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대개 노벨상 수상자의 작품은 나와 맞지 않는데

이유는 빨리 읽어내기엔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단어와 문장과 행간을 이리저리 돌리고 돌려야 해서

눈과 머리를 매우 혹사시키는 것이,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런 이유로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은 의무감으로 읽게 되는데

이 책 역시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얇은 분량에 감사하며 손에 들었다.

(그럼에도 왜 읽냐고 물으신다면 재밌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게

결국은 한시대를 풍미한 작가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대놓고 첫 문장부터 도발하듯 쓴 글은 오랜만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첫 문장에 이런 사실을 적은 책은 못 본 것 같다.

대부분은 처음엔 그래도 점잖은 척을 하지.)


작가 아니 에르노에 대해 스웨덴 왕립과학원이

"개인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예리하게 탐구한 작가로 젠더·언어·계급 측면에서 첨예한 불균형으로 점철된 삶을 여러 각도에서 지속적으로 고찰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개척해왔다(시사IN 인용)"고 하며 수상의 이유를 밝혔다고.


이 책 역시

자신이 경험한 열정을 감정적 판단을 배제하고 관찰하듯 글을 썼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 열정으로 일반화했다는 점에서

노벨상 수상 이유와 결을 같이한다고 본다.


제약이 기다림과 욕망의 원인이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멀어지는 열정은 특별하지만 외롭고도 고통스럽다.

그 고통의 과정에서 자신을 이렇게 샅샅이 들여다본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열정인가 관찰을 위한 수단인가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감정의 깊은 흔적과 시간과 경험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 안에 침잠하는

단순한 열정인 건가 하고.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 P10

우리가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지 헤아려보았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 P17

우리 관계에서 그런 시간적인 개념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그저 존재 혹은 부재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언제나’와‘어느 날’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기호들을 한데 모으면 나의 열정을 좀 더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 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 P26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 P32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서서히 스러지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텍스트였던 그것들은 결국은 찌꺼기와 작은 흔적들이 되어 버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겠지. - P59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 P66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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