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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1. 옷의 성, 정신의 그림자

 

1990년대 이전에는 성(sexuality)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미인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속 보이게 드러내놓고 칭찬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끝까지 무관심한 척할 수도 없었다. 북실북실한 털이나 두꺼운 입술을 지닌 능글맞은 호색한으로 취급받을 위험함과 힘없는 노인네나 답답한 어린애로 취급받을 억울함 사이에 어떤 화해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야박함이 성을 더욱 안으로 멍들게 하고 곪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은 미인 아닌 여자가 없다. 마치 허물 벗은 별당아씨처럼 모든 여자들은 비슷하게 예쁘다. 그런 미인과 연관된 성 자체도 박씨부인처럼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놓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주로 활동하기 시작한 소위 신세대작가들도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도덕은 결국 스페어 타이어 같은 것이다. 기존의 것이 닳아버리거나 구멍이 나면 언제나 갈아끼울 준비가 되어 있다”거나 “나는 처음부터 처녀가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사랑 앞에서 언제나 처녀일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순결이었다”(김별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연인이 없냐는 질문에 “섹스파트너라면, 사실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연인은 없어요. 별로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안 들어요”(배수아, 「천구백팔십팔 년의 어두운 방」)라고 무감각하게 대답한다. 심지어는 “애를 뗄 때는 반드시 더치 페이할 것”(백민석, 「사랑의 고통」)을 요구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성을 가지고 예술사를 쓴다면 “고전주의:SEX(정상체위), 낭만주의:구강 혹은 항문, 리얼리즘:포도균성 요도염, 모더니즘:레즈비언 혹은 게이, 포스트모더니즘:AIDS”(박청호, 『푸르고 흰 사각형의 둥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별당아씨는 과연 허물을 완전히 벗었는가. 혹시 사람들은 성의 옷만 보고, 그 속의 피부는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피부를 보았더라도 성은 그 피부를 파열시켜야 하는 것인데, 신세대들의 피부 자체가 그러기에는 너무 두꺼운 것은 아닐까. 활짝 피어나는 목련꽃처럼 성 담론 자체는 맨 얼굴을 드러내면서 노골화되고 과격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그 흰꽃이 땅으로 떨어지면 검게 짓이겨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훼손되지는 않을까. 지나치게 옷을 벗으면 그 벗음 자체가 오히려 억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사실들에 대한 의문과 실체 없이 떠도는 신세대문학에 대해 구체적이고 풍부한 텍스트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신세대문학과 성의 결합을 시도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 생긴 모자라는 자식이 바로 이 글이다. 신세대문학과 성에 대한 담론은 이합 하산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서투른 신조어에서 무책임한 상투어”라는 용어와 동궤의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문제삼는 신세대문학과 성에 대한 서투르고도 무책임한 본질 규명은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 등의 사실이다. 이 글은 이런 고정관념들을 뒤집어봄으로써 여전히 신세대문학의 육체가 정신의 반대급부가 아닌 그 부속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정신은 복화술사처럼 자신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육체를 조정하고 있다. 때문에 신세대들의 육체는 날이 바뀌면 양지로 바뀌는 정신의 ‘그늘’이 아니라 밤이 되어야만 나타나고 영원히 빛은 될 수 없는 정신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육체를 통해서도 강화된다. 신세대들은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육체를 노출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와 성은 밀월관계가 아니라 냉전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옷을 벗었지만 그래도 몸이 드러나지 않는 성 담론의 딜레마나 신세대문학이 그려내는 성의 성감대를 알아볼 수 있다.


2. 반성(反性)의 성, 사회의 그림자


우승제와 박성원, 백민석의 소설은 사회적 억압과 성적 억압을 병치시켜 그런 억압을 조장하거나 양산하는 권력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성 자체를 가장 본능적인 욕구로 생각하면서 그런 성적 욕망을 좌절시키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리비도와 정치가 상호 침투한다는 이런 사유의 기저에는 성이 어느 시대에도 그 자체로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본래의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성에 반대되는 현재의 부정적이고 억업적인 반성(反性)을 반성(反省)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사회의 과잉 억압과 실행 원칙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이 자유로운 에로스의 구가이고, 그것을 통해 특정한 역사적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영원한 인간성의 획득이 된다.


우승제의 『열려라, 방』은 “나는 다 필요없어. 단지 그녀와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아주 비밀스럽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 좌절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의 ‘나’와 ‘그녀’는 마레크 플레스코의 소설 『제8요일』에 나오는 아그네시카와 피에트레크가 벽이 있는 세 평의 방을 찾아 공산주의 지배하에 있었던 바르샤바를 헤매고 다니듯이 둘이 함께할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제8요일에나 가능하다.


『열려라, 방』에서의 ‘나’와 ‘그녀’는 “이쪽 도시”와 “저쪽 도시”로 양분되는 사회 어느 곳에서도 그들만의 방을 마련하지 못한다. “이쪽 도시”에서는 “창호지 같은 판자벽” 때문에 섹스 행위조차 공동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느닷없이 침입하는 혁명가 집단 때문에 항상 조루나 발기불능의 증세를 보이고, ‘그녀’ 또한 불안해서 언제나 오르가슴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무조차 부르주아적인 발상이 된다. 그런데 “이쪽 도시”를 위해 혁명을 정당화시키는 글을 쓰던 ‘나’는 혁명을 무화시키는 글을 쓰면서 “저쪽 도시”로 편입된다. “저쪽 도시”에서 원하는 글은 “체면의 상실, 최대의 소비(정액까지도), 무조건 상품화”라는 3대 원칙에 충실한 글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육체적 조루나 발기불능이 아닌 정신적 조루나 발기불능 증세를 보이게 된다.


이처럼 우승제의 『열려라, 방』은 온전한 오르가슴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을 고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나’는 “성기와 내 주변관계와는 어떤 질긴 끈이 있길래 내 주변적 상황에 의해 발기를 했다가, 조루가 됐다가, 이렇듯 발기불능이 되어버리는 것일까”라며 한탄하고 있다. ‘열리지 않는 방’은 이런 ‘닫혀 있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은유이고, 이런 은유로 인해 이 소설은 성애소설이자 풍자소설이 된다. 권력의 억압에 대항하는 반권력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박성원의 「라이히 보고서」 「해뜨는 집」 「이상(異常)·이상(李箱)·이상(理想)」 등은 자본이나 제도와 연관된 권력에 의해 왜곡된 성을 통해 성 자체의 순수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 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김해경 혹은 이상(李箱)으로서, 그들을 통해 작가는 “사회·정치·경제적 혁명이 없이는 성의 만족은 없다”라는 빌헬름 라이히의 명제를 확인시킨다. 박성원이 라이히에 기대어 말하고 싶은 것은 금전 경제학이 정액 경제학과 만나는, 즉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결합되는 프로이드적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들 소설은 모두 성적인 쾌락에 대한 두려움이 심리적인 병을 일으키므로 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반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면서 보다 건강한 성 생활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상의 1990년대적 화신에 해당하는 ‘나=그=김선생’을 통해 박성원은 그가 “섹스에 미친 병자”가 아니라 “이상한 이상에 대한 이상”을 지닌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섹스에 대한 탐욕이 존재 자체의 본질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연심=본래의 성’을 탐하지 못하게 하는 “악마적인 안타까운 현실성” 때문에 ‘나’와 ‘그녀’는 자포자기적이고 허무한 섹스를 나눈다. 이때 ‘나’는 그런 모습에서 “섹스에 미친 패인(敗人)을 자처하는, 무지개같이 파장이 분열된 폐인(廢人) 같은” 1990년대판 이상의 원형을 발견한다.


이처럼 박성원의 소설에 나타나는 성은 가장 인간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본능성으로 인해 굴절되고 왜곡되어 있는 기형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박성원은 타율성과 자율성, 왜곡과 순수, 억압과 해방, 권력과 저항 사이에 놓인 성 담론의 가파른 경계선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그는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성을 통해 악마적인 현실을 극복할 힘을 기르려 한다. 이렇게 볼 때 성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박성원은 유물론자이고, 그런 물질적인 성을 통해 영혼의 치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다시 유심론자가 된다.


백민석은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동성애를 발기부전이나 변태의 이형태(異形態)로 간주하면서 비정상적이고 일그러진 성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백민석이 다른 이성애주의자들과 다른 것은 그런 동성애를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동성애는 이성애로 가기 위한 성, 음울한 시간들을 견디기 위한 성, 시대적 억압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기 위한 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형적 성에 환멸적인 시대와 세계를 담음으로써 시대나 세계가 비정상적이기에 성 또한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동성애의 배경으로 입시 지옥이나 전교조, 지강헌 사건, 김귀정이나 이한열의 죽음 같은 역사적 사건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교조 1세대로서 “호모가 아니면 발기부전, 아니면 변태”일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본격적으로 1990년대로 진입하여 도달한 곳이 바로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에서 개최하는 세기말 콘서트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믿거나말거나박물지젤라틴풀장”은 수간(獸姦)이나 항문섹스, 오랄섹스, 동성애가 판치는 난교파티장이다. 왜 이런 충격적인 성을 묘사하는가?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런 권태는 어디서 오는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세상이 평화로운가? 오히려 환멸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성은 세상에 대한 분노나 저항을 내장한 위험스런 폭발물에 다름아니다.


백민석이 보기에 세상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것들로 꽉 찬 불가사의한 괴물이다. 그런 세상에서의 삶은 당연히 소풍이 아니라 유배이다. 그런데도 그런 폭력성을 숨기면서 교묘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세상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부도덕한 포르노로 오해받을 위험조차도 감수한다. 어차피 오해되건 이해되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그는 절망적인 유희를 계속한다. 심각함이 지나치면 유희가 된다. 그래서 이런 일탈적인 성 자체가 백민석에게는 이 세상을 견디는 “은밀한 장난감”이다.


백민석은 말한다. 자신이 묘사한 성은 일그러져 있다고. 그래서 그걸 보고 야하다거나 외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정말 변태라고. 자신이 진정 원한 것은 그런 성이 야기시키는 불편함이라고. 그 불편함이 반성을 촉구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학과 피학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헐벗고 왜곡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 성마저 만들어낼 수 있는 현실적 상상력이다. 성난 성은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이때 느끼는 공포가 바로 백민석이 원하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승제와 박성원, 백민석은 현실의 성에 저항하는 성을 통해 성다운 성을 환기시키면서, 성을 성답게 만들지 못하는 권력을 비판하는 작가들에 속한다. 그들의 소설에서는 사회적 억압을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성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육체적인 성을 다루고 있지만 그 성을 통해 정신을 문제삼는다고 할 수 있다. 정신 자체가 육체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소설의 인물들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발기불능도 되고 오르가슴에도 도달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소설에 나타난 정신과 육체는 이원론적 일원론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함수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육체가 좌우된다고 봄으로써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정신주의자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근성(近性)의 성, 가족의 그림자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나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보면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출생을 기형적이고 슬프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모의 상반신은 흰 시트로 가려져 있어 그 표정을 알 수 없으며, 아이는 머리가 축 늘어진 채 힘겹게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산모 머리 위의 마리아상은 단검에 맞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을 낳아줄 어머니는 죽었다. 그래서 혼자 태어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없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혼자 태어났기에 그들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미련이 크기에 그들은 남아 있는 가족끼리도 섹스를 한다. 이런 성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대로 된 성은 아니지만 온전한 성이 되려고 하거나 성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근성(近性)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성은 가족 같은 연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가족이 남처럼 간주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가족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이때의 근친상간적인 섹스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부재할 때에나 가능한 슬프고도 위험한 것이다.


특히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에게는 가족다운 가족이 없다. 그들에게 더이상 가족은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을 새롭게 만들거나 차라리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섹스한다. 가족을 너무 사랑하거나 지독하게 증오해서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가족과의 섹스는 이런 사랑과 증오를 배설하는 행위이다. 배수아는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했기에 더욱 가족을 추구하고, 이응준은 자신을 거부한 가족을 스스로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한다. 조경란은 운명처럼 주어진 가족을 인내하려 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속살이 가족이고, 가족의 피부가 사회가 된다.


