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1. 옷의 성, 정신의 그림자

 

1990년대 이전에는 성(sexuality)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미인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속 보이게 드러내놓고 칭찬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끝까지 무관심한 척할 수도 없었다. 북실북실한 털이나 두꺼운 입술을 지닌 능글맞은 호색한으로 취급받을 위험함과 힘없는 노인네나 답답한 어린애로 취급받을 억울함 사이에 어떤 화해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야박함이 성을 더욱 안으로 멍들게 하고 곪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은 미인 아닌 여자가 없다. 마치 허물 벗은 별당아씨처럼 모든 여자들은 비슷하게 예쁘다. 그런 미인과 연관된 성 자체도 박씨부인처럼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놓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주로 활동하기 시작한 소위 신세대작가들도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도덕은 결국 스페어 타이어 같은 것이다. 기존의 것이 닳아버리거나 구멍이 나면 언제나 갈아끼울 준비가 되어 있다”거나 “나는 처음부터 처녀가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사랑 앞에서 언제나 처녀일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순결이었다”(김별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연인이 없냐는 질문에 “섹스파트너라면, 사실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연인은 없어요. 별로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안 들어요”(배수아, 「천구백팔십팔 년의 어두운 방」)라고 무감각하게 대답한다. 심지어는 “애를 뗄 때는 반드시 더치 페이할 것”(백민석, 「사랑의 고통」)을 요구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성을 가지고 예술사를 쓴다면 “고전주의:SEX(정상체위), 낭만주의:구강 혹은 항문, 리얼리즘:포도균성 요도염, 모더니즘:레즈비언 혹은 게이, 포스트모더니즘:AIDS”(박청호, 『푸르고 흰 사각형의 둥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별당아씨는 과연 허물을 완전히 벗었는가. 혹시 사람들은 성의 옷만 보고, 그 속의 피부는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피부를 보았더라도 성은 그 피부를 파열시켜야 하는 것인데, 신세대들의 피부 자체가 그러기에는 너무 두꺼운 것은 아닐까. 활짝 피어나는 목련꽃처럼 성 담론 자체는 맨 얼굴을 드러내면서 노골화되고 과격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그 흰꽃이 땅으로 떨어지면 검게 짓이겨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훼손되지는 않을까. 지나치게 옷을 벗으면 그 벗음 자체가 오히려 억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사실들에 대한 의문과 실체 없이 떠도는 신세대문학에 대해 구체적이고 풍부한 텍스트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신세대문학과 성의 결합을 시도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 생긴 모자라는 자식이 바로 이 글이다. 신세대문학과 성에 대한 담론은 이합 하산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서투른 신조어에서 무책임한 상투어”라는 용어와 동궤의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문제삼는 신세대문학과 성에 대한 서투르고도 무책임한 본질 규명은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 등의 사실이다. 이 글은 이런 고정관념들을 뒤집어봄으로써 여전히 신세대문학의 육체가 정신의 반대급부가 아닌 그 부속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정신은 복화술사처럼 자신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육체를 조정하고 있다. 때문에 신세대들의 육체는 날이 바뀌면 양지로 바뀌는 정신의 ‘그늘’이 아니라 밤이 되어야만 나타나고 영원히 빛은 될 수 없는 정신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육체를 통해서도 강화된다. 신세대들은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육체를 노출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와 성은 밀월관계가 아니라 냉전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옷을 벗었지만 그래도 몸이 드러나지 않는 성 담론의 딜레마나 신세대문학이 그려내는 성의 성감대를 알아볼 수 있다.


2. 반성(反性)의 성, 사회의 그림자


우승제와 박성원, 백민석의 소설은 사회적 억압과 성적 억압을 병치시켜 그런 억압을 조장하거나 양산하는 권력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성 자체를 가장 본능적인 욕구로 생각하면서 그런 성적 욕망을 좌절시키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리비도와 정치가 상호 침투한다는 이런 사유의 기저에는 성이 어느 시대에도 그 자체로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본래의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성에 반대되는 현재의 부정적이고 억업적인 반성(反性)을 반성(反省)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사회의 과잉 억압과 실행 원칙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이 자유로운 에로스의 구가이고, 그것을 통해 특정한 역사적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영원한 인간성의 획득이 된다.


