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1 - 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박철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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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적/사적 권력들은 기록의 실행과 보존에 둔감하고, 의도적으로 기피하는 성격마저 짙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랄 것도 없이, 이너 써클 외부에선 정보 자체가 생산, 유통되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가쉽이요, 교훈을 얻지 못한 망각의 태도는 동일한 오류의 반복을 부른다. 

전기와 회고록 쟝르의 수준 역시 한국 사회의 저런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록과 증언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작과 미화가 애초에 목적이었으니, 희생된 나무들만 아까울 따름이다.  근자에 그나마 좀 나은 것이 강만수 전 차관과 박철언 전 의원의 책들이다.  물론 자기 중심적인 한계가 없는건 아니다.  외환위기의 원인이었던 재벌의 (설비투자를 위한) 무분별한 차입을 제대로 거론치 않는 강 전 차관이 방조범과 다름없는 경제 관료들의 책임을 면피하듯이, 국정 전반에 관여했다는 저자 역시 86년 평화의 댐 같은 것은 결코 상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내용도 다분히 정치 편향적이라, 당시 과잉 투자의 후유증으로 붕괴 조짐까지 보이던 위기 상황에서 소방수 역할을 했던 81년 일본의 40억불 차관 같은 중요 사건도 빠져 있다. *1

한계에도 불구하고 책이 가지는 의미가 사라지진 않는다.  개별 사건들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과거 수준과는 달리 상당히 상세하다.  그 주장들이 과연 사실이냐 아니냐, 어떤 의도가 있느냐 등등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좀 더 완전한 실체로까지 이어지기 위하여 더 많은 증언과 주장이 앞으로 나와야 하지 않을까.  회고록의 정치적 의도와 내용 자체의 시시비비를 떠나, 적어도 입을 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이 어떤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최전노 & 삼김씨 등도 상세한 회고록을 남기면 좋겠고, 관료와 정치인들도 출세할 권리만큼이나 증언의 의무 역시 있다는 사실을 좀 깨달았으면 한다.  변명과 거짓이라도 좋으니, 누군가를 묻어 버리고 자신을 추켜세울 목적이라도 좋으니, 자가당착과 자화자찬의 극치라도 좋으니, 무조건 입을 열어라.  기록 부재, 감시 부재, 반성 부재의 한국 사회에서 '증언' 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1 하나회라는 일개 사조직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5공은 별로 복잡한 성격의 정권이 아니고, 정치경제적으로 굳이 의미를 찾는다면 70년대 후반부터 대두된 구조조정의 필요성와 기회를 표피적인 현상유지로 날려먹은 '불필요한 악' 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직에서 물러나면 약속이나 한듯 입을 다무는 다른 전직들에 비하여 저자가 예외적이긴 하나, 시국 대책이나 세우고 파워 게임에 몰두한 '일부 개인의 역사' 를 '모두에게 중요했던 역사' 로 착각해선 곤란하다.  저자 서문에서 산업화 시대의 주역들을 책으로서 평가해 달라는데,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들을 보면 산업화를 말할 무슨 자격이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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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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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책과 글은 그의 주장을 파악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이미 소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담집이 나온 것은/나와야 했던 것은 그간 한국에서의 소위 '박정희 논쟁' 이 주제를 일탈한 이전투구였음을 역으로 보여준다. 개인적으론 장하준, 정승일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면서도 각론 모두에 동의한건 아니지만, 주장 자체를 오독한 비난들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해 왔다. 상황을 총체적으로 조망해볼 의지와 능력이 되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에, 저런 식으로까지 입장을 해명하고 논점을 제시하려는 성실성은 인정 받아도 될 듯 하다. 