배수아의 『랩소디 인 블루』에서 미호가 자신의 친오빠와 섹스를 하는 것은 그녀가 가족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오빠는 오빠가 아니라 그저 “관심을 가져주는 다정한 사람”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오빠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이자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남자이다. 이런 오빠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기 그녀는 오빠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녀가 이렇게 가족에 집착하는 이유는 “난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서는 결국은 모두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라도 자신의 몸 속에 가두고 싶어한다.


이런 가족에 대한 성적인 이끌림이 『부주의한 사랑』에서는 더욱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나’의 친언니이자 사촌인 연연이 이모부를 연인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친동생인 ‘나’나 이모부의 가족으로부터 떠나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이모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아버지가 없었던 그녀는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사랑하게 된다. ‘나’ 또한 사촌지간인 택이와 운이 모두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가 유부남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택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가족애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러고 있으니 마치 정말로 그가 나의 사촌처럼 느껴졌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언제나 생각나는 나의 사촌”이라는 고백은 연인이 아닌 가족에 대한 갈구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녀는 보호와 안정감을 줄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지 성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밖에 ‘나’의 사촌인 미진이 ‘나’의 애인이었던 철희와 사귀는 것(「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나 아버지가 이모와 사랑을 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는 것(「프린세스 안나」)은 모두 뿌리가 흔들리는 존재들의 불안한 내면을 보여준다. 현실은 가족처럼 난공불락이기에 바꾸거나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니 성 또한 그런 현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의 삶은 다르지 않다는 운명의 회귀성이나 불행의 지속성 때문에 그녀는 가족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가족에서 가족으로 유전되는 병이 바로 외로움이나 결핍감이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잘 알아본다.


그들이 이처럼 부도덕하고 부주의한 근친상간적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세상 모든 인간들이 사생아나 고아이기에 인위적으로라도 가족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버려진’ 존재들이고, 배수아에게는 이런 유기(遺棄)가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쁜 존재들이 강렬하고 치열하게 나쁜 섹스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근친상간적인 섹스는 가벼움과 무감각성의 기호가 아니라 외로움과 두려움의 기호이다. 고아처럼 자신들을 방기한 부모나 형제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발짓이 아니라 그들을 재발견해서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손짓이다. 그런 성은 다른 사람은 없고 가족밖에 없기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라는 점에서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부주의한 성은 그것 이외의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오는 상처와 폭력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배수아가 머무르고 싶어하는 아이(homme-lette)의 상태는 오믈렛(hommelette)과 비슷한 존재이다. 형태가 없는 계란 덩어리처럼 어린아이는 비정형상태로서 아무런 경계나 의식, 욕망을 모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결핍 또한 모르는 상태이다. 배수아는 이런 상태를 지향한다. 오믈렛은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며, 우유도 아니고 계란도 아니다. 그녀는 이런 오믈렛처럼 거울을 보기 전,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자각조차 생기기 이전의 유아처럼 유모차에 앉아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은 것이다. 자아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가족의 보살핌을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거울조차도 필요 없다. 이런 그녀의 섹스는 아이로 남아 있기 위한 구순기적 욕망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미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 깨어진 계란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머니의 양수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상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이 현실은 어머니의 품속으로의 회귀를 용납하지 않는다. 배수아와 달리 이응준은 이런 자궁회귀의 불가능성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아버지 같은 현실을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응준의 소설에 나타난 성장의 의미이다. 이런 성장을 해야 “묘지 같은 세계에서의 유령 같은 삶”(『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배고픔처럼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나’가 고아 출신의 식모인 무리누나에게 첫사랑을 느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여자임과 동시에 어머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나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에서 꼽추인 친구가 자신의 굽은 등의 마디마디를 어루만져주는 여자들을 보면서 “창녀들에게선 어머니 냄새가 나”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어머니 같은 연인을 위한 말들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엄마 말 잘 듣는 애처럼”(「그 시절을 위한 잠언」) 어린 창녀의 요구에 따라주기도 한다.


세상을 알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모르면 성장할 수 없다. 이응준의 소설에서는 불행을 알게 하는 성장의 촉매로서 가족과 성이 등장한다. 가족은 세상의 속악함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그런 가족의 속악함은 일그러진 성관계에 기원을 둔다. 때문에 이응준의 소설 속에 나타난 근친상간적인 사랑은 배수아의 소설에서처럼 소외를 극복하면서 합일을 추구하려는 성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서 추악함을 발견하게 되는 모멸과 치욕의 성이다. 이응준은 부모를 통해 그런 성을 경험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극복하는”(「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것임을 알게 된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한 식구가 된” 가족의 슬픈 사진이 찢겨 있다. ‘나’는 열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미 그 왕국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적자(嫡子)인 인하형은 탐욕스럽고 권력지향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우아하고 고상한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 이런 구도이기에 이 소설 속의 가족관계는 다음처럼 재편(再編)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억압적인 부성 원리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버지와 생모이다. 젊고 아름답지만 천박한 생모는 아버지를 닮은 또다른 아버지이다. 그리고 합일적인 모성원리를 대변하는 인물이 인하형과 인하형의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아름다운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유미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인하형은 불쌍하게 죽어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와 ‘나’의 생모에 대한 복수를 단행한다. 형의 침대에 같이 있는 생모를 보면서 나는 보고 싶지 않은 생과 성의 이면을 보게 된다. 인하형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지 못하게 한 것은 부도덕한 아버지 때문이고, 그가 스스로 악과 추함이 되어 복수를 하게 만든 것도 패륜적인 세상 때문이다. 이런 더러운 성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진흙탕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에 대해서는 가해자이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패배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이보다 덜 충격적이지만 성장의 계기로서 부모의 성이 등장하는 또다른 경우가 「아이는 어떻게 숲을 빠져나왔는가」이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는 오래 앓았던 아버지가 죽자 삼촌과 결혼한다. ‘나’는 아픈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랐었기에,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마저 중동에서 낙사(落死)했기에 더욱 죄책감을 느낀다. 더욱이 삼촌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아름답고 추함에 의해 세상의 희망과 혼돈을 가늠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나’의 미의식의 진원지였다. 이런 속물 아닌 사람의 죽음을 통해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결코 오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 삶이란 “비슷한 몸무게를 지닌 고통과 환멸이란 두 사내가 타고 노는 녹슨 시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들의 성과 죽음이 그를 성장시킨 것이다.


조경란에게는 가족을 견디면 세상을 견딘 것이 된다. 가족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동성은 가족 밖으로의 움직임에 대한 생래적인 두려움을 내장하고 있는 식물적 정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소설들보다 그녀의 소설에는 운명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운명성은 스스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더욱 강화된다. 조경란은 굳은살이나 사마귀, 겨드랑이털처럼 가족을 달고 다닌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조경란의 소설에 나오는 가족의 실체이다. 또 조경란에게 있어 가족은 식빵이기도 하다. 모든 빵의 기초이기에 잘 만들면 다른 빵들도 손쉽게 만들 수 있으나 잘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식빵 같은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힘들게 하는 또다른 ‘나’이다.


그래서 조경란은 『식빵 굽는 시간』에서 처음과 마지막에 식빵을 굽는다. 이것으로 보아 그녀가 가족에서 시작해 가족에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다. “너를 낳은 건 나다.” 이것은 이모에게서 그녀가 들은 말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달라요. 그러니까 남매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해요.” 이것은 ‘나’의 애인의 여동생에게서 들은 말이다. 이 두 말을 통해 서른 살이 된 그녀 앞에는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들”만이 남게 된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소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론적 사고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식빵처럼 더욱 굳어진다.


특히 원해서 만나지 않았고, 원해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족은 운명 그 자체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거대한 산처럼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고(「내 사랑 클레멘타인」), 어머니와 남동생은 아무런 예고 없이 열차사고로 내 곁을 떠나간다.(「당신의 옆구리」)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술 취한 아버지는 가위로 어머니의 목을 겨눈다. 그런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자식이라서 ‘나’와 동생 경서 또한 살의를 품은 적의를 지닌 채 한방에서 지낸다.(「환절기」) 이처럼 가족은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페스트 같은 질병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노력해서 피해볼 수도 있는 ‘불행’일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이유가 너무 당연하기에 노력해서 피해볼 수도 없는 불행을 말한다. 아버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런 올가미 같은 가족이 짜는 가장 튼튼하고 커다란 그물은 ‘성’이라는 실을 가지고 짜여진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에서 ‘나’는 아버지와 교접하는 꿈을 꾼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아랫도리를 내놓고 집 안에서 서성거리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목이 긴 사내 이야기」에서 마치 의처증 남편처럼 딸을 감시하고 의심하는 경우이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는 딸이 자신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연유한다. 그래서 중 3짜리 남자 제자와 정사를 나누며 아버지에 대한 배반과 집에서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나’는 결국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푸르게 질린 입술을 벌려 나의 이 단단한 젖가슴을 물려주고 싶은 심정”을 갖는다. 아버지의 구순기적인 욕구를 채워주고 싶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 자체가 불륜”(「꿈」)으로 유지되지 않는가.


이처럼 가족을 통해 세상은 ‘나’를 조롱하고 시험한다. “삶은 내게 어떻게든 견뎌보라, 자꾸만 약을 올린다.”(「환절기」) 그런 가족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 길은 무당벌레가 되어 자신이 깨고 나온 알껍질인 가족을 뜯어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방에 그대로 있고, 과거에 사는 다른 아버지는 목이 점점 길어지면서도 여전히 밖을 내다보고 있다. 유일하게 ‘나’에게 남아 있는 길은 그저 그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으면 되는 것이다. 가족을 가족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은 너무도 지독하여 그 냉대나 거리도 극복한다. 그러니, 가족이지 않겠는가. 다시, 운명이다.



4. 무성(無性)의 성, 자아의 그림자



김영하나 박청호의 소설에서의 섹스는 성적인 즐거움이나 의미 있는 쾌락보다는 일상적인 무의미와 절망적인 환멸을 확인시키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에 나타난 섹스는 노골적이어도 야하지 않고, 빈번히 행해져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섹스는 단지 ‘섹슈얼 비즈니스’에 불과하게 된다. 대부분 불감증을 앓고 있는 이런 육체를 가지고는 오르가슴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이다. 그들의 삶에 엑스터시가 없듯이 그들의 성에도 오르가슴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섹스는 대부분 지리멸렬하고 불만족스럽게 끝난다. 이런 성은 성이어도 성이 아닌 무성(無性)의 성에 불과하게 된다. 그들의 소설이 어떤 교성(嬌聲)도 들리지 않는 무성(無聲)의 소설인 것도 이 때문이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레퀴엠을 들으면서 행해지는 섹스에 몰두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성은 죽음과 육교(肉交)하면서 존재의 불안한 형이상학을 그려나간다. 성과 죽음이 만나 절망이나 허무라는 새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 자체가 유일하게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해주지만 그 살아 있음조차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절망적인 포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의 고객인 ‘클림트’는 섹스를 하면서도 추파춥스를 빨며 게임처럼 성교를 한다. 총알택시 운전사인 K는 여성의 성적 매력보다는 달리는 차의 속도감이나 노름인 ‘섰다’를 치는 긴장감에 보다 쉽게 발기를 한다. ‘나’ 또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사람과 섹스하는 일은 편안하다. 잡념없이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낀다. 그런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섹스에는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근원적인 분리감이 존재한다. 비닐로 각자의 몸을 감싼 후에 섹스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과의 섹스는 훨씬 비극적인 것이 된다. 이 소설의 ‘나’처럼 자아도취형의 인간들은 “섹스에 몰입하지 않고 사정하는 순간까지도 이,미,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상대 여성과 성교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과 섹스하는 것이다. 이때의 나르시스는 “세상 어디에든 자신의 복제품을 생산”하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다.


