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쎈연필 > [퍼온글] 커피가 맛있는 곳 27집

커피가 맛있는 곳 27집
 
 
 세월이 흐르면서 개인의 경험들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독특한 향과 여운 때문에 커피가 가져다 주는 인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기억 속에 잠재되어 있다.
많은 커피애호가들이 나름대로 「단골」을 정해 놓고 특정 커피집을 자주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커피는 역시 커피맛이 좋은 커피집에서 마셔야 제격이다.
자, 이제 잠시 일상을 접고 커피향이 좋은 집을 찾아 나서 보자.
그리하여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추억 하나 만들어 보자.
 
  커피맛은 주관적 판단이 작용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객관화하기 위해
月刊 커피앤티 지영구 편집장과 커피전문가 李禎基씨의 추천을 받은
스물일곱 곳의 커피집을 소개한다. 
 
  
  
  학림
 
  1956년에 오픈해 커피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
자가배전 시스템을 갖추고 그때 그때 로스팅한 커피를 제공하므로,
언제든 신선하고 부드러운 핸드 드립식 커피와 에스프레소 커피를 맛볼 수 있다.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편안한 분위기와 각종 커피 도구도 볼거리.
 
  위치 : 서울 종로구 명륜동 대학로 
  전화 : 02)742-2877
 
  메뉴 : 에스프레소 커피, 레귤러 커피, 아이스 티
  
    
  
  허형만의 커피 볶는 집
 
  문을 열자마자 그윽하게 코끝을 자극하는 커피향이 가득한 아담한 커피집.
커피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춘 주인이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즐길 수 있으며,
커피에 대한 상식과 지식을 덤으로 들을 수 있다.
매주 목요일 두 차례 커피 교실을 운영 중이며, 갓 볶은 원두도 구입 가능.
 
  위치 :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상가 내 
  전화 : 02)511-5078
 
  메뉴 : 에스프레소 커피, 코스타리카 커피, 유기농 커피
  
  
    
  블루
 
  블루 톤으로 세팅된 신선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를 만날 수 있는 커피클럽.
테라스가 이국적인 운치를 더한다.
비교적 동선이 여유로운 실내를 커피향이 가득 메운 가운데 신선하고 부드러운 드립식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여주인이 직접 조리해 내주는 호텔식 스타게티도 일품.
 
  위치 : 서울 서초구 양재동 삼호물산 맞은편 
  전화 : 02)579-4004
 
  메뉴 : 레귤러 커피, 스파게티
  
  
  
   
  
  비미남경
 
  주인이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천천히 음미해 볼 수 있는 곳.
커피애호가들이 자주 찾는 카페로 특히 벽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세계 각지의 산지별 커피 샘플을 통해 각각의 생김새와 특징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원두도 취급한다.
 
  위치 : 서울 신촌 이대 앞 
  전화 : 02)365-1401
 
  메뉴 : 각종 에스프레소 커피, 레귤러 커피
  
 
  
  런던아이
 
  高價(고가)의 영국제 골동품과 소품들이 어우러진 인테리어로
마치 영국의 어느 古家(고가)에 들어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
최상급의 로스팅 장비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제공한다.
영국에서 직수입해서 우려내는 홍차맛도 일품. 
 
  위치 :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전화 : 02)546-4323
 
  메뉴 : 에스프레소 커피, 레귤러 커피, 홍차 등
  
  
 
 
    카페 마고
 
  아담한 공간에 세련된 인테리어가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곳.
특히 화장실을 일류 레스토랑급으로 꾸며 보이지 않는 곳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게 음미할 수 있는 진한 커피와 달콤한 케이크가 잘 조화된 맛을 연출한다.
 