우승제의 『열려라, 방』은 “나는 다 필요없어. 단지 그녀와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아주 비밀스럽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 좌절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의 ‘나’와 ‘그녀’는 마레크 플레스코의 소설 『제8요일』에 나오는 아그네시카와 피에트레크가 벽이 있는 세 평의 방을 찾아 공산주의 지배하에 있었던 바르샤바를 헤매고 다니듯이 둘이 함께할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제8요일에나 가능하다.


『열려라, 방』에서의 ‘나’와 ‘그녀’는 “이쪽 도시”와 “저쪽 도시”로 양분되는 사회 어느 곳에서도 그들만의 방을 마련하지 못한다. “이쪽 도시”에서는 “창호지 같은 판자벽” 때문에 섹스 행위조차 공동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느닷없이 침입하는 혁명가 집단 때문에 항상 조루나 발기불능의 증세를 보이고, ‘그녀’ 또한 불안해서 언제나 오르가슴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무조차 부르주아적인 발상이 된다. 그런데 “이쪽 도시”를 위해 혁명을 정당화시키는 글을 쓰던 ‘나’는 혁명을 무화시키는 글을 쓰면서 “저쪽 도시”로 편입된다. “저쪽 도시”에서 원하는 글은 “체면의 상실, 최대의 소비(정액까지도), 무조건 상품화”라는 3대 원칙에 충실한 글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육체적 조루나 발기불능이 아닌 정신적 조루나 발기불능 증세를 보이게 된다.


이처럼 우승제의 『열려라, 방』은 온전한 오르가슴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을 고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나’는 “성기와 내 주변관계와는 어떤 질긴 끈이 있길래 내 주변적 상황에 의해 발기를 했다가, 조루가 됐다가, 이렇듯 발기불능이 되어버리는 것일까”라며 한탄하고 있다. ‘열리지 않는 방’은 이런 ‘닫혀 있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은유이고, 이런 은유로 인해 이 소설은 성애소설이자 풍자소설이 된다. 권력의 억압에 대항하는 반권력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박성원의 「라이히 보고서」 「해뜨는 집」 「이상(異常)·이상(李箱)·이상(理想)」 등은 자본이나 제도와 연관된 권력에 의해 왜곡된 성을 통해 성 자체의 순수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 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김해경 혹은 이상(李箱)으로서, 그들을 통해 작가는 “사회·정치·경제적 혁명이 없이는 성의 만족은 없다”라는 빌헬름 라이히의 명제를 확인시킨다. 박성원이 라이히에 기대어 말하고 싶은 것은 금전 경제학이 정액 경제학과 만나는, 즉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결합되는 프로이드적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들 소설은 모두 성적인 쾌락에 대한 두려움이 심리적인 병을 일으키므로 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반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면서 보다 건강한 성 생활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상의 1990년대적 화신에 해당하는 ‘나=그=김선생’을 통해 박성원은 그가 “섹스에 미친 병자”가 아니라 “이상한 이상에 대한 이상”을 지닌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섹스에 대한 탐욕이 존재 자체의 본질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연심=본래의 성’을 탐하지 못하게 하는 “악마적인 안타까운 현실성” 때문에 ‘나’와 ‘그녀’는 자포자기적이고 허무한 섹스를 나눈다. 이때 ‘나’는 그런 모습에서 “섹스에 미친 패인(敗人)을 자처하는, 무지개같이 파장이 분열된 폐인(廢人) 같은” 1990년대판 이상의 원형을 발견한다.


이처럼 박성원의 소설에 나타나는 성은 가장 인간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본능성으로 인해 굴절되고 왜곡되어 있는 기형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박성원은 타율성과 자율성, 왜곡과 순수, 억압과 해방, 권력과 저항 사이에 놓인 성 담론의 가파른 경계선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그는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성을 통해 악마적인 현실을 극복할 힘을 기르려 한다. 이렇게 볼 때 성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박성원은 유물론자이고, 그런 물질적인 성을 통해 영혼의 치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다시 유심론자가 된다.