이런 이유로 김영하는 자위를 보다 선호하게 된다. 최소한 실제의 인간을 복제품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도덕적인 섹스가 바로 자위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에 나오는 담배여인의 이야기가 이런 자위의 원형을 보여준다. 어느 날 정액으로 칠갑을 한 채 죽어 있는 남자의 사인은 자신의 담배연기로 만든 가상의 연인과 나눈 격렬한 섹스로 인한 심장마비이다. 자신의 연기로 만든 여인으로부터 남자는 애무를 받고 섹스를 나눌 수 있지만, 자신이 그 여자를 만질 수는 없다. 이런 섹스는 상호교환적이거나 소통적인 섹스가 아닌 일방적이고 고립적인 섹스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통한다. 결국 자위는 “삐삐를 통해 호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나 자신일 뿐”(「호출」)인 인간들이 고독을 배설하는 행위인 것이다.


보다 과격하게 이런 자위행위를 발전시키는 육체의 도구가 바로 ‘손’이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손은 눈의 관념성과 의식성, 위선을 극복하게 해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더듬이로 작용한다. 하지만 성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성기의 삽입으로 인한 완전한 일체가 아니라 자신이나 타인의 몸을 더듬어줌으로써 발생하는 환상적인 결합만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자위의 도구에 머물게 된다.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도마뱀」에서 여성화자인 ‘나’의 꿈속에 등장하는 도마뱀은 남성(아버지)의 성기를 대신하는 자신의 손일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 속의 ‘나’는 꿈결에 손을 몸 속에 집어넣으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금기의 위반과 자위행위라는 육체적인 금기의 위반이 도덕의 검열을 통과하면서 ‘나’의 의식은 분열된다. 「손」에서는 타인의 몸을 만지는 손이 등장한다. ‘나’가 레즈비언으로서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몸을 손으로 더듬을 때이다. 그러나 그런 손의 감촉은 전유(專有)될 수 없거나 상상적인 것이기에 서로간의 거리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런 ‘나’의 불구적 성은 남자동생의 자위하는 손과 겹쳐지면서 좌절된 쾌락이나 불안, 쓸쓸함을 강화시킨다.


이렇게 볼 때 김영하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위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임의 성이다. 삽입이 아닌 발기를 문제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위는 소비만 있고 생산은 없는 성이다. 이때 타인과의 상호소통적인 성교는 불가능하고 대화가 아닌 독백의 사랑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기자신이라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처절한 생존전략이 된다.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자신의 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럴 때의 자위는 성교의 실패와 자아의 존재 증명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자가발전인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체위가 바로 자위인 것이다. 자기자신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몸과 성교한다. 김영하는 그런 웅크림과 단절이 확대와 소통을 위한 기다림의 자세가 되기를 바란다. 그때야 비로소 남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연주하면서 자신의 손을 조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청호는 이런 김영하보다 상대적으로 낭만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편의 연애소설』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들이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과 사랑에 대한 희구 사이에서 끝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에서 이 사실은 확인된다. 그는 사랑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사랑에 희망을 걸게 됨으로써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끝까지 꿈이나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박청호 소설의 특징이다. 그만큼 박청호는 사랑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


물론 박청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또한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기본적으로는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만족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보호본능이 더 강하다. 이런 인물들이기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의 언어만을 발설할 수 있을 뿐이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그녀 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 분명한데 그녀의 구멍은 어느새 다물어져서는 쓱쓱 입맛까지 다시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장씨행장」) 혹은 “남자는 여자에게 섹스도 육체의 사용일 뿐이니까 어떤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충고한다. 본능적인 행위에 어떤 당위성을 부여하면서까지 정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Talk to talk about」)


때문에 박청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마녀 아니면 창녀이다. 그런데 마녀는 착한 악마와 결탁하고, 창녀는 나쁜 천사와 결탁한다. 그래서 그 둘의 차이는 전혀 없다. ‘나’가 지닌 이런 위험한 사고가 종교적인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삶 속에 내재하는 엄청난 삶의 에너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들은 “삶을 내팽개칠 수 있을 만큼 강”(「러닝타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사악한 뱀이 되어 여러 남성들과 한꺼번에 성교를 맺거나 아버지와도 섹스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폴란드産 마녀의 외출」) 그리고 “끔찍한 불륜이라도 경험하게 된다면 조금은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Telephone」)는 위험한 생각을 한다. 그런 성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를 저주 속에 방치함으로써 기존의 도덕이나 신성(神性)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런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박청호는 섹스와 사랑의 힘을 믿는다. 여전히 “가장 인간적인 육체의 사용”(「폴란드産 마녀의 외출」)이 섹스이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온몸을 비벼대면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 그리고 함께 잠드는 것”(「단 한 편의 연애소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슬픔에 젖어 있을 수 있을 만큼 지독하진 못하”(「폴란드産 마녀의 외출」)기에 성다운 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영하나 박청호의 소설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가면의 정사’를 주로 연출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 없이도 섹스를 행할 수 있고, 순간적인 발작처럼 쉽게 섹스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이런 성 같지 않은 무성(無性)의 성을 통해 기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고통을 견디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종교적인 위안이나 철학적 위안을 포기했기에 감정 있는 섹스는 오히려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의 섹스는 자위행위에 가깝게 된다. 상대방과의 상호성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소수(素數)로 존재하기에 자기자신으로만 나뉘어진다. 이런 자위행위는 부정적인 자아중심주의의 산물이기에 위무나 정화를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배설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소외의 성은 역설적으로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성에 대한 기억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그들이 보기에 환희를 포기한 메마른 성교는 단지 짐승들의 교미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들은 육체의 교환이 없는 사랑이 공상이라면, 사랑의 교환이 없는 섹스는 공포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의미에서 겉으로 보이는 차갑거나 무미건조한 성은 오히려 낭만적이거나 정신적인 성의 역상(逆像)이라고 할 수 있다. 성 행위 자체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모르스 부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육체는 ‘사랑의 책’이다. 하기에 합일성과 낭만성을 상실한 성이 그와 반대로 삶의 활력이나 건강한 쾌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5. 누드의 성, 알몸의 그림자


케네스 클라크에 의하면 알몸(naked)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그 자체나 가식이 없는 본연의 상태를, 누드(nude)는 알몸에 하나의 시각을 도입함으로써 가면으로 변형되고 대상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때문에 누드는 또다른 형태의 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고려할 때 1990년대 신세대작가들의 소설에 나타난 성은 알몸의 성이 아니라 누드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성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사회나 가족, 자아 등의 프리즘으로 바라본 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우승제나 박성원, 백민석은 권력에 저항하는 성(反性),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은 가족의 결핍과 충족을 나타내는 성(近性), 김영하나 박청호는 소외를 확인시켜주는 성(無性) 등을 그림으로써 알몸의 성을 누드화시키는 옷을 입히고 있다.


신세대는 공포감이나 위기감 때문에 섹스한다. 그래서 오히려 성이 육체적 행위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심리적인 행위이다. 흔히 “영혼을 박탈당한 세대”라고 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를 박탈당한 세대일 수 있다. 육체가 영혼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으로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섹스한다. 그런데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들의 실존이다. 성 자체가 존재증명이 아닌 부재증명의 증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문학의 성이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논의는 그들의 성이 지닌 그런 영혼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신세대문학의 성은 그들의 환부를 보여주는 상처의 언어이다. 때문에 그들의 성은 가벼운 웃음이 아닌 무거운 울음에 보다 가깝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거운 웃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성은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의 은유가 아니라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환유인 것이다. 한 번도 문학에서의 성이 누드가 아닌 알몸이었던 적이 없듯이 현실원칙이 아닌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아본 경우 또한 없다. 이것이 바로 신세대문학에 나타난 성 담론이 사랑의 표현이 아닌 동물적인 욕망을 배출하면서 전통적인 성관습을 붕괴시켰다고 우려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또 그들의 성이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라는 오해는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신세대가 성에 관한 한 히스테리성 억압과 강박관념적인 집착을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세대의 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정치성을 띠지 않은 것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아와 사회의 공명판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발기불능이나 조루, 동성애, 근친상간, 자위 등은 모두 존재들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 존재하거나 사회적 외상과 관련 있는 불구의 성들이다. 단 그들이 보여주는 이런 비정상적인 성은 정상적인 성을 희구하는 것이고, 단절적인 성은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도덕성이나 무책임성은 도덕성이나 책임감을 네거필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세대들은 포르노 같은 성을 통해 그런 포르노를 양산하는 포르노를 닮은 사회를 비판한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라는 의견 또한 신세대문학의 성이 이성의 전도체라는 점에서 반박될 수 있다. 신세대들은 이성을 적대시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의 성은 성에 관한 한 가짜낙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성의 피곤한 역할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들의 성은 이성적인 저항을 지향하는 것이지 이성 자체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더 많이 벗었는데도 덜 감각적인 육체가 되는 것이다.


혹시 신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퍼 없는 섹스’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완전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이기에 기대나 죄의식, 가책이 전혀 없는 섹스를 의미한다. 이런 섹스를 통해 애정과 책임감을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모든 장애를 없애고 고도로 이상화된 동물적인 행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혹은 앤소니 기든스가 강조하듯이 앞으로는 피임기술이나 체외수정의 발전으로 인해 성에 대한 규범이나 제약이 사라져 조형적인 성(plastic sexuality)이 부상할 수도 있다. 이제는 주어진 성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신세대들에게조차 이런 지퍼 없는 섹스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섹스는 바벨탑처럼 불가능한 꿈으로 보인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위해서는 항온동물이어야지 변온동물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온동물인 인간은 성에 있어서만큼은 주변환경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카멜레온이 된다. 성 자체가 항온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변수를 많이 지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측면에서 성은 다시 바벨탑의 언어가 된다. 성은 영원히 의심의 해석학일 수밖에 없다. 성의 개념이나 본질은 계속 결핍되고 유예되어야 문학화될 수 있다는 모순 때문에 지금도 플라톤의 이데아나 UFO처럼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신세대문학에게 요구하고 신세대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모두가 그들의 ‘화장술’이 아니라 ‘변장술’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新세대나 辛(sin)세대임과 동시에 scene세대이자 seen세대이다. 때문에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면, 겉이 아닌 속을 보고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를 ‘본’ 것이 아니라 ‘겪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폭력이 오히려 성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성을 많이 볼수록 그것에 대해 덜 생각하게 되고, 너무 많이 보여주면 직접 하지 않았는데도 실제로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각의 우월성이 육체의 빈곤을 초래하는 것이다. 신세대에게나 성에게나 진정 필요한 것은 ‘보는 눈’이 아니라 ‘만지는 눈’이다. 지금 신세대들의 육체와 성, 성 담론 자체 또한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기를 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눈 같은 손’이 아니라 ‘손 같은 눈’이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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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후 스트레스장애 [시려누-][명사]

 

[失戀後-障碍, post-broken heart stress disorder]

 

PBSD라고도 한다. 실연 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장애이다. 주요 증상은 당시 상황의 반복적 회상이다. 꿈에 상황이 재현되어 악몽에 시달리는 등 당시의 상황을 재경험하고 상기시키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회피하려 하고 감정이 둔화되거나 혹은 과민상태가 된다. 주로 과민반응, 환각, 감정회피, 불면증, 거식증, 구역질, 간혈적 두통, 우울증 등이 흔히 수반되어 나타나게 된다. 당사자 자체의 의지박약, 미련의 유무와 여부에 따라 개개인에서 보이는 증세의 정도는 다양하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후유증이 심하며 환자들 대부분의 감정은 비현실적이고, 타락, 분노, 우울, 자괴감을 잘 느끼게 된다. 알코올이나 약물남용, 헤픈 감정표현, 자해적 행동과 자살 시도, 대인관계 장애가 나타날 수도 있다. 정서적으로도 불안하여 합병증으로 해리증세나 공황발작을 동반하기도 한다. 치료방법으로는 최면치료, 정신과적 치료, 신경차단 치료요법 등 의학적 방법도 있으나 다른사랑을 하며 극복되는게 일반적이다.

 

**뜬금없이 이걸 올리는 이유는 내 지금 상황이 그렇다는게 아니라,(헐.왜이리 땀이 나지..)

이것도 정의가 된다는게 다소 놀라워서..이걸 어디 말로서 정의하랴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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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쎈연필 > [퍼온글] 숫자의 다양한 의미..