  위치 : 경기도 용인시 수지 평덕천 수석 프라자 1층 
  전화 : 031)302-5000
 
  메뉴 : 커피, 차, 케이크 등
  
  
  
  
 
 
 
  보헤미안
 
  잘 진열된 각종 커피 추출 기구들과 목탄으로 유화천에 스케치한 벽화가 클래식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곳.
자가배전을 통해 제공하는 신선하고 정통적인 커피가 장점이어서 커피애호가들이 많이 찾는다. 커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는 주인이 커피 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위치 : 서울 성북구 안암동 5가 고대 병원 부근 
  전화 : 02)927-7949
 
  메뉴 : 테마 커피 4종류, Dry 커피
 

  
  엘빈
 
  커피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대단한 주인이 직접 제공하는 커피맛이 일품인 커피하우스.
클래식하면서도 편안하고 정돈된 분위기로 커피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예술의 전당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서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 서울 서초구 대교방송 뒷골목 
  전화 : 02)597-4755
 
  메뉴 : 다양한 커피
 
 

  부에노
 
  엄선해서 들여오는 원두를 직접 로스팅해 제공한다.
시간대를 잘 맞추면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하는 장면을 구경할 수도 있으며,
신선한 최고급 스페셜티 커피의 맛을 즐기며,
커피 사랑과 자부심이 넘치는 초로의 주인과 커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갓 볶은 원두도 구입 가능.
 
  위치 :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53-20 
  전화 : 02)364 -0152
 
  메뉴 : 각종 스페셜티 커피, 케이크
 
 

  
  하늘에
 
  북한산 기암괴석이 눈앞에 펼쳐진 곳에 자리한 전원풍의 카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로스팅 공장에서 직접 볶은 원두를 바로 갈아서 제공하는 신선하고 향이 깊은 에스프레소 커피가 자랑거리다.
가족이나 연인들이 가까운 나들이 장소로 자주 찾는 곳.
 
  위치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 자락 
  전화 : 02)383-2141
 
  메뉴 : 커피, 홍차, 칵테일, 아이스크림, 조각 케이크
  
 
  라 스칼라 커피
 
  당돌하고 강열한 컬러의 인어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로고가 인상적인 곳.
초록 계통의 간판과 주황색 톤의 실내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통창은 이 집의 자랑거리.
에스프레소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온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안 스타일의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위치 : 울산광역시 남구 삼산동 
  전화 : 052)227-6607
 
  메뉴 : 카푸치노, 카페 모카, 카페 아메리카노, 현대호텔 베이커리의 신선한 패스트리
 
  
  왈츠와 닥터만
 
  커피 문화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
이 집 주인은 벌써 십수 년째 커피 나무 재배에 골몰하고 있는 커피 전문가이자 연구가이기도 하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쓰며, 호텔 수준의 품위 있는 서비스와 함께
북한강 바람을 마시며 오리지널 블루마운틴 커피를 맛볼 수도 있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영화촬영장 근처 
  전화 : 031)576-0020
 
  메뉴 : 오리지널 커피, 스파게티, 달팽이 요리
 
 
 
 
 
 
  바네쏘라비아
 
  메탈과 원목, 블랙과 옐로 컬러, 수많은 조명이 시선을 끄는 커피전문점.
누드 스타일의 시원한 통유리가 인상적이다.
자체 로스팅을 통해 갓 볶은 커피를 전문 바리스타가 바로 갈아서 제공한다.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카페 라테 등의 커피가 특히 젊은층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곳.
 
  위치 : 서울 강남구 센트럴시티몰 내 
  전화 : 02)6282-4433
 
  메뉴 : 커피, 홍차, 케이크, 쿠키, 바네치노
 
 
 

  
  여우가 말했다
 
  실내 곳곳이 「어린왕자」의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는 동화 같은 느낌의 전원 카페.
오솔길을 한참 들어가야 나오므로 찾는 데 인내심이 필요할 정도로 숨어 있다.
곳곳의 그림과 LP음악이 어우러져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가운데에서
부드러운 레귤러 커피를 즐길 수 있다.
 
  위치 : 경기도 안성 청룡사 부근 
  전화 : 031)672-7626
 
  메뉴 : 레귤러 커피, 차와 식사
  
  
  아마레또
 
  일산에서 유일하게 스페셜티 커피를 만날 수 있는 곳.
자가 로스팅을 하고 있으며, 세계 각지의 희귀한 커피 원두를 직접 비교하고 분석해 볼 수 있다.
매주 로스팅 과정과 커피 메뉴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그 자리에서 원두 커피 구입도 가능하다.
 
