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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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1980년대는 우리의 1950년대 이후 60년대와 70년대를 닮았다.

많은 자녀들, 하나하나 사랑하고 관심을 줄 수 없는 고단한 부모들,

감당하기 어려운 입들, 그러니 누군가는 떠나야 한다.

그래서 멀리, 낯선 곳에서 돈벌이를 하게 된 아이들.

그에 비하면 주인공은 그나마 나은 처지다.

그냥 친척 집에 맡겨졌을 뿐이니까.

이 책 속 주인공은 위로 언니들, 아래로는 남동생들에 치인 가운데 딸.

엄마는 할 일이 너무 많고, 돌봐야 할 동생이 있는 만삭의 상태로

아이를 남의 집에 맡기며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어도 된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이의 손 한 번 잡아준 일 없고,

인사도 없이 옷가지조차 남겨두지 않을 만큼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

분명 농부임이 분명한데 '소'를 걸고 카드를 하는 사람으로(당연히 소를 잃었고)

심지어 엄마의 출산 이후 돌아온 아이에게 '돌아온 탕아'라며

아이가 남의 집에 맡겨졌다 돌아온 것에 아이 탓을 하는,

돌봐준 이에게 '제대로 돌보질 못했다며, 본인도 알지 않냐'며 비아냥 거리는 그런 사람.

앉을 곳조차 찾기 어려운 궁핍한 살림에도 허세를 부리고

떨어진 루바브 한 줄기조차 자기 손으로 줍지 않는, 그런 이.

여름 동안 더 마르고 더 말이 없어진 언니들과 달리

아이는 다행히 찬란한 여름을 보내며 관심과 돌봄을 받았다.

자기 아들을 잃은 부부는 주인공 아이를 통해 기쁨을 얻었고.

하지만 여름은 끝나고 아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잠깐의 애정, 돌봄으로 진심을 나눈 이들을 쫓아,

자신의 부모가 아니라 여름 한 철 자신을 돌봐준 어른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 책은 표지와 제목을 보고

옛 시대를 생각하며 고통스러우리라 지레짐작하고는 읽지 않으려 했었다.

다행히 이웃님들의 리뷰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고 읽게 되었는데

여전히 그 시대의 맡겨진 소녀들이 생각난다.

식모로, 공장 노동자로 들어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던 소녀들.

그들을 그렇게 몰고 간 가난과 부모들.

그들은 나이 들어 여전히 살아간다.

지금은 애정과 관심이 있는 삶을 살고 있을까.

진심의 밀도는 얼마나 될까.

부모와 형제라는 혈연으로 엮인 가정에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할 때,

그들이 가지는 서로에 대한 진심의 밀도는 얼마나 될까,

한 계절을 함께 했어도 서로 위안이 되었다면 그 마음은 얼마나 조밀할까,

아이는. 킨셀라 부부와 함께 하게 됐을까,

헤어져 언니들처럼 말라갔을까. 아니면 여름의 기억으로 건강히 자라났을까.

질문만 무성하다.

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 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 P9

대화는 다시 소의 ㄱㅏ격, 유럽경제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ㄱㅏ격으로 흘러간다. 나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 P12

아주머니가 내 옷을 보자 나도 아주머니의 눈을 통해 내 얇은 면 원피스와 먼지투성이 샌들을 본다. - P14

"비밀이 있는.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 돼."27 - P27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맛이다. 나는.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P30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 P70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 P73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 P96

나는.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든 채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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