출처:http://blog.naver.com/ymlee6326/40009720792

 

0

0은 비존재, 무(無), 비현현, 무한정한 것, 영원한 것, 질이나 양을 초월한 것을 나타낸다. 비어 있는 원으로 묘사된 0은 죽음의 공허함과 원에 포함된 생명의 전체성을 동시에 나타내며, 원과 동일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타원으로서의 0은 두 개의 호가 각기 상승과 하강, 밖으로 향한 선회와 안으로 향한 선회를 나타낸다. 1에 앞서 나온다는 점에서 공(空), 비존재, 사념, 궁극적 신비, 불가해한 '절대'의 뜻이다.

도교 0은 '공(空)'과 무를 나타낸다.

카발리즘 '무한정한 것', '무한의 빛', '절대무(絶對無)'를 상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0은 완전형, 만물의 기원이자 만물을 포괄하는 '모나드'를 나타낸다.

이슬람교 0은 신의 본질이다. 또한 0은 '우주란(宇宙卵)', 원초적인 남녀추니를 나타내고, '충만'을 상징한다.

1

1은 원초의 통일, 태초의 시작, 창조자, 주동자, 모든 가능성의 총합, 본질, 중심,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 배아(胚牙), 고립을 나타낸다. 또한 융기, 상승을 나타낸다.

중국 양(陽), 남성, 하늘, 길(吉)을 뜻한다.

기독교 하나님 아버지, 신성을 뜻한다.

유태교 1은 아도나이를 나타낸다. 또한 숨겨진 지식(카발라에서는 세피로스의 케텔)을 뜻한다.

이슬람교 통일로서의 신, 절대자, 모든 것을 자족할 수 있는 존재를 뜻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영(靈), 만물의 기원으로서의 신, 본질, 모나드를 의미한다.

도교 도(道)는 1을 낳고, 1은 2를 낳고, 2는 3을 낳고, 3은 만물을 낳는다.

2

2는 이원성, 둘의 교체, 차이, 갈등, 의존,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정적인 상태, 뿌리박음, 변하여 균형을 유지함, 안정, 반영, 대극, 인간의 이원성과 욕망을 나타낸다. 이원성으로서 현현되는 것은 모두 서로 대립되는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1는 점(点)을, 2는 길이를 나탄내다. 2는 1에서 출발한 최초의 숫자며 따라서 최초의 선(善)에서 일탈이라는 의미의 죄를 상징한다. 또한 순간적으로 타락하기 위숨을 나타낸다.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두마리의 동물은 배가된 힘을 나타낸다.

연금술 2는 태양과 달, 왕과 왕비, 유황과 수은 등 대립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처음에는 대립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융합되는 남녀추니로서의 통일이다.

불교 2는 '윤회'의 이원성, 남과 여, 이론과 실천, 지혜와 방법을 나타낸다. 또한 서로 도와 길을 찾고 걷는 맹인과 절름발이를 뜻한다.

중국 2는 음(陰), 여성, 뭍(지상), 흉(凶)을 뜻한다.

기독교 신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예수를 뜻한다.

유태교 생명력을 의미하고, 카발라에서는 지혜와 자기 인식을 뜻한다.

힌두교 이원성, 샥타와 샥티를 뜻한다.

이슬람교 영(靈)을 뜻한다.

플라톤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2는 뜻이 없는 수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3의 요소를 도입하는 관계를 함의(含意)하기 때문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2는 한 쌍, 즉 2분된 지상적 존재를 나타낸다.

도교 괘(卦)는 음과 양, 두 가지 결정요소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2는 중심이 없기 때문에 음에 속하는 약한 숫자다.

    3

    3은 다수, 창조력, 성장, 이원성을 극복한 전진운동, 표현, 통합을 뜻한다. 3은 '모든'이라는 말이 붙을 수 있는 최초의 숫자이며,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전체를 나타내는 숫자다. 3의 힘은 보편적이며 하늘, 땅, 바다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3중성을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육체·혼·영, 탄생·삶·죽음, 처음·중간·끝, 과거·현재·미래, 달의 세 가지 상(초승달, 반달, 보름달)을 나타낸다. 3은 천계의 숫자이며, 4가 육체를 나타내는 데 비해 3은 영혼을 상징한다. 3은 4와 합쳐져 7이라는 성스러운 숫자가 된다. 또 3과 4를 곱하면 12가 되는데, 그것은 '황도십이궁', 일년 열두 달을 의미한다. 3은 1과 2를 더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2와 1로 나누어질 수 있다. 도교에서 3은 평형을 성립시키는 중심점을 가지기 때문에 강한 숫자다. 3에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성'(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가족에게도 반영된다. 또한 3에는 중첩효과라는 권위가 있다. 즉 한 번이나 두 번은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지만 세 번이 되면 확실성과 강한 힘을 지닌다.

    예를 들면,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3배 위대한 주(主)', '3배 행복한 섬' 등이 그것이다. 민화에서는 3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한다. 3번의 소원, 3번의 시련, 3인의 왕자, 왕비, 마녀, 또는 운명의 세 여신, 3인의 요정을 뜻한다. 이중 둘은 착한 요정, 나머지 하나는 악한 요정인 경우가 많다. 3은 다수를 의미하는데, 많은 숫자, 군집, '만세삼창'을 나타낸다. 또한 성취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들과 영적 존재의 삼위일체의 예는 무수히 많다. 삼위일체의 달의 여신이나 삼면의 여신은 특시 셈족, 그리스, 켈트, 게르만 등의 종교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하나의 신격을 가진 세 개의 상(相), 힘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제일 먼저 삼각형이 있다. 3개의 원, 또는 삼각형이 일부 중첩되어 있는 도형은 삼위일체로서의 3개의 인격의 불가분의 통일을 보여주는 것이다. 삼각형 외에 3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는 삼지창, 붓꽃, 세개의 잎, 3중 벼락, 괘상 등이 있다. 달에 속하는 동물들은 다리가 세 개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달의 세 가지 모양에 대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달에 3마리의 토끼, 또는 세 사람의 인간이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아프리카 아샨티 족 달의 여신은 셋인데, 그중 둘은 흑인, 하나는 백인이다.

    연금술 황, 수은, 소금의 세 성분으로 이것들은 각기 영, 혼, 육체를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삼위일체의 신이 많다. 카르타고에서는 달을 뜻하는 '태모신'이 3개의 상징적인 기둥으로 묘사되었다.

    아라비아   이슬람교 이전에 마나트는 3인의 성처녀(알-이타브, 알-우자, 알-마나트)로 나타내지는 삼위일체의 여신이다.1) 이 여신의 상징은 돌기둥, 돌, 기둥 또는 꼭대기에 비둘기를 장식한 기둥이다.

    1) 이타브는 타이프 근교의 계곡에 있는 흰 돌에 사는 처녀신, 우자는 메카 근교의 계곡 아카시아 나무에 살고, 마나트는 메카와 메디나 사이의 쿠다이드에서 제사지내는 검은 돌에 산다.

    불교 3은 '삼보(三寶)', 즉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인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나타낸다.

    켈트 브리지트 여신은 세 가지 모습을 가진다. 켈트에는 '지복의 세 여인' 외에 무수한 3인조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같은 신의 세 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3은 특히 중요한 숫자다.

    중국 3은 성스러움, 길(吉)한 숫자, 가장 작은 홀수이다. 달에 사는 두꺼비 혹은 태양에 사는 새는 다리가 세 개다.

    기독교 3은 삼위일체, 혼, 인간과 교회의 영육간의 결합, 삼인의 동방박사가 '신, 왕, 희생'으로서의 예수에게 바치는 세 가지 선물(유향, 황금, 몰약), 변용된 예수의 세 가지 모습, 예수가 받은 세 차례의 유혹, 베드로의 세 차례에 걸친 부인, 골고다 언덕의 세 개의 십자가,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하기까지의 날 수, 부활한 예수가 세 번 출현함, 엠마오의 순례자, 사도들에게 출현, 3인의 마리아, 신앙·희망·은총으로 이야기되는 신을 향한 세 가지 덕목을 뜻한다.

    이집트 그리스·로마 시대에 토트 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로 불렸다.

    그리스, 로마 3은 숙명, 운명으로서 세 가지 모습을 가진 하나의 신 모이라이(라케시스, 클로토, 아트로포스)를 나타낸다. 헤카테(Hecate) 여신도 삼위일체다. 복수의 여신으로 나타나는 에리니에스(Erinyes, 알렉토, 타시포네, 메가이라)들과 메두사로 알려진 괴물 고르곤의 세 자매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도 하나이자 셋인 모습이다. 또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의 세 여신 카리테스들(Caritas,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레이아), 미의 세 여신들(graces), 3인의 세이렌(Seiren), 식물의 성장을 주관하고 자연과 사회의 질서를 상징하는 세 명의 여신 호라이들(Horae, 에우노미아, 디케, 에이레네 또는 탈로, 아우크소, 카르포), 헤스페리데스의 정원을 지키는 세 명의 여신들(아이글레, 아리티아. 헤스펠라레투사 또는 아이글레, 아레투사, 헤스페리아), 태어날 때부터 백발을 하고 나온 그라이아이(Graeae, 팜프레도, 에니오, 데이노)도 있다. 지옥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Cerberos)는 머리가 셋이고 스킬라(Scylla)에게는 거대한 꼬리가 세 개, 키마이라(Chimaera)는 머리와 몸, 꼬리가 세 가지 다른 동물(사자, 산양, 뱀)의 모습이었다. 3,4 그리고 두 숫자의 합인 7은 3가지의 세계와 4대 원소를 주관하는 여왕으로서의 여신 아프로디테/베누스(Aphrodite/Venus)의 성스러운 숫자다. 오르페우스(Orpheus) 교의 상징체계는 '존재', '생명', '지성'이라는 3대 요소를 가진다.

    유태교 3은 무한의 빛, 성화(聖化)된 지성, 카발라에서 3은 세피로스의 비나(지성)을 나타내며, 남·녀, 통합적 지성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헤르메스 사상 지고의 힘힘으로서의 신,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를 의미한다.

    힌두교 트리무르티(trimurti,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의미한다. 이는 창조·지속·파괴와 시작·유지·종결의 세 가지 힘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삼신일체의 신은 많다. 달의 전차는 바퀴가 세 개 달려 있다.

    잉카 태양신에는 아버지 태양(아포인테이), 자식 태양(첼리인테이), 형제 태양(인테이카오키)의 세 가지 모습이 있었고, 이들은 삼신일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세 가지 신기(神器)에는 거울(八咫鏡), 검(天叢雲劍), 옥(八坂瓊曲玉)이 포함되며, 각기 진리·용기·연민의 뜻을 가진다.

    마오리 족 창조신인 큰영은 태양, 달, 대지의 삼위일체 신이다. 또한 자연의 신 즉 과거·현재·미래의 신이기도 하다. 3은 세워진 세 개의 손가락으로 상징되는 정신·인격·체격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완성을 나타낸다.

    북유럽, 게르만 숙명은 세 명의 노른(마니, 니, 니시), 즉 운명의 세 여신을 통해서 나타난다. 세 자매는 순서대로 보름달, 초승달, 반달을 상징한다. 게르만 신화에서는 달이 숙명을 나타내며, 달의 여신 홀다는 두 자매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달에 사는 토끼는 다리가 셋이다. 천둥신 토르(Thor)는 때로 머리가 셋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각 소용돌이 무늬 또는 삼각 호 장식은 오딘/보탄(Odin/Wotan)의 상징이다. 또한 3은 행운의 숫자다. 뭐든 좋은 것은 3이다.

    슬라브 달의 신은 머리가 세 개다.

    도교 삼재는 천, 지, 인을 가리킨다. 3은 모든 것을 둘로 나누면, 중심이 남는 최초의 강한 숫자다. 3은 양. 길함을 뜻하며 다수를 상징한다.