  위치 : 경기도 일산 덕이동 로데오거리 
  전화 : 031)922-4508
 
  메뉴 : 스페셜티 커피,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 뎀쎌브즈
 
  1층으로 들어서면 현대적 고급 상설 전시장 같은 분위기의 여유있는 공간이 시원스럽게 느껴진다.
테이크아웃 손님에 대한 배려가 큰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는 커피를 골라 주문할 수 있고, 이곳에서 판매하는 각종 커피와 소품들을 진열해 둔 진열 공간도 궁색함이 없고 시원스럽다.
 
  위치 : 서울 종로 2가와 3가 사이 
  전화 : 02)2266-5947
 

 
  클럽 에스프레소
 
  산장의 카페처럼 차분하고 클래식한 커피하우스.
자가배전을 통해 향이 깊고 맛이 뛰어난 드립 커피와 에스프레소 커피를 제공한다.
인테리어 소품을 대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커피 원두와 기구,
용품들을 감상하는 재미와 즐거움도 쏠쏠하다.
 
  위치 : 서울 종로구 부암동 청와대 뒤편 
  전화 : 02)764-8719
 
  메뉴 : 콜롬비아 수프리모, 에티오피아 이가체프
 
 
 
 

    
  하늘에
 
  웨스턴 분위기의 서까래와 할로겐이 어우러져 있는 산뜻한 카페.
과수원과 산으로 둘러싸인 1916년에 지어진 건물이 목가풍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곳의 최대 매력 포인트는 역시 핸드 드립식 커피와 자동·半자동 머신으로 바로 추출해 주는 에스프레소 커피.
 
  위치 : 충북 충주시 안림동 1036-10 
  전화 : 043)848-3231
 
  메뉴 : 아이스 카푸치노, 레귤러 커피 등
 
 
 
  커피비너리 역삼점
 
  고급스런 외관과 튀지 않으면서 인상적인 편안한 실내.
신선한 커피의 맛이 특징.
특히 젊은층들이 많이 찾아 명소로 떠오른 곳이다.
 
  위치 :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부근 
  전화 : 02)7539-3213
 
  메뉴 : 커피, 스무디, 케이크 등
  
  

  리스 아라비카 숭실대점
 
  아라비카로만 커피를 뽑는다.
빨간색 실내가 인상적이다.
커피에 대한 애정이 풍부한 사장과 커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위치 : 서울 숭실대 후문 건너편 
  전화 : 02)815-3380
 
  메뉴 : 커피, 홍차 등
 
  

  
  커피빈티리프 청담점
 
  고급 차와 커피를 맛볼 수 있고, 가이드북을 통해 차와 커피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체인 형태이면서도 비교적 개성이 강한 정통적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위치 : 서울 강남구 청담동 85-5 
  전화 : 02)518-2326
 
  메뉴 : 커피, 홍차, 녹차, 우롱차, 베이글, 쿠키
  
  
  
  
  
 
   
  할리스 강남점
 
  서양과 동양이 합쳐진 이미지의 인테리어로 편안하고 여유롭게 커피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30여 가지의 다양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맛볼 수 있다.
 
  위치 : 서울 강남역 씨티극장 오른쪽 방향 
  전화 : 02)555-7243
 
  메뉴 : 할리치노, 빨간 모카 등
 
 
 
 
 
 
  
  
  
  

  후에버 신촌점
 
  톡톡 튀는 이벤트가 있는 곳.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인공 눈을 뿌리는 등의 이벤트를 실시해 젊은층에게 각광받고 있다.
각종 원두 커피와 허브티를 맛볼 수 있다.
 
