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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유전자
케이스 데블린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알라딘 싸이트엔 각 분야의 다양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다. 문자란 기본 단위를 조합하여 문장을 구성하고 그 문장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의 글을 이루는데, 이미 말한바대로 거의 무한한 주제가 그 글들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무한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거의 무한한 문장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유한한 음계가 무한한 곡조와 리듬으로 이루어진 무한한 양의 곡을 만들어 내듯이, 유한한 문자가 (중국어를 제외한 각 언어의 자모는 수십개를 넘어서지 않는다) 무한한 문장들을 만들어 낸다. 유한에서 무한이 도출될 수 있고 유한한 도구로서 무한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재구성하고자 하는 인간 지식의 핵심적인 성질이다. 기본적인 도구인 문자와 그 문자들이 서로 결합되는 '틀' 에 관한 최소한의 약속만 가지고 있다면, 해당 언어의 사용자는 무한한 주제와 내용을 '글의 세계' 에서 다룰 수 있다. 가령 박민규와 장하준과 최재천과 조갑제와 마광수와 김민수의 손 끝에서 나오는 글들은 대체로 서로와 별 관련 없는 지극히 개성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문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 이란 점에서 동일하다. 표현방식이 어떻게 차이가 나든, 어떤 어휘가 쓰여지든, 심지언 언어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그 어떠한 파격이 동원되었든간에, 앞서 '틀' 이라고 불렀던 '최초이자 근원적인 약속' 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구왕국 시대의 피라밋에서 수백개의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2 더하기 3은 5, 13 더하기 54는 67, 19 빼기 4는 15, 대충 이런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간단한 셈의 내용들이 주욱 적혀 있었다고 치자. 오늘날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덧셈' 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의 틀' 이 부재했던 역사 시대 이전의 인간들에겐 그 각각의 덧셈, 뺄셈들이 모두 특수한 사례로 보였기에 (즉 그 사례들을 보편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추상화가 불가능한 단계였기에) 그러한 셈들이 목격될 때마다 반드시 그렇게 일일히 기록해 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덧셈이라는 기본적인 약속, 기본적인 생각의 틀을 이해하고 있는 현대인은 그 어떤 수들의 덧셈을 보게 되더라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다. 귀하는 아마 최근 수년간, 혹은 수십년간 492 + 37 이라는 특정한 연산을 해보지 않았겠지만 (우연의 일치로 해본 적이 있다면 끝자리수를 적당히 바꿀 것), 어렵지 않게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등장한 수치가 쉬워서만이 아니다. 숫자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식과 표현의 형태는 무한할 수 있으나, 덧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만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 어떤 문제도 다 풀 수 있다. (한국어) 어법이란 틀이 형성되어 있는 탓에, 주제와 어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들을 언어적 규칙 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숫자와 기호도 넓은 의미에서의 문자에 해당된다. '나는 저녁 때 찐빵과 호빵을 각기 두개씩 먹어 지금 상당히 배가 부르다' 란 문장이나 '2 (a+b) = 2a + 2b' 란 수식은, 아까 박민규와 조갑제의 글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과 다를바 없는 성질의 관계이다. 자연세계와 인간사회를 다루고 있고, 그 표현을 위하여 문자라는 기본적인 도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그 도구를 운용하는 것에 관한 최소한의 룰이 있다는 점에서, 언어와 수학은 인간적 지식의 쌍둥이 자식들이다. 데블린은 상기의 내용을 패턴화란 개념으로 부르고, 흔히 언어적 활동과 수학적 활동으로 구분되는 인간의 지적 행위들은 그 패턴화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가령 변형생성문법에 등장하는 수형도와 같은 어법과 유클리드의 공리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이라는 것. 논리성이란 기본 규칙 하에 문자와 기호라는 벽돌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로 쌓아진 레고의 성과 같다고 상상해보자.
수학의 힘이란 결국 언어의 힘이고 그 기본 규칙인 논리성의 힘이다. 실물 세계의 현상과 원리를 내면의 정신 세계에서 추상적인 패턴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인간만의 능력이다. 유한한 인간의 유한한 언어가 논리적 규칙을 바탕으로 하여 얼마나 넓고 다양하게 확장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리뷰는 수학 유전자 (키쓰 데블린 저), 수학의 힘 (한석원/강필 저) 을 함께 읽고서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