    4

    최초의 입체는 4에서 비롯된다. 4는 현현의 공간적 구조 또는 질서, 동적인 원에 대립하는 정적인 상태를 상징한다. 4는 완전성, 전체성, 완성, 연대, 대지, 질서, 합리성, 측정, 상대성, 정의를 상징한다. 4에서 비롯되는 것으로는 4가지 기본 방위, 사계절, 4개의 바람, 정사각형의 4변, 십자가의 4개의 팔, 낙원에 있는 4개의 강, 지옥에 있는 4개의 강, 네 개의 성산(聖山), 낮과 밤의 네 구분, 달의 4현(弦), 4복음서 기록자 등이 있다. 서구에서는 세계가 4대 원소(동양에서는 5행)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성스러운 사위일체는 삼위일체와 대조적이다. '구약성서'에서는 4가 상징적인 숫자였고, '낙원'의 중심에서 네 방향을 향해서 십자형으로 흘러나가는 4개의 강(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지상 세계의 4개 지방 등 보편적인 상징이었다. 사위일체는 정사각형이나 십자가 뿐 아니라 4개의 잎 형상으로도 묘사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4는 네 개의 기본방위, 4가지 바람 등 가장 자주 사용되는 숫자이며, 십자, 만(卍) 등의 형태로 묘사된다. 의식이나 의례에서는 같은 동작이 네 번 반복된다.

    고대 서아시아 바람의 네 신은 동사남북의 네 방위와 동일시되었다.

    불교 생명의 나무 담바에는 큰 가지가 4개 있고, 뿌리에서는 낙원의 4개의 성스러운 강이 흘러나온다. 이것들은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의 4무량심1)을 나타낸다. 중국 불교에서는 4가지 기본 방위에 사천왕(四天王)2), 즉 동에는 옥반지와 창을 들고 있는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에는 비파를 지닌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에는 혼돈과 지진, 암흑의 우산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에는 채찍, 표범가죽으로 만든 자루, 용, 진주를 가지고 있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자리잡고 있다.

    1) 자무량심은 안락을 베풀려는 마음, 비무량심은 다른 사람의 고난을 덜어주려는 마음, 희무량심은 중생이 기쁨을 얻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사무량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을 버리고 모두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이다.
    2) 한국에서는 동쪽에 옥반지와 검을 지닌 지국천왕, 남쪽에 용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 서쪽에 탑을 들고 있는 광목천왕, 북쪽에 비파를 지닌 다문천왕이 있다.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목조 사천왕 참조.

    중국 4는 정사각형으로 상징되는 '대지'의 숫자다. 불사의 강은 모두 네 개다.1) 4는 짝수이며 음(陰)의 숫자다.

    1) 사독(四瀆): 신앙의 대상이 된 4대강. 양쯔(揚子), 지수이(濟水), 황허(黃河), 화이허(淮水).

    기독교 4는 육체의 숫자, 3은 영혼의 숫자다. 낙원에서 흘러나오는 4개의 강, 4복음서, 4복음서 기록자, 4명의 대천사(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 4악마(사탄, 바알제붑, 벨리아르, 몰록), 4대 교부(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뭇,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4대 에언자(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4덕(신중, 용기, 절제, 정의), 하나인 영기에서 불어오는 4개의 바람, 계시록의 4기사, 4복음서 기록자의 형상을 뜻한다.

    이집트 4는 시간과 태양의 운행을 이해하는 성스러운 숫자다. 4개의 기둥이 하늘의 궁륭을 떠받치고 있다. 사체(死體)의 네 부분(간장, 폐, 내장, 위)이 담겨 있는 4개의 카노푸스의 단지를 지키는 수호자는 4가지 기본 방위와 연관되는 호루스(Horus)의 네 자식들이다.

    그노시스 주의 바벨로(태모신)의 4를 뜻한다.

    그리스 4는 헤르메스 신의 숫자다.

    유태교 4는 측정, 은혜,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리즘에서 4는 세피로스의 헤세트(은총)를 나타내며, 카발라의 4세계(유출 세계, 창조 세계, 형성 세계, 활동 세계), 공간의 4방위, 토라의 4가지 위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헤르메스 사상 헤르메스 사상에서 4는 사위일체의 신(누스, 로고스, 누스 데미우르고스, 안트로포스)을 나타낸다.

    힌두교 전체성, 충실, 완성을 의미하며, 창조주인 브라흐마는 4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힌둑 사원은 정사각형의 4변을 기초로 건축되며 질서와 완결성을 상징한다. 4개의 물질전개원리, 인간의 사지, 4자연계(동물, 식물, 광물, 정신), 4유가를 뜻한다. 4는 주사위에서 가장 이길 승산이 많은 숫자(서양에서는 7)이다. 4개의 카스트, 둘씩 대립하는 4개의 쌍이 있다.

    이슬람교 원질을 나타내는 4가지 요소는 원리(창조주), 보편적 지성, 보편 영혼, 제1질료다. 이것은 카발리즘의 4세계에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4인의 천사, 4개의 죽음의 집이다.

    마야 천둥번개를 타고 지상계의 기본방위로 나타나는 챠크스 신이 있다. 또한 바카브 신과 4인이 교대로 1년의 1/4씩 지상계를 통치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완성, 조화로운 균형, 정의, 대지를 뜻한다. 4는 피타고라스 학파에서 서약의 숫자다. 4와 10는 신을 뜻하며, 테트라크티스(tetraktys, 1+2+3+4=10)의 성수(聖數)다.

    북유럽 신들의 세계 아스가르트(Asgard)에는 젖이 흐르는 4개의 강이 있다.

    게르만 4인의 난장이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도교 하늘을 지키는 네 사람의 수호신은 옥으로 만든 탑을 들고 있는 이(李), 검(劍)을 들고 있는 마(馬),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있는 조(趙), 못이 박혀 있는 곤봉을 들고 있는 온(溫)이다. 4종류의 영적인 짐승으로 된 4신과 4령이 있다. 4신은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이며, 순서대로 4가지 기본방위(동서남북)를 나타낸다. 4령은 기린, 봉황, 거북, 용이다.

    5

    5는 소우주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사지를 뻗어 오각형의 별 모양을 한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다. 오각형 별에는 끝나는 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별과 마찬가지로 완전성과 힘의 상징이다. 5는 n제곱을 했을 때 마지막 숫자가 항상 5로 끝나기 때문에 순환수라고 불린다. 오각형 별은 원처럼 전체를 상징한다. 5는 중심과 기본방위를 나타내는 4점을 합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각형 별 모양은 4대 원소라는 힘을 만들어낸 중심적 창조주인 신성을 나타낸다. 5는 여성, 짝수인인 2와 남성, 홀수인 3의 결합으로서 성혼의 숫자다. 또한 5는 명상, 종교, 섭리, 다재, 오감을 나타낸다. 다섯잎 꽃, 다섯 개의 끝을 가진 잎은 소우주를 나타낸다. 별포는 펜타그램과 마찬가지로 통합된 인격을 나타내며 별표의 곡지점이 위쪽을 향하고 있을 때에는 요술과 검은 마법을 뜻한다. 사람의 다섯 손가락은 최초의 계산기 구실을 했다.

    연금술 다섯잎 꽃과 오각형 모양의 별은 제5원소를 나타낸다.

    불교 심장에는 네 가지 방향이 있고, 중심과 합해서 5라는 숫자가 되어 보편성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네 개의 섬에 둘러싸인 '성산(聖山)'도 보편성의 상징이다.1) 다섯의 선정불(禪定佛)2)이 있다.

    1) 수미산(須彌山)은 동의 승신주(勝身洲), 서의 섬부주(贍部洲), 남의 우화주(牛貨洲), 북의 구로주(俱盧洲)의 네 대륙에 둘러싸여 있다.

    2) 1. 대일여래(大日如來, 광휘의 뜻)는 법륜(法輪)과 중심과 흰색으로 상징된다. 2. 아축여래(阿축如來, 부동의 뜻)는 금강, 동쪽, 청색으로 상징된다. 3. 보생여래(寶生如來, 보탄(寶誕)의 뜻)는 보석과 남쪽, 황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4.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무량광(無量光)의 뜻)는 연(蓮)과 서쪽, 적색에 의해서 상징된다, 5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아주 확실한 성공의 뜻)는 검(劍)과 북쪽, 녹색으로 상징된다.


    중국 오행(五行)1), 오기(五氣)2), 오운(五運)3), 오성(五星)4), 오악(五嶽)5), 오곡(五穀)6), 오색(五色), 오미(五味)7), 오독(五毒)8), 오진(五塵)9), 오덕(五德)10), 오복(五福)11), 오상(五常)12), 오륜(五倫)13)을 뜻한다.

    1)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2) 추위(寒), 더위(暑), 가뭄(燥), 습함(濕), 바람(風)
    3) 오행의 운행
    4) 목성(歲星), 화성(熒惑星), 금성(太白星), 수성(辰星), 토성(鎭星)
    5) 태산(泰山), 형산(衡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숭산(嵩山)
    6) 중국에서는 참깨, 보리, 피, 쌀, 콩(또는 참깨, 보리, 피, 수수, 콩)을 오곡이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오곡이라 한다.
    7)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단맛
    8) 뱀, 두꺼비, 지네, 전갈, 도마뱀의 독
    9)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다섯 가지 욕망. 물질(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촉감(觸)의 오욕
    10) 온화, 양순, 공손, 검소, 겸양
    11) 장수, 부유, 무병식재, 도덕을 즐기는 것, 천수를 누리는 것(또는 자손이 많은 것)
    12) 어짐(仁), 의리(義), 예절(禮), 지혜(智), 신뢰(信)의 다섯 가지 덕
    13)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붕우유신(朋友有信)

    기독교 5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다. 오감(五感), 십자가의 다섯 개의 점, 십자가 형을 받은 예수의 몸에 난 다섯 개의 상처(두 손, 두 발, 허리), 5천 사람을 먹인 물고기, 모세 오경1)의 숫자다.

    1) 창세기, 출애급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다섯 마리 악어의 숫자다.

    그리스, 로마 사랑과 화합을 나타내는 혼례의 숫자다. 5는 비너스(금성)의 숫자며, 비너스는 5년을 주기로 완성된다. 빛의 신으로서의 아폴론/아폴로는 전능, 전지, 편재, 영원, 통일의 5가지 상징물을 가지고 잇다.

    유태교 5는 강함과 엄격, 근원지의 상징이다. 카발에서 5는 세피로스의 게브라(엄격함)를 의미한다.

    힌두교 세계는 다섯 가지 요인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오대(五大, 조악하고 큰 다섯 원소), 오유(五唯, 미세 원소), 다섯 가지 원색, 오감, 시바 신의 다섯 가지 얼굴이다. 비슈누(Vishnu) 신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10가지(5의 2배) 권화1)가 있다.

    1) 마즈야(물고기), 쿠르마(거북), 바라하(멧돼지), 누리싱하(사람사자), 바마나(난쟁이), 파라슈라마(도끼를 가진 라마), 라마, 크리슈나, 석가세존, 칼키

    이슬람교 실행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인 오주(五柱)1), 신의 다섯 가지 '재림'2), 다섯 가지 기본 교리3), 다섯 가지 활동, 하루 다섯 차례4)의 예배를 나타낸다.

    1) 신앙 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
    2) 물질세계, 이미지와 상징의 세계, 영의 세계, 신의 이름과 속성의 차원, 신의 본질의 차원
    3) 무아타지라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 내세에 대한 약속과 위협, 4. 중간적인 위치, 5. 윤리적 명령이고, 시아파는 1. 신의 유일성, 2. 신의 공정함, 3.예언자직, 4. 사도직, 5. 이맘직
    4) 새벽, 정오, 오후, 일몰, 밤


    파르시 교 파르시 교와 만다 교의 의식에서 5는 매우 중요한 숫자다. 그것은 성스러운 빛의 윤일이 5일이라는 사실과 결부된다.

    피타고라스 학파 5는 성혼, 즉 하늘(3)과 대지(2)의 결혼을 나타낸다. 빛, 빛의 신 아폴론과 그의 다섯 가지 특성을 가리킨다.