  위치 :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18-1 
  전화 : 02)313-2866
 
  메뉴 : 커피, 허브티, 케이크, 허브 용품
  
 
 

  
  해피칼라
 
  은평구 응암동 이마트 건너편 근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 우아하게 보이는 조금 짙은 초록색 건물.
통행인도 별로 많지 않고 주변 상황으로 보아 본격적인 커피집을 내기에는 어딘지 조금 부족할 듯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이층의 자그마한 갤러리를 돌아 내려와 조용히 자리에 앉으면 종업원이 갓 뽑아 잔잔한 향기가 부드럽게 올라오는 따뜻한 커피잔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위치 : 서울 은평구 응암동 
  전화 : 02)389-7779

    
  대구 커피명가
 
  입구의 손님에 대한 배려에서부터 좌석의 배치, 금연 실행 등 고객에 대한 마음은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몇 년씩 함께 근무해 온 종사자들도 이젠 그의 분신처럼 되었다.
세계적인 명품 단종 커피들을 직접 수입하여 고루 구비하여 다양한 커피들을 만날 수 있는데, 국내 최초로 직접 설계하여 만든 커피볶음기를 사용하여 볶아 낸 커피가 특징이다.
 
  위치 : 대구 중구 삼덕동 
  전화 : 053)423-8756

    
  포항 아라비카
 
  2001년에 숙원이던 커피볶음기를 들여놓으면서 이 집의 커피는 비약적인 변화를 이루었다.
커피볶음기를 여기저기서 빌려 커피를 뽑던 시절엔 이루기 어려웠던 자신의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들여 뽑아 내는 에스프레소 한 잔도 만만치 않았고, 거기에 고운 거품으로 능숙하게 하트를 만들어 내는 주인의 마키아토도 거의 다 마실 때까지 모양이 흐뜨러지지 않아서 좋았다.
 
  위치 : 경상북도 포항 
  전화 : 054)248-0148
 
 

  대전 청청현
 
  이곳은 가정집을 고쳐 찻집으로 만들었는데, 정성스레 가꾼 아름다운 정원과 실내의 기품 있는 장식이 인상적이다.
1층에서건 2층에서건 창가에 앉아 푸른 잎사귀들과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며 마시는 한 잔의 차는 사람들에게 여유를 주고 상대방과의 대화에 좀더 마음을 열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주말에는 많은 분들이 맞선 장소로 이용한다.
 
  위치 : 대전 대전여중 옆 골목길 
  전화 : 042)254-2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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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소설을 만드는 법 - 페레스 레베르테



■이 글은 스페인의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가 원래 『라 반과르디아La Vanguardia』에 발표한 것을 다시 『리르』 지 1999년 3월호에 전재한 것이다.


나는 전업 소설가이다. 나는 문학 이론에 관심이 없다. 문학 이론은 그것을 떠맡고 싶어하거나 그럴 시간이 있는 사람, 또는 남이 써놓은 것에 대해 젠체하며 떠벌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예술적 측면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나의 소관이 아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일은 예술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창조의 고통을 잘 알고 숭고한 아름다움의 비밀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일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가급적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소설이 일반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죽어 버렸는지 아니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내 관심사의 맨 뒷전에 있을 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소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나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러한 내가 이번만큼은 예외적인 일을 한번 하려고 한다. 지난 해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켄 폴릿과 함께 어떤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그 행사가 끝나고 난 뒤,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내가 심포지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생각을 좀더 발전시켜 보라는 거였다. 그러고 나서 그 친구는 아주 친절하게도 『라 반과르디아』의 지면을 내게 마련해 주었다. 나는 내친김에 한번 해보기로 하고 원고 청탁을 받아들였다. 이 기고가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실, 나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이유가 없다. 무릇 자기 작품과 모순되지 않는 작가는 자기가 쓰는 한줄 한줄의 글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니까 말이다.


