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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리히터 - 영원한 불확실성 ㅣ 현대 예술의 거장
디트마어 엘거 지음, 이덕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2월
평점 :
* 출판사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작가 미상>을 보았었다. 그때의 난 미술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의 실제 인물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었는데 영화 덕분에 이름을 알게 되었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에 와선 이 영화의 후반부는 거의 기억에 없다. (3시간이 넘는 영화였는데, .... 잤나....?) 전반부 어린 주인공의 이모 엘리자베스가 그 역겨운 '인종 개량'(우생학)의 희생자로 목숨을 잃는 장면, 그리고 주인공이 미술대학에 진학한 후 선전미술을 그리는 장면 같은 것만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러니까 정작 중요한 그 이후의 리히터의 작품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영화를 본 직후엔 리히터에 대해서 더 공부해 보아야지,라고 생각했었지만 영화의 내용이 흐릿해지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그 생각은 스러져갔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름이 다시 내 머릿속에 소환된 것은 몇 년 후 곽아람 작가님의 책 <공부의 위로>덕분이었다. 표지의 이 '사진'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읽는 사람>) 누구 작품이지? 하고 앞날개를 펼쳤을 때 사진이 아닌 그림이라고 해서 놀라 작가의 이름을 검색하니 함께 검색된 영화가 있었고,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다 보니 왜 내용이 익숙하지, 하고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다가 영화 <작가 미상>을 생각해 냈다. 두 번째 만남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름이 드디어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름 기억'까지가 끝이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5/0113/pimg_7922521474569218.jpg)
지난해 12월,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던 중 을유문화사의 피드에서 그렇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미술가의 이름을 보았다. 영화를 보았던 2018년과는 다르게, 코로나 시절 동안 미술에 급격하게 빠져들어있었던지라 드디어 때가 왔다, 싶어 서둘러 서평단 신청을 했고 감사하게도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손에 쥐게 되었다. 작년 말에 '아마도 2024년의 마지막 책'일 것이라고 성급하게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2024년의 마지막 책도, 2025년의 첫 책도 아니지만 어쨌든 디트마어 엘거가 성실하게 탐구하고 기록한 리히터의 '거의 모든 것'을 꽤 오랜 시간을 할애해 읽어내었다. 그가 기록한 리히터의 작품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확장하고, 그러나 다시 되돌아갔다가 다시 나아가기를 반복한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릿하게 문지른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모호한 태도를 관철하는 리히터의 일화들을 읽으며 혹시 이 분 회피형인가? 하고 잠시 장난스러운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뒤, 그는 어쩌면 오히려 하나의 사조,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노선'을 정하는 것을 온 삶을 다해 거부하며 오히려 명료하게 '확증편향'의 위험을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경고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책 거의 초반 부의 "내가 그림으로 표현한 건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자 함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이 어려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라는 리히터의 말은,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야 겨우 이해되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자마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사실 처음 읽을 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윤혜정 작가님의 추천의 글을 다시 되짚어 읽었다.
절대적 그림도, 아름다운 이상향도,
명확한 진실도 존재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흡수해
도로 뱉어 내길 반복하며
세상을 보는 예술 공식을 만들어 냈다.
사실 작금의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숱한 비극적 상황들 역시
지나치게 확고한 신념과 신성불가침한 이념,
결연한 태도와 정형화된 정체성 등
모든 게 압도적으로 분명해서
생긴 문제가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말을
역사와 예술의 과오에 맞서며
명예를 지켜온 리히터에게서 듣는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직 탐구 중입니다,
고민을 지속할 작정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 영원한 불확실성>
추천의 글 <의심으로 그리는 희망의 비가 by. 윤혜정>
솔직히 말하자면 다소 불친절한 책이었다. 120개에 달하는 도판이 실려있긴 하지만 리히터의 작품을 잘 알지 못하는 나에게 120점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하지만 이 성실한 예술가는 너무나도 성실하게 자신의 작품을 아카이빙 해 왔기에 그의 홈페이지에서 그가 작품 뒤에 붙인 숫자만으로 간단하게 작품을 검색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모든 작품을 검색하며 읽지는 못했지만 중요하게 언급되는 작품들을 홈페이지의 도움을 받아 이미지를 확인하며 읽을 수 있었다. (https://www.gerhard-richter.com/en)
사진회화, 추상화, 풍경화 등 다양한 스타일을 오가는 리히터의 예술 세계를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친 삶의 경로, 그 경로 위에서 만난 예술가들, 컬렉터들, 갤러리스트들과의 관계들, 당대의 평론들까지 방대한 이야기 꾸러미를 펼쳐놓은 이 책은 왜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예술가인지를 납득시킨다. 책을 다 읽고 영화 <작가 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영화의 시작이 나치 독일의 퇴폐미술전이었다는 것이, 소년이 바라본 불타는 드레스덴 위로 날아가는 전투기들이 나오는 장면이 그의 그림 <폭격기(13)> 와 겹쳐진다는 것이, 이제야 새삼 눈에 보인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선택의 부재,
구성의 부재,
스타일의 부재,
내용의 부재와 같은 용어가
리히터 작품의 특징이다.
주자네 에렌프리트의 리히터의 초상화에 관한 논문
<특성없이> 중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부재'야말로 리히터가 끝없는 고민 끝에 어렵게 선택한 답이었음을 알겠다. 언젠가 꼭, 그의 작품 <October 18, 1977 (1977년 10월 18일)> 연작과 <Birkenau(937/1~4)(비르케나우)>를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영화를 마저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