현재의 한국 사회에게 과거의 급속성장 모델이 던져주는 시사 중의 으뜸은, 사회적인 접근-사회적인 해결이란 큰 틀을 우리가 얼마만큼 지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장하준이 지적하는대로 박정희 시대 경제 성장의 핵심 요인은 '민주와 자유를 희생한 효율' 이 아니라 (소위 박정희 옹호자와 반대자들의 일치된 오류) '자유주의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경계하며 사회적 통제의 원칙을 고수한 태도' 일 것. '이미' 불평등한 경제 질서 하에서 상이한 조건에 놓여 있는 후발 산업화 사회가 이론적으로 선택할 수 있고 현실 사례로도 전범을 삼을 수 있는 것은 '시장과 통제의 혼합적 적용' 이 거의 유일하다. 오직 더 많은 (경제적) 자유가 더 많은 성취를 가능케 한다는 식의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 입장에서의 반론은 역사적 경험들에선 거의 배반되게 마련이고, 미르달 상을 받았던 장하준의 논문이 그 주제를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사회적 통제 라는 발상과 실천은 박정희 개인의 창작도 아니고 (당대의 흐름에 감화는 받았겠지만, 특히 박정희 본인이 2.26 사태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토로한 것처럼), 6,70년대 남한의 전유물도 아니다. 굳이 동아시아 Nics를 공통적인 사례로 들지 않더라도, 멀리는 리스트 당시의 독일에서부터 제정 독일-유신 이후의 일본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해방 전후의 한국에게 영향을 미쳐 왔고, 다른 한축으론 수정자본주의의 부분적인 계획과 사회주의권의 전면적인 계획의 영향도 있어 왔다. 관료제 옹호론 정도로 오해받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관료제 자체에 대한 옹호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관료제가 '사회화' 를 위한 그 당시의 유력한 도구였다면, 이젠 어떤 대안과 방식으로서 사회적 접근-사회적 해결이란 기본 정신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       

(다음 기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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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유전자
케이스 데블린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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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싸이트엔 각 분야의 다양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문자란 기본 단위를 조합하여 문장을 구성하고 그 문장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의 글을 이루는데, 이미 말한바대로 거의 무한한 주제가 그 글들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무한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거의 무한한 문장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음계가 무한한 곡조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양의 곡을 만들어 내듯이, 유한한 문자가 (중국어를 제외한 각 언어의 자모는 수십개를 넘어서지 않는다) 무한한 문장들을 만들어 낸다. 유한에서 무한이 도출될 수 있고 유한한 도구로서 무한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인간 지식의 핵심적인 성질이다. 기본적인 도구인 문자와 그 문자들이 서로 결합되는 '틀' 에 관한 최소한의 약속만 가지고 있다면, 해당 언어의 사용자는 무한한 주제와 내용을 '글의 세계' 에서 다룰 수 있다. 가령 박민규와 장하준과 최재천과 조갑제와 마광수와 김민수의 손 끝에서 나오는 글들은 대체로 서로와 별 관련 없는 지극히 개성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문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 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표현방식이 어떻게 차이가 나든, 어떤 어휘가 쓰여지든, 심지언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그 어떠한 파격이 동원되었든간에, 앞서 '틀' 이라고 불렀던 '최초이자 근원적인 약속' 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구왕국 시대의 피라밋에서 수백개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2 더하기 3은 5, 13 더하기 54는 67, 19 빼기 4는 15, 대충 이런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간단한 셈의 내용들이 주욱 적혀 있었다고 치자.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덧셈' 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의 틀' 이 부재했던 역사 시대 이전의 인간들에겐 그 각각의 덧셈, 뺄셈들이 모두 특수한 사례로 보였기에 (즉 그 사례들을 보편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추상화가 불가능한 단계였기에) 그러한 셈들이 목격될 때마다 반드시 그렇게 일일히 기록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덧셈이라는 기본적인 약속, 기본적인 생각의 틀을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은 그 어떤 수들의 덧셈을 보게 되더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귀하는 아마 최근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492 + 37 이라는 특정한 연산을 해보지 않았겠지만 (우연의 일치로 해본 적이 있다면 끝자리수를 적당히 바꿀 것),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등장한 수치가 쉬워서만이 아니다. 숫자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식과 표현의 형태는 무한할 수 있으나, 덧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어떤 문제도 다 풀 수 있다. (한국어) 어법이란 틀이 형성되어 있는 탓에, 주제와 어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들을 언어적 규칙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숫자와 기호도 넓은 의미에서의 문자에 해당된다. '나는 저녁 때 찐빵과 호빵을 각기 두개씩 먹어 지금 상당히 배가 부르다' 란 문장이나 '2 (a+b) = 2a + 2b' 란 수식은, 아까 박민규와 조갑제의 글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과 다를바 없는 성질의 관계이다.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를 다루고 있고, 그 표현을 위하여 문자라는 기본적인 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도구를 운용하는 것에 관한 최소한의 룰이 있다는 점에서, 언어와 수학은 인간적 지식의 쌍둥이 자식들이다. 데블린은 상기의 내용을 패턴화란 개념으로 부르고, 흔히 언어적 활동과 수학적 활동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지적 행위들은 그 패턴화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가령 변형생성문법에 등장하는 수형도와 같은 어법과 유클리드의 공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이라는 것. 논리성이란 기본 규칙 하에 문자와 기호라는 벽돌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쌓아진 레고의 성과 같다고 상상해보자.