백민석은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동성애를 발기부전이나 변태의 이형태(異形態)로 간주하면서 비정상적이고 일그러진 성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백민석이 다른 이성애주의자들과 다른 것은 그런 동성애를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동성애는 이성애로 가기 위한 성, 음울한 시간들을 견디기 위한 성, 시대적 억압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기 위한 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형적 성에 환멸적인 시대와 세계를 담음으로써 시대나 세계가 비정상적이기에 성 또한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동성애의 배경으로 입시 지옥이나 전교조, 지강헌 사건, 김귀정이나 이한열의 죽음 같은 역사적 사건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교조 1세대로서 “호모가 아니면 발기부전, 아니면 변태”일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본격적으로 1990년대로 진입하여 도달한 곳이 바로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에서 개최하는 세기말 콘서트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믿거나말거나박물지젤라틴풀장”은 수간(獸姦)이나 항문섹스, 오랄섹스, 동성애가 판치는 난교파티장이다. 왜 이런 충격적인 성을 묘사하는가?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런 권태는 어디서 오는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세상이 평화로운가? 오히려 환멸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성은 세상에 대한 분노나 저항을 내장한 위험스런 폭발물에 다름아니다.


백민석이 보기에 세상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것들로 꽉 찬 불가사의한 괴물이다. 그런 세상에서의 삶은 당연히 소풍이 아니라 유배이다. 그런데도 그런 폭력성을 숨기면서 교묘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세상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부도덕한 포르노로 오해받을 위험조차도 감수한다. 어차피 오해되건 이해되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그는 절망적인 유희를 계속한다. 심각함이 지나치면 유희가 된다. 그래서 이런 일탈적인 성 자체가 백민석에게는 이 세상을 견디는 “은밀한 장난감”이다.


백민석은 말한다. 자신이 묘사한 성은 일그러져 있다고. 그래서 그걸 보고 야하다거나 외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정말 변태라고. 자신이 진정 원한 것은 그런 성이 야기시키는 불편함이라고. 그 불편함이 반성을 촉구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학과 피학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헐벗고 왜곡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 성마저 만들어낼 수 있는 현실적 상상력이다. 성난 성은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이때 느끼는 공포가 바로 백민석이 원하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승제와 박성원, 백민석은 현실의 성에 저항하는 성을 통해 성다운 성을 환기시키면서, 성을 성답게 만들지 못하는 권력을 비판하는 작가들에 속한다. 그들의 소설에서는 사회적 억압을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성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육체적인 성을 다루고 있지만 그 성을 통해 정신을 문제삼는다고 할 수 있다. 정신 자체가 육체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소설의 인물들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발기불능도 되고 오르가슴에도 도달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소설에 나타난 정신과 육체는 이원론적 일원론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함수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육체가 좌우된다고 봄으로써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정신주의자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근성(近性)의 성, 가족의 그림자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나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보면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출생을 기형적이고 슬프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모의 상반신은 흰 시트로 가려져 있어 그 표정을 알 수 없으며, 아이는 머리가 축 늘어진 채 힘겹게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산모 머리 위의 마리아상은 단검에 맞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을 낳아줄 어머니는 죽었다. 그래서 혼자 태어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없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혼자 태어났기에 그들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미련이 크기에 그들은 남아 있는 가족끼리도 섹스를 한다. 이런 성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대로 된 성은 아니지만 온전한 성이 되려고 하거나 성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근성(近性)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성은 가족 같은 연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가족이 남처럼 간주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가족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이때의 근친상간적인 섹스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부재할 때에나 가능한 슬프고도 위험한 것이다.


특히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에게는 가족다운 가족이 없다. 그들에게 더이상 가족은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을 새롭게 만들거나 차라리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섹스한다. 가족을 너무 사랑하거나 지독하게 증오해서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가족과의 섹스는 이런 사랑과 증오를 배설하는 행위이다. 배수아는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했기에 더욱 가족을 추구하고, 이응준은 자신을 거부한 가족을 스스로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한다. 조경란은 운명처럼 주어진 가족을 인내하려 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속살이 가족이고, 가족의 피부가 사회가 된다.


배수아의 『랩소디 인 블루』에서 미호가 자신의 친오빠와 섹스를 하는 것은 그녀가 가족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오빠는 오빠가 아니라 그저 “관심을 가져주는 다정한 사람”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오빠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이자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남자이다. 이런 오빠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기 그녀는 오빠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녀가 이렇게 가족에 집착하는 이유는 “난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서는 결국은 모두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라도 자신의 몸 속에 가두고 싶어한다.


