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연수의 마지막 한달은 뱅쿠버에서 스튜디오를 하나 빌려 지냈다. 스탠리 파크 가까이에 있는 그 스튜디오에선 뱅쿠버 항구와 노스 뱅쿠버가 한눈에 보였다. 아침이면 커다란 여객선이 들어오고, .
왜 갑자기 캐나다 얘기가 나왔냐하면, TV에 로열 티렐 고생물 박물관이 나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지금도 나에게 '고고학이나 지질학을 하면 좋았을걸'하고 얘길하신다.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고 있으니, 그 끄트머리는 하고 있는 셈이다. 캐나다는 이 세상에 이렇게 다른 지형이 있을 수 있구나, 지리나 지구과학 교과서에 나온 지형이 정말로 세상에 있구나하는 걸 처음으로 보여준 땅이다. 우리나라처럼 이미 노년기에 들어선 지형이 아니라. 아직도 변화가 일어나는 지형이 거기에 있었다.
티렐 박물관은 앨버타주에 위치하고 있다. 캘거리에서 여행은 시작되었다. 다운타운에서 가까운 Lord Nelson Inn(이상하게 이 호텔이름은 잘 기억)에 묶었는데, 아침에 호텔로 밴 하나가 픽업을 왔다. 밴에 탄 사람은 가이드 겸 운전사말고 나까지 3사람. 캐나다 동부에서 온 간호사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엄청나게 말없는 청년 하나. 여름 관광 시즌이 거의 끝나가고, 캐나디언 록키에는 첫눈도 내렸다지만, 이렇게 사람이 없을줄이야. 가이드인 Colin은 캘거리대학원에서 관광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방학 동안 가이드일을 하는 거였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조용하고 따로 놀기 좋아하는 관광객들이어서 무지 심심했을 거다. 하긴, 대초원을 가로질러 황무지까지 공룡화석을 보러 간다는 사람들이 제정신일리는 없겠지.
빙하기가 끝나면서, 녹아내린 빙하들이 스치며 지나가서 만들었을 넓디넓은 대초원-프레이리! 어떻게 이 지형이 만들어졌는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밀밭 중간중간 지반이 약해서 함몰된 자리도 보이고. 곳곳에 장난감 오리들이 물을 먹는 것 처럼 보이는 미니유정이 늘어서 있는 것도 신기. 그렇게 1시간 이상 달린 거 같다. 이번엔 Badland라는 별명에 걸맞게 초록색 하나없는 황무지 등장. 좁다란 협곡, 황무지 가운데 움푹 땅이 꺼진 것 같은 절벽.마치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로 통할 것 같은 지형이었다..아주 변화가 넘치는 풍경이었다.
그 배드랜드는 세계에서 몇손가락에 꼽히는 공룡화석산지였고, 그 한가운데 로열 티렐 고생물 박물관은 있었다. 수많은 전시물 중 기억에 남는 것을 꼽자면, 정말로 날카로운 발톱을 자랑하던 사람만한 크기의 랩터 화석, 짝지기 중에 화석이 되었는지 겹쳐져 있던 삼엽충의 화석, 치과기공사들이 사용하는 거 같은 기구를 가지고 공룡화석을 다듬던 학자들의 모습이다.
박물관 관람이 끝나고, 풍화된 지형(버섯 바위 등)을 보러 갔다. 이미 록키 산맥에서 거대한 풍화지형을 여럿 봤지만, 여기는 아기자기한 풍화 지형 사이를 사람들이 직접 거닐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서부극에 나올만한 낡고도 작은 마을(앨버타주는 대초원 말고도, 카우보이들의 고장이기도 하다. 교외에는 아직도 목장 많고, 선주민들의 버팔로 사냥터 유적도 있고, 민속촌 같은 데 가면 서부개척시대 모습을 보존해 놓고 있으며, 카우보이 축제도 매년 열린단다)에 갔다. 마을엔 이제 사람은 살지 않지만, 조용한 식당에 들러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거기서 투어 요금을 계산하고, Colin이 운전하는 미니밴은 다시 대초원을 지나 캘거리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도중에 내가 차창 너머로 대초원의 사진을 몇장 찍자, Colin이 이것도 볼만하다며 차를 세웠다. 서로 다른 3개의 시대를 보여주는 커다란 곡식창고였다. 낡은 목재창고에서 현대적 창고까지, 3채의 건물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밀의 수확이 늘어나면서 이전 건물을 부수지 않고 증축을 한 거 겠지만, 보기 드문 광경이리라.
캘거리가 다가오자, Colin은 어디서 내려주는 게 좋을까하고 우리에게 물었다. 캘거리 중심가 호텔에서 공항버스가 있는 건 알았지만, 지도를 보니, 시내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거 같다. 하여간 공항에 가려니까 버스 탈 수 있는 곳에 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을 시내에 내려놓은 Colin이 '다음은 공항'하고 외치는 것 아닌가. 의외의 친절에 감동*감동. 공항에 도착해서 몇번이고 감사 인사를 했다. 나중에 여행사로 직원칭찬엽서라도 보내줬어야 하는 건데. 덕분에 공항에 일찍 출발해서, 예약보다 2시간 빠른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뱅쿠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 본 록키 산맥은 또다른 장관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산의 병풍이 내 눈 밑에서 입체지도처럼 펼쳐져 있다니!
뱅쿠버에서 재스퍼까지는 10시간 넘게 기차를 탔는데, 돌아갈 때는 금방 날아갔다. 뱅쿠버 공항에 도착해보니, 땅거미가 깔리는 속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여행 준비를 도와준 Moko에게 전화해서 도착보고를 하고는 공항리무진버스를 타고 Robson Street근처의 아파트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