수학의 힘이란 결국 언어의 힘이고 그 기본 규칙인 논리성의 힘이다. 실물 세계의 현상과 원리를 내면의 정신 세계에서 추상적인 패턴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간만의 능력이다. 유한한 인간의 유한한 언어가 논리적 규칙을 바탕으로 하여 얼마나 넓고 다양하게 확장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리뷰는 수학 유전자 (키쓰 데블린 저), 수학의 힘 (한석원/강필 저) 을 함께 읽고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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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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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상황에서 선택의 기회비용이 선택으로 인한 효용의 가능성보다 더 커보인다든지 아니면 선택의 실패 가능성과 향후 시나리오가 예전보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질 때, 이제 확실히 어른이 되었다고 봐도 좋다. 물론 어떤 어른들은 여전히 청년과 같은 과감성 (혹은 무모함) 을 발휘하지만, 그런 비율 역시 연령 & 사회 생활의 연차와 대체로 반비례 곡선을 그리기 마련이다. 안정성은 변화의 가능성과 병립 불가능의 관계에 있고, 각기 다른 시간대와 환경에서의 안정성과도 반드시 일치하진 않는다. 더해지면 덜해지고 덜해지면 더해지는 것이 안정과 변화 간의 성질이라면, 미래의 안정을 위하여 현재의 안정을 보류하는 것이나 지금의 안정이 반드시 미래의 안정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 등등이 후자의 현상일 것. 양자 간의 균형을 찾으려는 행위는 인생의 전시기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균형점은 안정 쪽으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보단 현상유지를 선호하게 되는, 소위 사람이 보수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현 시점에서의 조건들을 미래 상황에 대입하여 그 예상치를 면밀하게 비교해본 합리적 행위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의 이런 속성이 근대 한국 사회라는 특수한 조건을 만나면서 한국적인 현상들을 만들어 낸다. '넌 뭘 잘할 수 있니, 넌 뭐에 흥미가 있니' 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어떤 직업을 가져야 갈수록 경제도 어려운 이 시국에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겠니' 라는 질문이 일찍부터 던져지고, 이후의 인생에서도 창조성과 진취성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보단 순응적인 지식 흡수와 당장의 즉물적인 보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형으로 발전해 나간다.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럴 틈도 없이 자라나면서부터 이미 안정지향적으로 길러지는 것. 당대에 그 학벌과 점수로 수의학과(!)를 가겠다는 자녀, 혹은 친척이 있었다면 십중팔구 만류했을 한국인들이 매스컴의 호들갑과 장미빛 돈벌이 전망 덕분에 동일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하루아침에 바꾼 사례가 문득 떠오른다. 황우석과 그의 연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찬사를 보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보편적인 마인드 같아선 황우석과 같은 이가 오히려 나오기 힘들다는 의미.                   

남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 성취나 경력보단 그간의 심리적 요인과 배경이 더욱 궁금해진다. 인간의 속성과 한국 사회라는 조건까지 끄집어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명과 예측의 틀 안으로 들어오는바, 그렇지 않은 인간들의 저러한 일탈은 과연 어떻게 이해되고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이런 호기심 이전에, 저런 일탈자들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해당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로서도 좀 더 살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보수화되는 것이 당연한 '연세' 이전의 삶은 좀 불투명하고 불확실해야 하지 않을까. 비워야 채워넣을 수 있고, 그것이 성취로도 이어진다고 한비야가 보여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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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ool 2005-09-13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쉽게 써주세요. 좋은 글 쓰신 것 같은데 한번에 읽어서는 이해가 가질 않네요.

윤영 2005-09-14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내용은 알겠는데요.. 근데.. 이 책에 대한 평점이 왜 별 세개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어 궁금하네요.