    6

    6은 평형, 조화를 상징한다. 6은 1에서 10까지의 범위 안에서 완전수(1+2=3=6)다. 필론에 따르면 모든 수의 중심으로서 가장 생산적이다. 6은 서로 반대되는 대극(對極)의 통일을 상징하는데, 자웅 두 개의 삼각형이 합쳐져 남녀추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때 꼭지점이 위를 향하고 있는 삼각형은 남자와 불, 하늘을 나타내고, 역삼각형은 여자, 물, 대지를 나타낸다. 또한 6은 사랑, 건강, 아름다움, 기회, 행운을 의미한다. 서양에서는 주사위에서 6이 다른 숫자를 누르는 가장 강한 숫자다. 태양의 바퀴에는 6개의 빛줄기가 있다. 교차하는 두 개의 삼각형, 즉 '솔로몬의 봉인'이라고 불리는 6개의 꼭지점을 가진 별은 완전한 균형을 상징한다.

    고대 서아시아 창조에 소요되는 6일간을 뜻한다.

    중국 우주는 6이라는 숫자에 의거한다. 4가지 기본 방위와 하늘(위)과 땅(아래)이 6가지 방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여섯 가지 감각1)이 있다. 밤낮의 깊이는 각기 여섯으로 구분된다.

    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육감으로서의 마음

    기독교 6은 완전, 완성, 우주 창조에 필요한 6일간을 나타낸다.

    유태교 창조에 필요한 6일간, 명상, 지성을 나타낸다. 카발라에서 6은 창조, 세피로스의 디후엘레트(아름다움)의 상징이다.

    피타고라스 학파 기회, 행운을 뜻한다.

    7

    7은 대우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완전, 전체성의 뜻이다. 3은 하늘과 혼을, 4는 대지와 육체를 나타내기 때문에, 7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의 덧없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일 작은 숫자다. 7은 완성, 보증, 무사, 안식, 풍부, 재통합, 종합 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처녀성과 '태모'를 나타내는 숫자다. 7과 연관되는 것으로는 우주의 7단계, 일곱 개의 하늘, 일곱층의 지옥, 7개의 행성과 그 행성이 나타내는 금속들(달은 은, 수성은 수은, 금성은 동, 태양은 금, 화성은 철, 목성은 주석, 토성은 납)이 있다. 우주의 일곱 개의 원, 태양의 일곱가지 광선, 인간의 일곱시기, 지혜의 일곱기둥, 일곱가지 무지개색, 1주일의 일곱 요일, 7음계, 세계의 7대 불가사의1) 등이다. 태양의 제7의 광선은 인간이 현세에서 내세로 가는 길이다. 단식과 회개는 7일간 행한다. 고대 유태인 철학자 필론에 따르면 어떤 수도 7제곱을 하면 제곱과 세제곱 모두를 포함하므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용은 인도, 페르시아, 동아시아, 켈트, 지중해의 신화에 등장한다.

    1) 이집트의 피라밋,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터키 에베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그리스 로도스 섬의 거인청동상, 이라크 바빌론의 공중정원, 허티 할리카르나소스의 무덤,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연금술 작업에서 7개의 금속이 관계된다.

    고대 서아시아 월령의 일곱 가지 구분과 1주일의 일곱 요일이다. '달이여! 그대는 뿔 모양의 빛으로 6일을 정하고 7일째에는 반쪽의 관으로 빛난다.' 이런 의미에서 음력 일곱째 날은 태양에 대립하는 어둠과 불길을 상징하며, 일곱째 날에 어떤일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 날이 안식일이 되었다. 대지에는 일곱 개의 지역이 있다. 지구라트의 일곱 행성들로 상징되는 일곱 개의 하늘이다. '생명의 나무'의 일곱가지에는 각기 일곱 개의 잎이 달려 있다. 지옥의 일곱 개의 문, 티아마트 여신의 일곱 악령과 그 여신을 죽인 일곱 개의 바람, 7가지 색, 일곱개의 인장, 일곱 기둥의 '운명의 신'을 나타낸다.

    점성술 큰곰자리의 일곱 개의 별은 1년 중 어느 때라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불멸이다. 플레이아데스, 일곱 개의 큰 행성, 태양의 일곱 가지 광선을 뜻한다.

    불교 7은 상승의 숫자, 지고천(至高天)으로 올라가 중심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는 숫자다. 부처의 칠각(七覺, 일반적으로 팔상)은 시공을 초월하는 칠천(七天)1)을 넘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자바 섬에 있는 보루부두르 불교사원의 7층 건축물은 성산이자 우주축을 상징한다. 정상은 초월적인 북쪽을, 정상에 오르는 것은 부처의 영역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1) 야마천(夜摩天), 도사다천(覩史多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범중천(梵衆天), 대범천(大梵天)

    기독교 신은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6개의 광선의 한가운데 있는 일곱번째 광선으로 상징된다. 7과 관계되는 것으로는 7가지 성사1), 성령의 일곱가지 선물2), 7덕3), 일곱가지 큰 죄4), 연옥에 있는 일곱 층으로 된 산5), 중세의 자유 7과6), 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일곱 개의 투명구체, 7대 예언자7), '지상'에 관계하는 일곱 대천사8), 예수에 의해서 추방된 일곱 악마, 7일간의 단식과 회개, 성모 마리아의 일곱 가지 기쁨9)과 슬픔10), 기독교 국가의 7대 영웅11), 초대 교회의 일곱가지 충고다. 또한 천지창조의 6일이 지난 후 일곱째 날은 안식일이다. '구약성서'에서 7이라는 숫자는 바알람의 일곱 개의 제단, 제물로 바친 일곱 마리 수소와 숫양, 일곱 개의 양각 나팔,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 돎, 나아만이 요단 강에서 목욕한 횟수, 또한 삼손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이라고 말했다. 엘리사에 의해 깨어난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했다. 노아의 방주는 7개월 만에 육지에 도달했다.

    1) 성세, 견진, 성체, 고백, 병자, 신품, 혼인
    2) 지혜, 총명, 지식, 의지, 영리, 효애, 경외
    3) 3가지는 신에 대한 덕이고, 4가지는 기본 도덕
    4) 교만, 탐욕, 색욕, 질시, 폭식, 분노, 나태
    5) 일곱 가지 큰 죄를 하나씩 씻어내는 곳
    6) 문법, 논리학,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
    7) 4대 예언자에 요나, 요엘, 자카리아 포함
    8) 4대 천사에 카무엘, 요피엘, 쟈디엘 포함
    9) 수태고지, 엘리사벳의 내방, 예수의 강탄, 동방박사 3인의 내방, 잃었던 예수의 발견, 부활, 승천
    10) 시누온의 예언, 이집트로의 피난, 예수를 잃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뭇사람에게 전시된 예수의 시신,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매장
    11) 영국의 성 게오르기우스/조지, 스코틀랜드의 성 안델레, 웨일즈의 성 다비드, 아일랜드의 성 파트리키우스, 스페인의 콤포스테라의 성 야곱, 프랑스의 성 도니, 이탈리아와 파트와의 성 안토니우스


    이집트 '운명의 여신'으로서의 일곱 명의 하토르(Hathor)와 마아트(Maat)가 있었으며, 이 여신의 여사제들은 7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있었다. 라(Ra) 신의 일곱 딸은 7벌의 내의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들었다. 라 신의 일곱 마리 매들은 칠현인을 나타낸다. 라의 호아소와 함께 있는 일곱 마리의 암소는 풍요를 나타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집트 신화 해석에서는 명계에 일곱 가족이 있고 21개의 문이 있다. 7은 오시리스(Osiris) 신의 성수(聖數)다.

    그리스, 로마 7은 7현의 리라를 가진 아폴론/아폴로 신의 수이며 아테나/미네르바 여신, 군신 아레스/마르스의 수이기도 하다. 목신 판(Pan)은 일곱 개의 갈대로 만든 갈대 피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에는 일곱 명의 현인1)이 있다.

    1) 로도스 섬의 클레오불롯, 코린토의 정치가 페리안드로스, 레스보스의 정치가 피타코스, 그리스의 격언가 비아스,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 스파르타의 정치가 케일론,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

    유태교 신비의 지혜를 뜻한다. 유태의 1년에는 일곱 번의 큰 제삿일1)이 있다. 메노라(Menorah)라는 가지가 일곱인 촛대가 있다. 솔로몬의 신전을 건축하는 데 7년이 걸렸다. 지혜의 일곱 기둥2)의 뜻이다.

    1) 신년제(로슈 하샤나), 속죄의 날(욤 피르르), 초막절 축제(수코프), 궁결제(하누카), 프림 제, 과월제(페사하), 칠주제(샤보트)
    2) 카발리즘에서 세피로스의 네시아하(영원)의 뜻이다.


    힌두교 브라흐마의 칠보, 대홍수 이전의 일곱 신과 홍수에서 구원된 일곱 현자를 나타낸다.

    이슬람교 7은 가장 작은 완전수, 일곱 개의 하늘, 일곱 가지 기후, 일곱 대륙과 바다, 일곱 색, 7인의 예언자1), 일곱 가지 활동력, 혼의 일곱 가지 상태2)를 뜻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을 상징한다. 순례에서 가파 신전을 일곱 바퀴 도는 까닭은 알라가 가진 일곱 가지 속성3)을 상징한다.

    1) 아담, 누흐(노아), 이브라힘(아브라힘), 무사(모세), 다우드(다윗), 이사(예수), 무하마드
    2) 명령을 내려 악으로 유도하는 혼, 비난하고 비판하는 혼, 영감을 받는 혼, 평온한 혼, 만족하는 혼, 기뻐하는 혼, 완전한 혼
    3) 생명, 지식, 의지, 능력, 청력, 시력, 언어


    일본 칠복신(七福神)1)을 상징한다.

    1) 대흑(大黑), 혜비수(惠比須), 비사문(毘沙門), 변천(辯天), 포대(布袋), 복록수(福祿壽), 수로인(壽老人)

    마법 주문으로 옭아매기 위해서 끈에 일곱 개의 매듭을 만든다. 주문은 일곱 번 반복한다.

    미트라교 미트라스 신전에는 일곱 개의 가로대를 가진 사다리가 있는데, 그것들은 밀의의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계단을 상징한다.

    피타고라스 학파 3은 하늘, 4는 대지를 뜻하며, 7은 이승의 '신', 완성을 나타낸다.

    8

    영적인 의미에서 8은 신참자가 이니시에이션의 일곱 단계, 칠천계(七天界)를 통과해서 도달하는 최종지점을 상징한다. 따라서 8은 '낙원'의 회복, 재생, 부활, 지복, 완전한 리듬의 상징이다. 신의 은총에 의해서 인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제8일째다. 단식과 참회의 7일간이 끝난 8일째는 풍요와 신생의 날이다. 7+1이라는 의미에서 8은 옥타브를 나타내는 숫자, 재출발을 상징한다. 8은 8개의 꼭지점을 가진 정육면체와 결부되기 때문에 입체성을 상징한다. 동서남북의 4가지 기본 방위에 각각의 중간 방위를 다하면 8개의 방위가 되며, 바람에도 8가지 종류가 있다. 8은 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쌍을 나타낸다. 정팔각형은 정육면체에서 원으로서의 변형의 시작을 나타낸다.

    고대 서아시아 일설에 의하면 네보 신의 마법의 숫자다.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중국 8은 전체, 모든 가능성의 현현, 행운의 상징이다. 팔괘(八卦)는 양(陽)을 나타내는 효(爻)가 세 개씩 다양하게 결합해서 8개의 조합으로 나타난 도형이다. 이들 8개의 조합은 대개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때 원주는 시간과 공간(및 그 속에서의 생성 유전)을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여덟 가지 기쁨이 있다.

    기독교 신생, 재생의 듯이다. 성수반은 대개 다시 태어남의 상징으로 8각형이다. 여덟가지 행복을 뜻한다.

    이집트 신 토트의 성수(聖數)다.

    유태교 8은 완벽한 지혜, 광휘, 세피로스의 호드(권위), 요드 헤 바브 헤(YHVH, 야훼)의 숫자, 주(主)의 숫자다. 솔로몬 신전은 8일째 되는 날 깨끗이 청소되었다.

    헤르메스 사상 8은 헤르메스 신학에는 수와 기하학의 발명자인 주신 토트/헤르메스와 그 밑의 여덟 명의 신1)이 있다.

