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와 넓이 4막 16장 - 해리 포터에서 피버노바(FeverNova)까지
김용석 지음 / 휴머니스트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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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는 일종의 '예술가'다. 그가 창조하는 것은 사유 체계이며, 그것은 개념을 통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개념은 시대에 대한 세세한 관찰을 바탕으로 지성과 판단력을 가동함으로써 얻어진다. 개념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 다시 말해 관념의 유희로 빠지지 않기 위해 철학자는 부단히 삶에 개입하여 흐름을 포착하고 해석하며, 그 결과물을 언어와 논리로 표현한다. <깊이와 넓이 4막 16장>은 이 같은 철학의 역할에 충실한 사유의 소산이다.

책의 화두는 '혼합의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 혼합의 시대라는 진단부터가 독특한데, 여기에는 인식의 '단절'이 아닌 '연속'에 주목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즉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섞이는 지점을,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여명과 황혼을 보는 혜안을 기르자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오늘날 세계는 절대적인 하나의 현실이 아니라 개개의 현실들이 모여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그 현실들의 틈을 환상과 상상력으로 채워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렇듯 그의 철학은 공존의 지혜와, 권위를 무장해제하는 상상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책의 곳곳에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많다. 신과학과 SF를 대립항으로 설정하면서 우리 시대의 과학의 문제를 논하는 대목이나, 느림의 유행을 다시 짚어보고 멀티미디어와 하이퍼텍스트의 숨겨진 억압적 성격을 드러내는 시도가 대표적인 예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탈지구화시대에 우주시대를 준비하려는 기민함에 있다. 인류, 우주, 기계, 신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여 인간의 구성력과 윤리를 되새겨보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보는 넓고 다양한 방식을 개발하고 즐기는 것이 미래 사회의 당면한 과제라는 인식이다. 이것을 우물안개구리의 비유를 들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너의 우물 속으로 세상을 끌어들여라."

철학자는 끊임없이 시대에 딴죽을 거는 잔소리꾼이다. 하지만 그 잔소리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제시할 수 있을 때 교훈이 되고 삶의 지침이 된다. 급격한 문화의 변동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주며, 때로는 따끔한 충고와 비판도 아끼지 않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유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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