중퇴전문 2005-09-1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65cool/ 어투가 좀 딱딱했나요. 담부터 유의하겠습니다.
윤영/ 별 셋은 제가 종이가 아까운 책을 제외한 모든 책에게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평점입니다. 사실 리뷰에 별점 같은걸 달아야 하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티치미 수학의 힘 - 원리 이해편
한석원 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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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라딘 싸이트엔 각 분야의 다양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문자란 기본 단위를 조합하여 문장을 구성하고 그 문장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의 글을 이루는데, 이미 말한바대로 거의 무한한 주제가 그 글들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무한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거의 무한한 문장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음계가 무한한 곡조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양의 곡을 만들어 내듯이, 유한한 문자가 (중국어를 제외한 각 언어의 자모는 수십개를 넘어서지 않는다) 무한한 문장들을 만들어 낸다.  유한에서 무한이 도출될 수 있고 유한한 도구로서 무한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인간 지식의 핵심적인 성질이다.  기본적인 도구인 문자와 그 문자들이 서로 결합되는 '틀' 에 관한 최소한의 약속만 가지고 있다면, 해당 언어의 사용자는 무한한 주제와 내용을 '글의 세계' 에서 다룰 수 있다.  가령 박민규와 장하준과 최재천과 조갑제와 마광수와 김민수의 손 끝에서 나오는 글들은 대체로 서로와 별 관련 없는 지극히 개성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문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 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표현방식이 어떻게 차이가 나든, 어떤 어휘가 쓰여지든, 심지언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그 어떠한 파격이 동원되었든간에, 앞서 '틀' 이라고 불렀던 '최초이자 근원적인 약속' 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구왕국 시대의 피라밋에서 수백개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2 더하기 3은 5, 13 더하기 54는 67, 19 빼기 4는 15, 대충 이런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간단한 셈의 내용들이 주욱 적혀 있었다고 치자.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덧셈' 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의 틀' 이 부재했던 역사 시대 이전의 인간들에겐 그 각각의 덧셈, 뺄셈들이 모두 특수한 사례로 보였기에 (즉 그 사례들을 보편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추상화가 불가능한 단계였기에) 그러한 셈들이 목격될 때마다 반드시 그렇게 일일히 기록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덧셈이라는 기본적인 약속, 기본적인 생각의 틀을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은 그 어떤 수들의 덧셈을 보게 되더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귀하는 아마 최근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492 + 37 이라는 특정한 연산을 해보지 않았겠지만 (우연의 일치로 해본 적이 있다면 끝자리수를 적당히 바꿀 것),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등장한 수치가 쉬워서만이 아니다.  숫자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식과 표현의 형태는 무한할 수 있으나, 덧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어떤 문제도 다 풀 수 있다. (한국어) 어법이란 틀이 형성되어 있는 탓에, 주제와 어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들을 언어적 규칙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숫자와 기호도 넓은 의미에서의 문자에 해당된다.  '나는 저녁 때 찐빵과 호빵을 각기 두개씩 먹어 지금 상당히 배가 부르다' 란 문장이나 '2 (a+b) = 2a + 2b' 란 수식은, 아까 박민규와 조갑제의 글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과 다를바 없는 성질의 관계이다.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를 다루고 있고, 그 표현을 위하여 문자라는 기본적인 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도구를 운용하는 것에 관한 최소한의 룰이 있다는 점에서, 언어와 수학은 인간적 지식의 쌍둥이 자식들이다.  데블린은 상기의 내용을 패턴화란 개념으로 부르고, 흔히 언어적 활동과 수학적 활동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지적 행위들은 그 패턴화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가령 변형생성문법에 등장하는 수형도와 같은 어법과  유클리드의 공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이라는 것.  논리성이란 기본 규칙 하에 문자와 기호라는 벽돌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쌓아진 레고의 성과 같다고 상상해보자.

수학의 힘이란 결국 언어의 힘이고 그 기본 규칙인 논리성의 힘이다.  실물 세계의 현상과 원리를 내면의 정신 세계에서 추상적인 패턴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간만의 능력이다.  유한한 인간의 유한한 언어가 논리적 규칙을 바탕으로 하여 얼마나 넓고 다양하게 확장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리뷰는 수학 유전자 (키쓰 데블린 저), 수학의 힘 (한석원/강필 저) 을 함께 읽고서 쓰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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