이런 가족에 대한 성적인 이끌림이 『부주의한 사랑』에서는 더욱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나’의 친언니이자 사촌인 연연이 이모부를 연인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친동생인 ‘나’나 이모부의 가족으로부터 떠나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이모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아버지가 없었던 그녀는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사랑하게 된다. ‘나’ 또한 사촌지간인 택이와 운이 모두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가 유부남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택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가족애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러고 있으니 마치 정말로 그가 나의 사촌처럼 느껴졌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언제나 생각나는 나의 사촌”이라는 고백은 연인이 아닌 가족에 대한 갈구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녀는 보호와 안정감을 줄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지 성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밖에 ‘나’의 사촌인 미진이 ‘나’의 애인이었던 철희와 사귀는 것(「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나 아버지가 이모와 사랑을 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는 것(「프린세스 안나」)은 모두 뿌리가 흔들리는 존재들의 불안한 내면을 보여준다. 현실은 가족처럼 난공불락이기에 바꾸거나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니 성 또한 그런 현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의 삶은 다르지 않다는 운명의 회귀성이나 불행의 지속성 때문에 그녀는 가족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가족에서 가족으로 유전되는 병이 바로 외로움이나 결핍감이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잘 알아본다.


그들이 이처럼 부도덕하고 부주의한 근친상간적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세상 모든 인간들이 사생아나 고아이기에 인위적으로라도 가족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버려진’ 존재들이고, 배수아에게는 이런 유기(遺棄)가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쁜 존재들이 강렬하고 치열하게 나쁜 섹스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근친상간적인 섹스는 가벼움과 무감각성의 기호가 아니라 외로움과 두려움의 기호이다. 고아처럼 자신들을 방기한 부모나 형제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발짓이 아니라 그들을 재발견해서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손짓이다. 그런 성은 다른 사람은 없고 가족밖에 없기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라는 점에서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부주의한 성은 그것 이외의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오는 상처와 폭력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배수아가 머무르고 싶어하는 아이(homme-lette)의 상태는 오믈렛(hommelette)과 비슷한 존재이다. 형태가 없는 계란 덩어리처럼 어린아이는 비정형상태로서 아무런 경계나 의식, 욕망을 모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결핍 또한 모르는 상태이다. 배수아는 이런 상태를 지향한다. 오믈렛은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며, 우유도 아니고 계란도 아니다. 그녀는 이런 오믈렛처럼 거울을 보기 전,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자각조차 생기기 이전의 유아처럼 유모차에 앉아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은 것이다. 자아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가족의 보살핌을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거울조차도 필요 없다. 이런 그녀의 섹스는 아이로 남아 있기 위한 구순기적 욕망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미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 깨어진 계란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머니의 양수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상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이 현실은 어머니의 품속으로의 회귀를 용납하지 않는다. 배수아와 달리 이응준은 이런 자궁회귀의 불가능성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아버지 같은 현실을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응준의 소설에 나타난 성장의 의미이다. 이런 성장을 해야 “묘지 같은 세계에서의 유령 같은 삶”(『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배고픔처럼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나’가 고아 출신의 식모인 무리누나에게 첫사랑을 느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여자임과 동시에 어머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나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에서 꼽추인 친구가 자신의 굽은 등의 마디마디를 어루만져주는 여자들을 보면서 “창녀들에게선 어머니 냄새가 나”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어머니 같은 연인을 위한 말들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엄마 말 잘 듣는 애처럼”(「그 시절을 위한 잠언」) 어린 창녀의 요구에 따라주기도 한다.


세상을 알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모르면 성장할 수 없다. 이응준의 소설에서는 불행을 알게 하는 성장의 촉매로서 가족과 성이 등장한다. 가족은 세상의 속악함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그런 가족의 속악함은 일그러진 성관계에 기원을 둔다. 때문에 이응준의 소설 속에 나타난 근친상간적인 사랑은 배수아의 소설에서처럼 소외를 극복하면서 합일을 추구하려는 성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서 추악함을 발견하게 되는 모멸과 치욕의 성이다. 이응준은 부모를 통해 그런 성을 경험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극복하는”(「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것임을 알게 된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한 식구가 된” 가족의 슬픈 사진이 찢겨 있다. ‘나’는 열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미 그 왕국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적자(嫡子)인 인하형은 탐욕스럽고 권력지향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우아하고 고상한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 이런 구도이기에 이 소설 속의 가족관계는 다음처럼 재편(再編)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억압적인 부성 원리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버지와 생모이다. 젊고 아름답지만 천박한 생모는 아버지를 닮은 또다른 아버지이다. 그리고 합일적인 모성원리를 대변하는 인물이 인하형과 인하형의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아름다운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유미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인하형은 불쌍하게 죽어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와 ‘나’의 생모에 대한 복수를 단행한다. 형의 침대에 같이 있는 생모를 보면서 나는 보고 싶지 않은 생과 성의 이면을 보게 된다. 인하형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지 못하게 한 것은 부도덕한 아버지 때문이고, 그가 스스로 악과 추함이 되어 복수를 하게 만든 것도 패륜적인 세상 때문이다. 이런 더러운 성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진흙탕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에 대해서는 가해자이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패배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이보다 덜 충격적이지만 성장의 계기로서 부모의 성이 등장하는 또다른 경우가 「아이는 어떻게 숲을 빠져나왔는가」이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는 오래 앓았던 아버지가 죽자 삼촌과 결혼한다. ‘나’는 아픈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랐었기에,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마저 중동에서 낙사(落死)했기에 더욱 죄책감을 느낀다. 더욱이 삼촌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아름답고 추함에 의해 세상의 희망과 혼돈을 가늠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나’의 미의식의 진원지였다. 이런 속물 아닌 사람의 죽음을 통해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결코 오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 삶이란 “비슷한 몸무게를 지닌 고통과 환멸이란 두 사내가 타고 노는 녹슨 시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들의 성과 죽음이 그를 성장시킨 것이다.