    1) 눈, 네네트(심연), 후후, 후후트(무한), 쿠쿠, 쿠쿠트(암흑), 아멘, 아메네트(불가시성, 공기)

    힌두교 8*8는 지상에 현현된 천계의 질서를 상징한다. 사원과 '만다라'의 형태는 8*8의 상징을 토대로 건축되었다. 세계 8대 지역, 8개의 태양, 하루의 시간을 8등분함, 8개의 '차크라'가 있다.

    이슬람교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왕관은 8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다. 이것은 공간의 8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아라비아 어의 철자의 여덟 가지 구분1)에도 대응한다.

    1) 순(脣) 문자, 치경(齒莖) 문자, 치찰(齒擦) 문자, 설단(舌端) 문자, 구각(口角) 문자, 경구개(硬口蓋) 문자, 구개수(口蓋垂) 문자, 연구개(軟口蓋) 문자

    일본 8은 수가 많은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 주의 플라톤에 의하면 빛나는 하늘의 기둥을 중심으로 동심원상으로 색색가지 여덟 개의 천구가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8은 연대, 안정을 나타낸다.

    도교 8은 현현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낸다. 현상계의 여러 가지 힘은 팔괘로 상징된다. 팔선 또는 불멸을 뜻한다.

    9

    9는 강력한 숫자인 3의 거듭제곱(3x3)이고 '3조의 3배'다. 9는 완성, 성취, 달성, 처음과 끝, 전체를 의미하며 천계와 천사의 숫자다. (9천계, 9천사의 위계) 또한 지상낙원을 나타낸다. 9는 불후의 숫자다. 또한 9는 원주를 나타내는 숫자다. 원주는 90도 단위로 4등분되며 원주 전체는 360도이기 때문이다. 9는 2개의 삼각형이 조합된 모양으로 상징되며, 남과 여, 물과 불, 산과 동굴과 같은 대립원리를 상징한다.

    불교 9는 지고의 영적인 힘을 상징하며 구천(九天)1)의 의미가 있다.

    1)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고 생각된 아홉 개의 천체. 일천(日天), 월천(月天), 수성천(水星天), 화성천(火星天), 목성천(木星天), 금성천(金星天), 토성천(土星天), 항성천(恒星天), 종동천(宗動天)

    불교 8은 완성상태, 모든 가능성을 나타내며 불족석(佛足石)의 팔길상인(八吉祥印)이다.

    켈트 켈트의 전통문화에서 9는 매우 중요한 의미르르 가진다. 8가지 방위와 중심점을 더한 숫자로 9는 중심을 상징한다. '삼중의 여신'에서 삼중이란 3의 세제곱을 의미한다. 9인의 켈트 처녀, 9개의 흰 돌로 브리지트 여신의 시중을 드는 아홉처녀를 나타낸다. 9는 '벨테인 불의 축제'와 연관된다. 의식에서 9명씩 9번, 총 81명이 참가한다.

    중국 모든 숫자 중에서 3x3은 가장 길(吉)한 숫자이며, 9는 하늘의 힘을 나타낸다. 9는 명당에서처럼 8가지 방위와 아홉번째 점으로서의 중심을 나타낸다.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구법(九法)1), 구관(九官)2)을 뜻한다. 정전법(井田法)에서는 토지를 우물 정자 모양으로 아홉 구획으로 분할했다. 이때 중심에 있는 토지는 아홉번째 토지로서 최고 지배자인 상제에게 바쳤고, '신의 토지'라고 했다. 이 토지는 '공전(公田)'이라고도 불렀는데, 그것은 천자가 천제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풍수에서도 지관이 용혈(龍穴)을 찾으면 그 구멍 앞에 있는 공간(명당)을 9분할한다.

    1) 주나라 무왕에게 기자가 답했던 아홉가지 큰 법. 오행,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懲), 오복(五福)
    2) 고대의 관제에 따른 아홉 명의 대신. 사공(司空), 황직(皇稷, 농경), 사도(司徒, 교육), 사(士, 형벌), 공공(共工, 공업), 우(虞, 산림), 질종(秩宗, 제사), 전악(典樂, 음악), 납언(納言)을 뜻한다.


    기독교 기독교의 상징체계에서 9는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천사에는 3계급씩 3조, 즉 아홉 위계가 있다. 하늘에는 아홉 천구, 지옥에는 아홉 환도(還道)가 있다.

    이집트 이집트에는 아홉 신1)이 있다.

    1)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신에는 아톤(Aton, Ra), 슈, 테프누트, 게브, 누트,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 네프티스가 있다.

    그리스, 로마 아홉 신, 후에는 9명의 뮤즈를 나타내는 숫자다.

    유태교 9는 순수지성을 나타낸다. 9는 그 배수로 다시 9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진리를 뜻한다. 카발라에서 9는 10단계의 세피로스에서 아홉번째인 '이에소드(토대)'를 상징한다.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의 성수다. 9의 제곱은 81개의 사각형으로 이루어지는 만다라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우주를 형성하고, 우주를 포함한다.

    마야 명계는 9층으로 나뉘어 있고 각 층을 다스리는 명계의 주인이 배치되어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 9는 다른 모든 숫자가 그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순환하는 것으로 숫자의 한계를 나타낸다.

    북유럽 오딘 신은 인간을 위해서 지혜의 비밀을 손에 넣으려고 아홉 낮, 아홉 밤 동안 '이그드라질'에 매달려 있었다. 북유럽의 페르세포네라고 불리는 눈(雪)의 여신 스켈디는 1년 중 3개월은 산 속에서, 9개월은 니오르드(항해, 교역의 신)의 바다에서 산다. 북유럽과 게르만의 상징체계에서 9는 성수(聖數)다.

    10

    10은 우주를 타나태는 수, 창조의 패러다임이자, 모든 수를 포함한다. 따라서 모든 사물과 모든 가능성을 상징한다. 10는 모든 계산의 기본이 되는 숫자, 10진법의 전환점이 되는 숫자다. 10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법, 질서, 지배를 상징한다. 테트라크티스(tetraktys) 형(1+2+3+4=10)은 신성(神性)을 상징한다. 이 경우 1은 점, 2는 선, 3은 면, 4는 공간을 나타낸다. 10은 완전수로 1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10은 양 손의 열 손가락을 기초로 나온 숫자이며, 완성, 모든 계산의 기본을 나타낸다. 또한 보다 높은 범주의 완전성으로서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토대가 되는 숫자다. 또한 중국에서 만(萬)은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하고, 현현 세계 전체를 뜻한다. 10은 여행의 완성을 나타내며 기원으로의 회귀를 뜻한다.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는 9년간 방랑을 하고 10년째에 고국으로 돌아갔다. 트로이는 9년간 포위를 견디다가 10년째에 함락되었다. 10은 원주를 둘러싸는 9와 중심을 나타내는 1의 합으로 나오는 숫자로 완전성의 상징이다. 우주축으로서의 1과 그 주위를 돌며, 춤추는 9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서아시아 봄 축제에서 10일째에는 신상들을 모두 등장시켜 행렬을 지어 축하한다.

    중국 10은 한자로는 종횡의 길이가 모두 같은 '십(十)'으로 나타낸다. 이것은 음과 양이라고 불리는 두 방향을 향하고 있는 자신을 상징한다. 통설로는 동서를 뜻하는 ㅡ와 남북을 뜻하는 |이 모두 갖추어져 완전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십간(十干)에 12지를 배합해 모두 60가지 조합으로 연월일을 표시한다.

    기독교 10은 모세의 십계를 나타내는 숫자다. 10개의 등불, 10인의 처녀, 10탈란트 등의 비유에 나오는 숫자다. 신에게 바치는 1/10세(십일조)다.

    그노시스 주의 충일의 세계, 이이온의 로고스(말씀)와 조에(命)에서 다시 10개의 아이온이 나왔다.

    유태교 카발리즘에서 10은 '영원세계'인 요드(히브리어 알파벳의 열번째 문자), 신(神)(요드 헤 바브 헤, YHVH)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문자에 대응하는 숫자이며, 눈부신 지성, 신의 지원, '십계', '세피로스'의 말후트(국왕), '신'의 10개의 이름을 뜻한다. 또한 카발라에서 10은 절대무에서 흘러나오는 '세피로스'의 수다. '세피로스'는 대개 '생명의 나무'에 의해서 상징되는데, 열 개 중의 첫번째 것이 모나드, 즉 다른 압홉 개의 '제1원인'이다. 또한 나머지 아홉 개의 '세피로스'는 각기 남, 녀, 그리고 둘을 통일시키는 지성의 '삼위일체'의 3가지로 구성된다. 열번째의 아도니(adoni)는 통일성으로서의 신비적 회귀를 상징한다. 솔로몬 신전에는 10개의 커다란 사제 목욕용 대야, 10개의 식탁, 10개의 촛대가 있다. '계약의 궤' 앞에는 10명의 레위 인 사제가 있다.

    힌두교 10보다 큰 범주들, 즉 백(百)과 천(千)은 힌두교 우주론의 기반을 이룬다.

    이슬람교 이슬람법에서 10분의 1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피타고라스 학파 10은 '모나드'를 나타낸다. 10은 완전의 상징이다.

    로마 로마 숫자에서 10은 X(완전한 숫자)로 완성의 상징이다.

    11

    11은 죄, 과실, 위험을 나타내는 수로 10이 완전과 법을 상징한다면, 11은 둘을 모두 넘어서는 것을 나타낸다.

    12

    12는 완전한 주기, 우주 질서를 상징한다. 3x4(3은 신, 4는 인간)로 이루어지는 12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양쪽의 질서, 밀교(密敎)와 현교(縣敎) 양쪽을 의미한다. 12는 '황도십이궁'과 1년 12개월을 나타내는 숫자며, 12를 나타내는 동물들은 자웅 각각 6마리씩이다. 12는 주야의 시간수, 우주수의 과실의 숫자 등이다. 로마의 농신제에서 세계계가 혼돈으로 회귀해서 죽은 자들이 이 세계로 돌아오는 때는 동지 전후 12일간이다. 또한 동지제 '율(Yule)'과 크리스마스 축제도 12일간 행해진다. 이와 비슷한 축제로는 베다 시대의 인도, 중국, 그리스, 유럽의 전통 문화에서 발견된다. 이 축제 12일간의 기후는 이듬해 12개월간의 기상 패턴을 예상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고대 서아시아 '혼돈'과 '질서' 사이의 전쟁은 12일간 계속된다.

    불교 달라이 라마의 회의는 12인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다.

    켈트 칼 대제의 12인의 용사, 아서의 원탁의 기사는 모두 12명이었다.

    중국 십이지의 숫자.

    기독교 12년 '성령의 열매1)'의 숫자. 이스라엘의 부족과 예수의 12사도를 나타내는 12개의 별, '성도'의 문과 초석의 숫자다. 크리스마스 시즌은 12일간이다.

    1) 사랑, 기쁨, 평안, 관용, 친절, 선의, 성실, 온화, 자제, 인내, 겸허, 정결

    이집트 태양신 라가 밤 동안에 시간을 보내는 명부에는 12개의 문이 있다.

    그리스, 로마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올림포스 산의 신과 여신들의 숫자는 열둘이다. 시인 헤시오도스는 열두 명의 티탄 거신족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또한 12는 로마의 '12동판법'의 동판의 숫자다. 로마의 농신제는 12일간 계속된다.

    유태교 '생명의 나무'의 12개이 열매, 천도의 12개의 문, 신전의 식탁에 놓여 있는 12개의 빵, 아론의 흉패의 열두 개의 보석, 야곱의 열두 자식을 족장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12부족'을 나타내는 숫자다.

    헤르메스 1년 12개월과 12가지 고통을 나타내는 숫자다.

    이슬람교 초대 이맘(imam)인 알리와 열한 명의 자손이 낮 12시간 동안을 다스렸다.

    미트라교 신 미트라스는 열두 명의 제자를 가졌다.

    로마 제례에는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대신관) 뒤에 열두 명의 폰티펙스(일반 신관)이 뒤따른다.