내가 켄 폴릿에게 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어떤 소설이든 독자가 거기에서 즐길 거리나 생각할 거리, 자기 맘에 드는 인물, 희망, 지식, 위안 혹은 책이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이라도 찾아낸다면, 그 소설은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라고. 그런 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을 한목에 마구 싸잡아 부르는 이른바 베스트셀러라는 것들도 여느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세상 물색을 도통 모르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학교 교육도 별로 받지 않고 열여덟 나이에 선머슴 같은 남자와 결혼해서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장보고 청소하느라고 열네 시간을 보내는 여염의 아낙에게 저녁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에게는 감상적인 연애 소설을 쓰는 작가가 더 고마울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가 그런 소설들을 읽으며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고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말이다. 결국, 책이란 열매 하나를 잡아당기면 다른 것들이 따라오는 버찌 같은 것이다. 감상적인 연애 소설만을 읽던 독자가 언젠가는 다른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한들, 그게 뭐 대수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어떤 책에든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누구도 남의 작품을 경멸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는 아주 단순한 뜻에서 대중 소설이라 불리는 베스트셀러는 짜임새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앵글로색슨의 아무리 생경하고 졸렬한 일회용 베스트셀러일지라도, 혹은 그저 영화화라는 맹랑한 영광을 노리고 쓴 베스트셀러일지라도 저 나름의 오락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면 멸시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경찰관들과 아칸소 주민들이 등장하는 얼빠진 텔레비전 연속극과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런 베스트셀러가 연속극보다는 낫다. 게다가 베스트셀러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제임스 클라벨의 『쇼군』이나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재칼』, 존 르 카레의 소설들, 켄 폴릿의 『지구의 버팀목』 등과 같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으니 말이다.


앵글로색슨의 베스트셀러는 19세기 유럽의 대중 소설과 영화의 언어에서 똑같이 많은 것을 빌려온 매우 효과적인 서술 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기법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의 독서 대중은 매우 폭넓은 시청각적 교양을 지니고 있고, 그 교양은 날로 풍부해 지고 새로워진다(이 점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고 자멸적인 짓이리라). 소설의 소재가 어떠한 것이든 이런 대중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다룰 때는 앵글로색슨의 기법을 참고하는 것이 아주 유익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소설 작법을 옛날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작가의 깜냥대로 가장 효과적인 수단(플롯, 인물, 문체 등)을 이용해서 그것을 해결해 가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들 중에는 아직도 소설은 그렇게 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특히 독자들이 그렇다. 그 점이 중요하다). 소설가가 아무리 장점과 재주가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해도, 또 온갖 심미적 재능을 아무리 많이 타고났다 해도 엄격하고 규율 바른 작업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우아하고 세련된 어떤 천재적인 작가가 최근에 주장한 것과는 달리, 누구도 나비처럼 이꽃 저꽃으로 옮겨 다니면서 오늘 조금, 다음 달에 조금 하는 식으로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누구도 하늘에서 내려 주는 영감만 믿고 소설을 쓸 수는 없다. 또, 문학 토론회에 자주 나가고 문인들을 만나고 신문에 칼럼을 쓰고 인기 좋은 술집을 드나드는 것으로 작가라는 직업을 유지한다고 해서 소설이 저절로 써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몇 일 몇 달 간의 항상적인 규율과 작업이 있어야만 한 편의 소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소설이든 저마다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도 몇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해서 옥과 돌을 뒤섞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켄 폴릿의 『눈 달린 무기』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모두 이론의 여지 없는 베스트셀러이지만 바보 중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두 소설을 같은 가방에 넣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앵글로색슨의 베스트셀러와 유럽의 성공한 소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시장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고 경찰과 도둑의 대립이라는 도식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서사 방식에 맞서서, 오직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액션과 오락에 매달리는 작태에 맞서서, 또 단지 영어권 시장이 거대하다는 이유 하나로 도나캐나 판을 치는 상황에 맞서서, 유럽의 성공한 소설들은 거개가 아주 견실한 자주성을 획득했고, 제 뿌리와 역사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대량 판매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질적 수준에 도달했다. 유럽의 성공한 소설은 스스로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건강성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독자들의 지지를 향유하고 있다.