조경란에게는 가족을 견디면 세상을 견딘 것이 된다. 가족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동성은 가족 밖으로의 움직임에 대한 생래적인 두려움을 내장하고 있는 식물적 정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소설들보다 그녀의 소설에는 운명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운명성은 스스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더욱 강화된다. 조경란은 굳은살이나 사마귀, 겨드랑이털처럼 가족을 달고 다닌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조경란의 소설에 나오는 가족의 실체이다. 또 조경란에게 있어 가족은 식빵이기도 하다. 모든 빵의 기초이기에 잘 만들면 다른 빵들도 손쉽게 만들 수 있으나 잘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식빵 같은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힘들게 하는 또다른 ‘나’이다.


그래서 조경란은 『식빵 굽는 시간』에서 처음과 마지막에 식빵을 굽는다. 이것으로 보아 그녀가 가족에서 시작해 가족에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다. “너를 낳은 건 나다.” 이것은 이모에게서 그녀가 들은 말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달라요. 그러니까 남매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해요.” 이것은 ‘나’의 애인의 여동생에게서 들은 말이다. 이 두 말을 통해 서른 살이 된 그녀 앞에는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들”만이 남게 된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소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론적 사고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식빵처럼 더욱 굳어진다.


특히 원해서 만나지 않았고, 원해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족은 운명 그 자체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거대한 산처럼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고(「내 사랑 클레멘타인」), 어머니와 남동생은 아무런 예고 없이 열차사고로 내 곁을 떠나간다.(「당신의 옆구리」)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술 취한 아버지는 가위로 어머니의 목을 겨눈다. 그런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자식이라서 ‘나’와 동생 경서 또한 살의를 품은 적의를 지닌 채 한방에서 지낸다.(「환절기」) 이처럼 가족은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페스트 같은 질병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노력해서 피해볼 수도 있는 ‘불행’일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이유가 너무 당연하기에 노력해서 피해볼 수도 없는 불행을 말한다. 아버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런 올가미 같은 가족이 짜는 가장 튼튼하고 커다란 그물은 ‘성’이라는 실을 가지고 짜여진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에서 ‘나’는 아버지와 교접하는 꿈을 꾼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아랫도리를 내놓고 집 안에서 서성거리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목이 긴 사내 이야기」에서 마치 의처증 남편처럼 딸을 감시하고 의심하는 경우이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는 딸이 자신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연유한다. 그래서 중 3짜리 남자 제자와 정사를 나누며 아버지에 대한 배반과 집에서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나’는 결국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푸르게 질린 입술을 벌려 나의 이 단단한 젖가슴을 물려주고 싶은 심정”을 갖는다. 아버지의 구순기적인 욕구를 채워주고 싶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 자체가 불륜”(「꿈」)으로 유지되지 않는가.


이처럼 가족을 통해 세상은 ‘나’를 조롱하고 시험한다. “삶은 내게 어떻게든 견뎌보라, 자꾸만 약을 올린다.”(「환절기」) 그런 가족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 길은 무당벌레가 되어 자신이 깨고 나온 알껍질인 가족을 뜯어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방에 그대로 있고, 과거에 사는 다른 아버지는 목이 점점 길어지면서도 여전히 밖을 내다보고 있다. 유일하게 ‘나’에게 남아 있는 길은 그저 그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으면 되는 것이다. 가족을 가족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은 너무도 지독하여 그 냉대나 거리도 극복한다. 그러니, 가족이지 않겠는가. 다시, 운명이다.