    13

    기독교에서 '테네브레(tenebrae)'1)에 쓰이는 촛대는 13개(보통 15개)로, 의식에서는 촛불을 하나씩 끈다. 이때 차차 실내가 어두워지는 것은 예수의 죽음으로 지상이 어두워짐을 상징한다. 13은 가롯 유다가 예수와 12사도와 함게 있을 때의 숫자로 불길한 숫자다. 또한 마녀 집회에서 마녀들의 숫자다. 마야 문명에서는 13개의 하늘이 있고, 그 하늘을 다스리는 13명의 신이 있다. 마야의 단력(短曆)에서는 1개월(위나르)이 20일, 13위나르가 1년이다. 또한 장력(長曆)에서는 13박툰(1박툰은 144,000일)을 주기로 세계의 파괴와 재생이 이루어진다고 생각되었다. 13은 또한 점에도 사용되는 숫자다.

    1) 성주간(聖週刊). 부활절 직전의 1주일간.

    20

    손가락과 발가락 숫자를 모두 합치면 20이 된다. 따라서 20은 인간 전체를 상징한다. 또한 스코어(score)로서 수를 세는 단위이기도 하다.

    40

    40은 시련기간, 시험, 아니시에이션, 죽음을 뜻한다. 4의 10배에 해당하는 수로서 40은 완전무결, 완전성의 상징이다. 40일이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바빌로니아에서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보이지 않는 기간(바람, 홍수, 태풍 등의 위험이 일어나는 시기)이 40일간이었던 데에서 비롯된다. 플레이아데스 성단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는 환희의 시간이며, 마력이 지배한 40일간을 나타내는 40개의 갈대다발을 불에 태웠다. 로마 제국의 검역정선기간(quarantine)이라는 말은 전염병이 도는 선박을 40일간(quadraginta) 격리시켜 상륙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페르시아, 고대 시리아의 바알벡(그리스에서는 헬리오폴리스), 타타르 지방에 있는 신전들, 드루이드 교의 신전, 예언자 에스겔의 신전에는 40개의 기둥이 있다.

    기독교 사순절 40일간은 예수가 황야에서 40일간 고통을 당한 기간이다. 부활절에서 승천 축일까지의 부활기간은 40일이므로 40일은 특별한, 성스러운 의미를 가지는 기간이다. 윈체스터의 성 스위딘 기념일(7월 15일)에 비가 내리면 40일간 악천후가 계속된다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머문 기간, 엘리야의 은둔, 대홍수, 요나가 니느웨 주민들에게 준 경고기간은 모두 40일이었다. 유태인의 황야의 방랑, 블레셋인이 유태인을 지배한 기간, 다윗의 통치기간, 솔로몬의 통치기간, 예언자 엘리의 이스라엘에 대한 재판 등은 모두 40년이었다. 예언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40일간 인내한다.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이 죽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40일간이 단식기간이다.

    이슬람교 40은 변화와 죽음의 숫자이면서 동시에 화해와 원칙복귀의 숫자이기도 하다. 무하마드는 40세에 이르러 알라 신으로부터 아라비아 백성들에게 전도할 소명을 받게 된다. '코란'은 매 40일마다 반드시 읽도록 되어 있다. 통설로는 30일마다 코란을 읽는다.

    미트라교 이니시에이션 의식, 축제를 뜻하며, 제물을 바치는 기간이 40일간이었다는 설이 있다.

    50

    49(7 x 7)년의 주기가 끝난 다음의 50년째는 대년(大年, great year) 또는 환희의 해(jubilee)로 불리며, 출발점, 원초로의 회귀, 재출발 등을 상징한다. '올림피아 경기 대회'는 대음월로 50개월, 즉 4년에 한 번씩 개최되었다.

    60

    1시간은 60분, 1분은 60초다. 60은 20(스코어)의 3배로 '나머지가 없는 숫자'다. 아이슬란드 전설에서는 60이라는 숫자가 자주 등장하고 이집트에서는 장수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60년은 1주기, 60세는 환력(還曆, 환갑)이다. 서양에서는60년을 중국의 주기(cycle of cathay)라고 부른다. 십간과 십이지의 조합으로 60년의 한 주기가 완성되고, 다시 새로운 주기가 시작된다. 60일의 주기가 6번 되풀이되면 티퍄력으로 1년이 된다.

    70

    유태교의 상징체계에서 메노라(Menorah)의 70개의 가지는 일곱 행성으로 이루어진 황도대의 각각을 열로 나눈 '십분각(十分角)'의 집합이고 70년은 인간의 수명으로 정해진 연수다.

    666

    666은 '짐승의 수'인 동시에 좌천사(座天使) 하같리엘의 성수(聖數)다. 기독교에서 666은 '짐승의 표시'이며 적(敵) 그리스도의 상징이다. 카발리즘에서는 대천사 미카엘(Michael)에게 적대하는 태양의 악마 소라트의 숫자다. 666은 태양에 속하는 수로 태양을 나타내는 사각형의 합계이며 신성(神聖) 기하학의 기본 수다.

    888

    히브리어의 알파벳에서 짐승을 상징하는 666에 대하여, 888은 예수를 상징하는 성수(聖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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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倒敍)추리란, 범인 쪽에서 주도면밀한 범죄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을 그린 뒤, 완벽하게 여겨졌던 범행이 뜻밖의 헛점으로 인해 폭로되는 과정을 그리는 형식을 말한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범인이 누구이며 범행 방법은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지만, 이 형식에서는 그러한 점를 먼저 밝힌 뒤 그 과정에서 범죄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묘사하여 독자에게 긴장감을 제공한다.

    도치서술형(倒置敍述形),흔히 도서추리라고도 한다.

     

    살인자의 눈으로

    1.

    퍼즐 미스터리는 수학적인 문학입니다. 순수한 퍼즐 미스터리는 수학의 방정식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요. 진정한 퍼즐 미스터리의 독자는 생각없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작가가 만들어놓은 복잡한 미스터리에 그냥 빠지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정한 이 가상의 독자는 노트와 연필을 들어 틈틈히 알리바이 도표를 만들고 동기를 찾고 거짓말을 추리해냅니다. 소설이 진상을 향해 접근하면 할수록 독자의 노트북도 그만큼이나 빽빽해집니다. 추리 문학은 진정한 인터액티브 문학입니다. 그러기 위해 컴퓨터나 하이퍼 텍스트의 도움도 필요 없죠.

    그러나 퍼즐 미스터리는 곧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공식적인 플롯의 끝도 없는 반복이었습니다. 모든 퍼즐 미스터리는 누가 썼건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공식을 따릅니다. (1) 범죄가 일어난다(장편의 경우 보통 살인이죠.) (2) 명탐정이 등장하고 증거들이 제시된다. (3) 모든 증거들이 제시되면 탐정은 용의자들이 잔뜩 모인 곳에서 추리 과정을 설명한 뒤 범인을 지목한다.

    애당초부터 공식으로 시작한 문학이 공식적인 플롯을 반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불만은 남습니다. 이 다양성의 부족을 어떻게 해결할 수는 없을까요?

    최초의 중요한 반항은 1912년에 일어났습니다. 일을 저지른 사람은 의사 출신의 추리 작가인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 Richard Austin Freeman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과학자 탐정인 손다이크 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일련의 추리소설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노래하는 백골 The Singing Bone]이라는 단편집으로 이 작은 장르에 도전을 했던 것입니다.

    이 단편집의 첫 작품인 [오스카 브로드스키 사건]을 보죠. 이 단편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사일러스 히클러라는 범죄자가 오스카 브로드스키라는 보석상인을 살해하고 보석을 강탈합니다. 두번째 부분에서는 우리의 손다이크 박사가 등장해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해 범행 과정을 밝혀냅니다.

    프리먼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범인을 감추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인 추리 소설에서 범인을 미리 밝히면 도대체 독자들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러나 프리먼의 도전은 보기보다는 온화했습니다. 그는 공식을 때려부수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다른 종류의 퍼즐 미스터리를 만들었을 뿐이죠. 미스터리는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단지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문제는 범인이 누구냐가 아니라, 범인이 어떻게 잡히느냐였습니다.

    [오스카 브로드스키 사건]은 그런 면에서 아주 충실합니다. 범행 과정이 냉정하게 서술되는 동안 프리먼은 힝클러의 정체를 밝힐만한 증거들을 하나씩 하나씩 떨어뜨립니다. 물론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손다이크의 방식은 지극히 과학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들한테까지 아주 공평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공평함의 모양은 잡힌 셈이죠.

    그러나 프리먼의 새로운 공식은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만들기가 훨씬 어렵다는 것입니다. 크리스티의 소설들을 보세요. 포와로나 미스 마플은 언제나 범인을 밝혀내지만 늘 증거까지 찾아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너무나도 많은 사건에서 함정과 자백과 협박과 자살에 의지합니다. 심지어 프리먼 자신도 이 공식으로 성공적인 작품을 양산하지 못했습니다. [노래하는 백골]에 수록된 다섯 작품들 중 그의 새 공식(우린 이를 도서추리소설 inverted mystery이라고 부릅니다)을 적용한 작품은 겨우 세 편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순수한 퍼즐 미스터리로 기능하는 도서추리소설 장편은 별로 없습니다. 단편에서는 꽤 많이 사용되고 [콜롬보]나 [바나비 존스]와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들이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요.

    2.

    창조물은 창조자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창조자 프리먼은 퍼즐 미스터리의 변형을 만들었을 뿐이지만, 도서추리소설은 점점 엉뚱한 분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프리먼의 후배들은 이 장르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도서추리소설로 흥미진진한 퍼즐 미스터리를 만드는 건 정말 어렵습니다. 하지만 도서추리소설로 흥미진진한 '문학 작품'을 만드는 건 비교적 쉽고 결과도 좋습니다.

    이제 도서추리소설은 '범인이 어떻게 잡히느냐'는 목적에서 벗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범인의 심리를 어떻게 기술하느냐였습니다. 프랜시스 아일즈 Francis Iles (제가 별로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지만)는 [살의 Malice Aforethought]에서 살인범 비클리 박사가 어떻게 잡히느냐 따위는 관심도 없습니다. 그는 비클리 박사의 범죄 과정을 쫓으며 사디스틱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 뒤로 수많은 작가들이 등장합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 Patricia Highsmith나 루스 랜델 Ruth Randell과 같은 작가들은 이 무시무시한 장르로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금해집니다. 과연 이것이 추리 소설인가요? 이건 그냥 정통 문학 작품이 아닌가요? 루스 랜델의 [A Dark-Adapted Eye]는 정말 훌륭한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추리소설입니다 (물론 정말 도스토예프스키가 추리작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까지 생각해야할까요?)

    3.

    퍼즐 미스터리가 이제 죽은 장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지금도 앤 페리 Anne Perry, P.D. 제임스 P.D. James, 그리고 아까 언급한 루스 랜델과 같은 작가들이 훌륭한 퍼즐 미스터리들을 쓰고 있습니다. 적어도 영국에서 퍼즐 미스터리는 여전히 훌륭하게 살아 있는 장르입니다.

    챈들러와 해미트의 영향 아래 터프 가이들과 폭력, 섹스가 부글거리는 듯한 미국 추리 소설계에서도 여전히 퍼즐 미스터리는 쓰여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런 소설들이 주류로 옮겨가는 건 좀 힘든 모양이지만요.

    그러나 그런 소설들도 전성기의 퍼즐 미스터리의 순수함은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루스 랜델의 웩스포드 경감 시리즈는 퍼즐 미스터리의 모양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미스터리만큼이나 캐릭터와 심리 묘사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미스터리도 예전에 크리스티가 썼던 복잡하고 인공적인 추리 게임과는 거리가 먼, 비교적 자연스러운 것들입니다.

    모두 훌륭한 소설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잃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퍼즐 미스터리의 가치는 도서추리소설들이 제시한 '문학성'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 장르의 진정한 가치는 현실성보다는 비현실성과 철학성에 있었습니다.

    퍼즐 미스터리가 진정한 '문학'으로 가야했다면 이 장르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을 따라가야했습니다. 추리 소설이 겉으로 드러난 '문학성'과 '오락성'을 따라가는 동안 우리는 문학 사상 가장 흥미로운 장르를 잃어버렸습니다. (99/11/16)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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