둘째로, 이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거니와, 문화적 지평이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제한되어 있는 현재의 소설 세계에서 유럽의 소설은 지극히 풍요롭고 밀도 높은 과거에 의지하고 있다. 성서 및 동지중해 문화와 함께 태동하여 그리스 로마를 거친 다음 스페인과 남부 유럽에서 이슬람의 영향으로 더욱 풍요로워지고 중세의 라틴 어 문화와 르네상스를 통해 성숙해진 뒤 스페인의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가 바로크의 형태로 다시 돌아와서 18, 19세기에 갖가지 새로운 발상과 가능성의 향연을 흐드러지게 벌인 3천 년의 유산이 버팀목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소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그 역사와 기억 덕분에 유럽의 소설은 과거가 없는 앵글로색슨 계 베스트셀러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럽 대륙의 많은 소설가들은 평론가들의 평가와 수십 년 전부터 문화를 볼모로 잡고 있는 거물들의 질타에 전전긍긍하면서 자기들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작가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의 선두 자리를 미국 베스트셀러의 번역물에 내주는 것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이야기를 쓰고 독자를 얻는 것이 작가의 수치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유럽의 작가들은 텔레비전 토론 또는 신문의 문예란에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소위 소설의 시체라는 것을 껴안고 애도하면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올바른> 비평을 거부하고 자기들에게 힘과 자부심을 주는 그 거대한 서사적 자산, 그 오랜 전통과 거대한 기억에 새로이 눈길을 돌리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나 앵글로색슨 문학에서 새롭고 효과적인 기법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차용하여, 잘 팔리고 미래가 있는 장르, 독자들의 지지를 누리면서 유럽 문학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높여 주는 장르를 만들어 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적의 무기를 사용해서(그래서 나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전통과 깊이와 재미가 서로 화합할 수 있게 하면서 말이다.

 

유럽 소설을 쇄신하고 그 활력을 온전히 되살리고자 한다면, 아마도 위에서 제시한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다면, 지난 10년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서 소설의 발행 부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하면 된다. 그 발행 부수는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수치에 도달해 있다. 분명히 독자들은 집단적인 문화와 기억을 떠올리는 양질의 소설들에 대대적인 호응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에서 최근에 나온 세 소설, 즉 미겔 델리베스의 『이단자』와 헤수스 페르난데스의 『페온 데 레이』,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에 수만 명의 독자들이 열렬한 환대를 보였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비단 역사 소설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뿌리를 박고 있는 다양한 소설들 역시 유구하고 풍부한 전통, 오늘날의 우리를 가능케 한 수천 년 전통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에 뿌리를 내린 소설들이 오히려 앵글로색슨 세계의 관심을 끌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에서 유럽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 토마스 핀천의 『V』보다 더 유럽적인 것이 있을까? 자기들 나름대로 유럽 문명의 기억을 담지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계 주민들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중장기적으로 유럽 문학이 미국에 파고들어 갈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인 영업 체계 덕분에 어떤 책이든 <잘 팔릴 만한> 것이면 며칠 만에 대량으로 국제적인 영어 시장에 내놓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비록 내수 시장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유럽과 역사적인 기억으로 연계되어 있는 독자층도 분명히 존재한다. 주로 교양 있는 계층 내에, 그리고 이탈리아 계와 유대 계 등등의 공동체 내에 말이다. 그러나 주된 장애는 출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씌어진 소설들을 찾아서 읽는 수준 높은 독자들이 너무 적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 때문에 유럽 작가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고, 대서양 건너로 진출하는 스페인 어 작가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내가 보기에 늙은 유럽의 미래는 전통을 되살리는 일에 달려 있다. 전통은 글쓰는 사람에게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일깨움으로써 그로 하여금 평형을 잃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브뢰겔이 없다면 피카소 같은 화가가 나오기는 불가능하다. 엉터리 평론가들의 찬사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바보 천치들이 아니라면, 겨우 쿤데라의 소설이나 타란티노의 마지막 영화에서 비롯하는 일천한 문학적 또는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 후대에 길이 남을 만한 책을 쓸 수 있다고 정말로 자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페레스 갈도스, 바예인클란, 스탕달, 케베도, 베르길리우스, 호메로스, 디킨스, 뒤마, 스티븐슨, 멜빌 등과 같은 영원한 작가들, 이야기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 옛 스승들은 우리가 글을 쓰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언어라는 무기를 갈고 닦고, 우리 소설의 문체와 구조를 다듬어야 한다.