4. 무성(無性)의 성, 자아의 그림자



김영하나 박청호의 소설에서의 섹스는 성적인 즐거움이나 의미 있는 쾌락보다는 일상적인 무의미와 절망적인 환멸을 확인시키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에 나타난 섹스는 노골적이어도 야하지 않고, 빈번히 행해져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섹스는 단지 ‘섹슈얼 비즈니스’에 불과하게 된다. 대부분 불감증을 앓고 있는 이런 육체를 가지고는 오르가슴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이다. 그들의 삶에 엑스터시가 없듯이 그들의 성에도 오르가슴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섹스는 대부분 지리멸렬하고 불만족스럽게 끝난다. 이런 성은 성이어도 성이 아닌 무성(無性)의 성에 불과하게 된다. 그들의 소설이 어떤 교성(嬌聲)도 들리지 않는 무성(無聲)의 소설인 것도 이 때문이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레퀴엠을 들으면서 행해지는 섹스에 몰두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성은 죽음과 육교(肉交)하면서 존재의 불안한 형이상학을 그려나간다. 성과 죽음이 만나 절망이나 허무라는 새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 자체가 유일하게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해주지만 그 살아 있음조차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절망적인 포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의 고객인 ‘클림트’는 섹스를 하면서도 추파춥스를 빨며 게임처럼 성교를 한다. 총알택시 운전사인 K는 여성의 성적 매력보다는 달리는 차의 속도감이나 노름인 ‘섰다’를 치는 긴장감에 보다 쉽게 발기를 한다. ‘나’ 또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사람과 섹스하는 일은 편안하다. 잡념없이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낀다. 그런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섹스에는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근원적인 분리감이 존재한다. 비닐로 각자의 몸을 감싼 후에 섹스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과의 섹스는 훨씬 비극적인 것이 된다. 이 소설의 ‘나’처럼 자아도취형의 인간들은 “섹스에 몰입하지 않고 사정하는 순간까지도 이,미,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상대 여성과 성교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과 섹스하는 것이다. 이때의 나르시스는 “세상 어디에든 자신의 복제품을 생산”하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다.


이런 이유로 김영하는 자위를 보다 선호하게 된다. 최소한 실제의 인간을 복제품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도덕적인 섹스가 바로 자위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에 나오는 담배여인의 이야기가 이런 자위의 원형을 보여준다. 어느 날 정액으로 칠갑을 한 채 죽어 있는 남자의 사인은 자신의 담배연기로 만든 가상의 연인과 나눈 격렬한 섹스로 인한 심장마비이다. 자신의 연기로 만든 여인으로부터 남자는 애무를 받고 섹스를 나눌 수 있지만, 자신이 그 여자를 만질 수는 없다. 이런 섹스는 상호교환적이거나 소통적인 섹스가 아닌 일방적이고 고립적인 섹스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통한다. 결국 자위는 “삐삐를 통해 호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나 자신일 뿐”(「호출」)인 인간들이 고독을 배설하는 행위인 것이다.


보다 과격하게 이런 자위행위를 발전시키는 육체의 도구가 바로 ‘손’이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손은 눈의 관념성과 의식성, 위선을 극복하게 해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더듬이로 작용한다. 하지만 성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성기의 삽입으로 인한 완전한 일체가 아니라 자신이나 타인의 몸을 더듬어줌으로써 발생하는 환상적인 결합만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자위의 도구에 머물게 된다.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도마뱀」에서 여성화자인 ‘나’의 꿈속에 등장하는 도마뱀은 남성(아버지)의 성기를 대신하는 자신의 손일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 속의 ‘나’는 꿈결에 손을 몸 속에 집어넣으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금기의 위반과 자위행위라는 육체적인 금기의 위반이 도덕의 검열을 통과하면서 ‘나’의 의식은 분열된다. 「손」에서는 타인의 몸을 만지는 손이 등장한다. ‘나’가 레즈비언으로서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몸을 손으로 더듬을 때이다. 그러나 그런 손의 감촉은 전유(專有)될 수 없거나 상상적인 것이기에 서로간의 거리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런 ‘나’의 불구적 성은 남자동생의 자위하는 손과 겹쳐지면서 좌절된 쾌락이나 불안, 쓸쓸함을 강화시킨다.


