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 코드 - 바그너와 철학
브라이언 매기 지음, 김병화 옮김 / 심산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초연에 때맞춰 많은 바그너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책은 <트리스탄 코드>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바그너가 아니라 저자인 브라이언 매기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저자는 딱딱한 철학을 일반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학자다. BBC에서 세계적인 석학들과 가진 대담을 엮어낸 책을 비롯하여 그가 쓴 저술들이 국내에도 몇 권 소개된 바 있지만 사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널리 읽혀져야 할 인물이다.

철학 전공자가 저자인 만큼 이 책은 바그너에 영향을 준 철학 사상들을 살펴보는 데 집중한다. 바그너만큼 당대의 사상에 능동적인 반응을 보이고 그것을 자신의 예술로 소화해낸 작곡가도 없으며, 특히 그 자신이 혁명가이자 문필가이기도 했던 까닭에 그가 관심을 가진 철학 사조들은 그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혹시라도 바그너가 심취한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그의 음악의 관계를 과소평가하는 사람들을 향해 브라이언 매기는 결단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바그너는 딜레탕트 수준이 아니라 대단히 진지하고 심오하게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이해했으며, 그가 없었다면 아마 니체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돋보이는 부분은 바그너의 삶을 청년 바그너와 후기 바그너로 나누어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년 시절 바그너는 사회 변혁의 희망을 품고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한 몽상가였고, 후기에 이르면 이런 희망에 회의를 느끼고 형이상학에 몰두하게 된다. 청년 독일단 시절의 라우베를 시작으로 바쿠닌, 포이에르바흐를 거쳐 쇼펜하우어, 니체에 이르는 그의 지적 동반자들 중 이런 변화의 갈림길에 위치한 인물은 물론 쇼펜하우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니벨룽의 반지> 4부작에서 가장 흥미롭고 모순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바그너 인생에 분수령이 된 1854년이 <반지> 작업의 중간에 놓이기 때문이다. 즉 그해 이전에 음악까지 모두 완성된 <라인의 황금>은 종합예술작품의 이념에 가장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만년의 <신들의 황혼>에 이르면 음악이 예술의 중심이 되는 교향악적 악극의 모습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그너가 <파르지팔> 이후에 계획했던 교향악 작품은 텍스트 없는 단악장의 긴 교향시가 되었을 것이라고 브라이언 매기는 말한다.

책의 또 하나의 축은 바그너에 관한 편견을 해명하는 것이다. 바그너 하면 거의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히틀러와 관련된 부분과 반유대주의 혐의, 그리고 <파르지팔>에서 바그너가 기독교로 귀의했고 그 때문에 니체와 결별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오해들을 해명하는 대목에서 저자는 다소 편향적인 면을 드러내는데, 나는 오히려 이것이 이 책의 독서를 더 친근하고 편하게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이 가장 장점으로 발휘되는 대목은 니체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장이다. 니체가 바그너라는 거대한 지성에 매료되고 그로부터 돌아서기까지 겪은 심리적 변화를 정신분석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꽤나 흥미진진했다. 이를 통해 니체와 바그너는 내게 대단히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인물로 다가왔다.

바그너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예술을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았지만 중년 이후 세 가지 큰 행운을 잡았다. 하나는 앞서 말했듯이, 형이상학적 전환에 토대를 마련해준 쇼펜하우어를 접한 것이고, 둘째는 일생의 후원자가 된 루드비히 2세를 만난 것이며, 마지막은 자신의 지성을 나눠줄 니체를 만난 것이다. 인생의 선배와 후원자와 후배. 그는 만년에 이 모든 것을 가졌다. 자신의 삶을 이끌어줄 사상가를 만났고, 자신의 예술을 이해해주고 실현시켜 줄 후원자를 만났으며, 자신과 지적 토론을 벌일 후배를 만났던 것이다. 문화적으로 이렇게 창조적이고 행복한 만남이 또 있었을까. 이것은 내가 바그너를 진심으로 부러워하는 점이다.

<트리스탄 코드>가 국내에 나온 바그너 관련 서적 가운데 첫손에 꼽힌다는 의견에는 이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바그너라는 복잡하고 모순된 개성을 가진, 그리고 숱한 편견과 오해에 둘러싸인 인물의 삶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분명하다. 바그너의 음악을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이 책을 읽고 바그너에 공감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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