 수 있다... 그림을 보는 일, 책을 읽는 일, 좋은 음악을 듣는 일, 그런 일들이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닌 이유는 그것에 있지 않을까. 마주하고, 읽고, 듣고 거기에서 얻은 감동, 기쁨, 혹은 불쾌함, 충격. 그런 것들로 내 비어있는 구멍을 채우려 노력하며 좋은 방향을 향해 걸어가고자 하는 마음을 다잡게 만들어 주는 책이었다. 제대로 된 질문을 통해 더 아름다운 내일로 걸어나가고 싶은 허기진 사람들이 이진민 작가님이 풍성하게 차려낸 식탁 앞으로 더 많이 초대받았으면 좋겠다.


* 한겨레출판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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