이렇게 볼 때 김영하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위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임의 성이다. 삽입이 아닌 발기를 문제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위는 소비만 있고 생산은 없는 성이다. 이때 타인과의 상호소통적인 성교는 불가능하고 대화가 아닌 독백의 사랑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기자신이라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처절한 생존전략이 된다.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자신의 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럴 때의 자위는 성교의 실패와 자아의 존재 증명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자가발전인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체위가 바로 자위인 것이다. 자기자신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몸과 성교한다. 김영하는 그런 웅크림과 단절이 확대와 소통을 위한 기다림의 자세가 되기를 바란다. 그때야 비로소 남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연주하면서 자신의 손을 조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청호는 이런 김영하보다 상대적으로 낭만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편의 연애소설』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들이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과 사랑에 대한 희구 사이에서 끝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에서 이 사실은 확인된다. 그는 사랑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사랑에 희망을 걸게 됨으로써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끝까지 꿈이나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박청호 소설의 특징이다. 그만큼 박청호는 사랑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


물론 박청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또한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기본적으로는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만족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보호본능이 더 강하다. 이런 인물들이기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의 언어만을 발설할 수 있을 뿐이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그녀 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 분명한데 그녀의 구멍은 어느새 다물어져서는 쓱쓱 입맛까지 다시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장씨행장」) 혹은 “남자는 여자에게 섹스도 육체의 사용일 뿐이니까 어떤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충고한다. 본능적인 행위에 어떤 당위성을 부여하면서까지 정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Talk to talk about」)


때문에 박청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마녀 아니면 창녀이다. 그런데 마녀는 착한 악마와 결탁하고, 창녀는 나쁜 천사와 결탁한다. 그래서 그 둘의 차이는 전혀 없다. ‘나’가 지닌 이런 위험한 사고가 종교적인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삶 속에 내재하는 엄청난 삶의 에너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들은 “삶을 내팽개칠 수 있을 만큼 강”(「러닝타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사악한 뱀이 되어 여러 남성들과 한꺼번에 성교를 맺거나 아버지와도 섹스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폴란드産 마녀의 외출」) 그리고 “끔찍한 불륜이라도 경험하게 된다면 조금은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Telephone」)는 위험한 생각을 한다. 그런 성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를 저주 속에 방치함으로써 기존의 도덕이나 신성(神性)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런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박청호는 섹스와 사랑의 힘을 믿는다. 여전히 “가장 인간적인 육체의 사용”(「폴란드産 마녀의 외출」)이 섹스이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온몸을 비벼대면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 그리고 함께 잠드는 것”(「단 한 편의 연애소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슬픔에 젖어 있을 수 있을 만큼 지독하진 못하”(「폴란드産 마녀의 외출」)기에 성다운 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영하나 박청호의 소설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가면의 정사’를 주로 연출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 없이도 섹스를 행할 수 있고, 순간적인 발작처럼 쉽게 섹스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이런 성 같지 않은 무성(無性)의 성을 통해 기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고통을 견디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종교적인 위안이나 철학적 위안을 포기했기에 감정 있는 섹스는 오히려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의 섹스는 자위행위에 가깝게 된다. 상대방과의 상호성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소수(素數)로 존재하기에 자기자신으로만 나뉘어진다. 이런 자위행위는 부정적인 자아중심주의의 산물이기에 위무나 정화를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배설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소외의 성은 역설적으로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성에 대한 기억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그들이 보기에 환희를 포기한 메마른 성교는 단지 짐승들의 교미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들은 육체의 교환이 없는 사랑이 공상이라면, 사랑의 교환이 없는 섹스는 공포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의미에서 겉으로 보이는 차갑거나 무미건조한 성은 오히려 낭만적이거나 정신적인 성의 역상(逆像)이라고 할 수 있다. 성 행위 자체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모르스 부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육체는 ‘사랑의 책’이다. 하기에 합일성과 낭만성을 상실한 성이 그와 반대로 삶의 활력이나 건강한 쾌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5. 누드의 성, 알몸의 그림자


케네스 클라크에 의하면 알몸(naked)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그 자체나 가식이 없는 본연의 상태를, 누드(nude)는 알몸에 하나의 시각을 도입함으로써 가면으로 변형되고 대상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때문에 누드는 또다른 형태의 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고려할 때 1990년대 신세대작가들의 소설에 나타난 성은 알몸의 성이 아니라 누드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성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사회나 가족, 자아 등의 프리즘으로 바라본 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우승제나 박성원, 백민석은 권력에 저항하는 성(反性),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은 가족의 결핍과 충족을 나타내는 성(近性), 김영하나 박청호는 소외를 확인시켜주는 성(無性) 등을 그림으로써 알몸의 성을 누드화시키는 옷을 입히고 있다.


신세대는 공포감이나 위기감 때문에 섹스한다. 그래서 오히려 성이 육체적 행위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심리적인 행위이다. 흔히 “영혼을 박탈당한 세대”라고 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를 박탈당한 세대일 수 있다. 육체가 영혼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으로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섹스한다. 그런데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들의 실존이다. 성 자체가 존재증명이 아닌 부재증명의 증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문학의 성이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논의는 그들의 성이 지닌 그런 영혼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신세대문학의 성은 그들의 환부를 보여주는 상처의 언어이다. 때문에 그들의 성은 가벼운 웃음이 아닌 무거운 울음에 보다 가깝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거운 웃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성은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의 은유가 아니라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환유인 것이다. 한 번도 문학에서의 성이 누드가 아닌 알몸이었던 적이 없듯이 현실원칙이 아닌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아본 경우 또한 없다. 이것이 바로 신세대문학에 나타난 성 담론이 사랑의 표현이 아닌 동물적인 욕망을 배출하면서 전통적인 성관습을 붕괴시켰다고 우려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또 그들의 성이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라는 오해는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신세대가 성에 관한 한 히스테리성 억압과 강박관념적인 집착을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세대의 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정치성을 띠지 않은 것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아와 사회의 공명판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발기불능이나 조루, 동성애, 근친상간, 자위 등은 모두 존재들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 존재하거나 사회적 외상과 관련 있는 불구의 성들이다. 단 그들이 보여주는 이런 비정상적인 성은 정상적인 성을 희구하는 것이고, 단절적인 성은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도덕성이나 무책임성은 도덕성이나 책임감을 네거필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세대들은 포르노 같은 성을 통해 그런 포르노를 양산하는 포르노를 닮은 사회를 비판한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라는 의견 또한 신세대문학의 성이 이성의 전도체라는 점에서 반박될 수 있다. 신세대들은 이성을 적대시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의 성은 성에 관한 한 가짜낙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성의 피곤한 역할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들의 성은 이성적인 저항을 지향하는 것이지 이성 자체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더 많이 벗었는데도 덜 감각적인 육체가 되는 것이다.


혹시 신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퍼 없는 섹스’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완전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이기에 기대나 죄의식, 가책이 전혀 없는 섹스를 의미한다. 이런 섹스를 통해 애정과 책임감을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모든 장애를 없애고 고도로 이상화된 동물적인 행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혹은 앤소니 기든스가 강조하듯이 앞으로는 피임기술이나 체외수정의 발전으로 인해 성에 대한 규범이나 제약이 사라져 조형적인 성(plastic sexuality)이 부상할 수도 있다. 이제는 주어진 성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신세대들에게조차 이런 지퍼 없는 섹스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섹스는 바벨탑처럼 불가능한 꿈으로 보인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위해서는 항온동물이어야지 변온동물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온동물인 인간은 성에 있어서만큼은 주변환경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카멜레온이 된다. 성 자체가 항온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변수를 많이 지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측면에서 성은 다시 바벨탑의 언어가 된다. 성은 영원히 의심의 해석학일 수밖에 없다. 성의 개념이나 본질은 계속 결핍되고 유예되어야 문학화될 수 있다는 모순 때문에 지금도 플라톤의 이데아나 UFO처럼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신세대문학에게 요구하고 신세대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모두가 그들의 ‘화장술’이 아니라 ‘변장술’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新세대나 辛(sin)세대임과 동시에 scene세대이자 seen세대이다. 때문에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면, 겉이 아닌 속을 보고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를 ‘본’ 것이 아니라 ‘겪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폭력이 오히려 성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성을 많이 볼수록 그것에 대해 덜 생각하게 되고, 너무 많이 보여주면 직접 하지 않았는데도 실제로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각의 우월성이 육체의 빈곤을 초래하는 것이다. 신세대에게나 성에게나 진정 필요한 것은 ‘보는 눈’이 아니라 ‘만지는 눈’이다. 지금 신세대들의 육체와 성, 성 담론 자체 또한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기를 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눈 같은 손’이 아니라 ‘손 같은 눈’이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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