 

-열린책들, 미메시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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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의 섹스, 슬픈 누드

 

1. 옷의 성, 정신의 그림자

 

1990년대 이전에는 성(sexuality)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미인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았다. 속 보이게 드러내놓고 칭찬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끝까지 무관심한 척할 수도 없었다. 북실북실한 털이나 두꺼운 입술을 지닌 능글맞은 호색한으로 취급받을 위험함과 힘없는 노인네나 답답한 어린애로 취급받을 억울함 사이에 어떤 화해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야박함이 성을 더욱 안으로 멍들게 하고 곪게 만들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은 미인 아닌 여자가 없다. 마치 허물 벗은 별당아씨처럼 모든 여자들은 비슷하게 예쁘다. 그런 미인과 연관된 성 자체도 박씨부인처럼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놓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1990년대에 주로 활동하기 시작한 소위 신세대작가들도 이런 변화에 발맞추어 “도덕은 결국 스페어 타이어 같은 것이다. 기존의 것이 닳아버리거나 구멍이 나면 언제나 갈아끼울 준비가 되어 있다”거나 “나는 처음부터 처녀가 아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사랑 앞에서 언제나 처녀일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순결이었다”(김별아,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연인이 없냐는 질문에 “섹스파트너라면, 사실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연인은 없어요. 별로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안 들어요”(배수아, 「천구백팔십팔 년의 어두운 방」)라고 무감각하게 대답한다. 심지어는 “애를 뗄 때는 반드시 더치 페이할 것”(백민석, 「사랑의 고통」)을 요구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성을 가지고 예술사를 쓴다면 “고전주의:SEX(정상체위), 낭만주의:구강 혹은 항문, 리얼리즘:포도균성 요도염, 모더니즘:레즈비언 혹은 게이, 포스트모더니즘:AIDS”(박청호, 『푸르고 흰 사각형의 둥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별당아씨는 과연 허물을 완전히 벗었는가. 혹시 사람들은 성의 옷만 보고, 그 속의 피부는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피부를 보았더라도 성은 그 피부를 파열시켜야 하는 것인데, 신세대들의 피부 자체가 그러기에는 너무 두꺼운 것은 아닐까. 활짝 피어나는 목련꽃처럼 성 담론 자체는 맨 얼굴을 드러내면서 노골화되고 과격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그 흰꽃이 땅으로 떨어지면 검게 짓이겨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훼손되지는 않을까. 지나치게 옷을 벗으면 그 벗음 자체가 오히려 억압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사실들에 대한 의문과 실체 없이 떠도는 신세대문학에 대해 구체적이고 풍부한 텍스트로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신세대문학과 성의 결합을 시도하게 한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 생긴 모자라는 자식이 바로 이 글이다. 신세대문학과 성에 대한 담론은 이합 하산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서투른 신조어에서 무책임한 상투어”라는 용어와 동궤의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문제삼는 신세대문학과 성에 대한 서투르고도 무책임한 본질 규명은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 등의 사실이다. 이 글은 이런 고정관념들을 뒤집어봄으로써 여전히 신세대문학의 육체가 정신의 반대급부가 아닌 그 부속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정신은 복화술사처럼 자신은 드러나지 않으면서 육체를 조정하고 있다. 때문에 신세대들의 육체는 날이 바뀌면 양지로 바뀌는 정신의 ‘그늘’이 아니라 밤이 되어야만 나타나고 영원히 빛은 될 수 없는 정신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정신은 이제 육체를 통해서도 강화된다. 신세대들은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육체를 노출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와 성은 밀월관계가 아니라 냉전관계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옷을 벗었지만 그래도 몸이 드러나지 않는 성 담론의 딜레마나 신세대문학이 그려내는 성의 성감대를 알아볼 수 있다.


2. 반성(反性)의 성, 사회의 그림자


우승제와 박성원, 백민석의 소설은 사회적 억압과 성적 억압을 병치시켜 그런 억압을 조장하거나 양산하는 권력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성 자체를 가장 본능적인 욕구로 생각하면서 그런 성적 욕망을 좌절시키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 리비도와 정치가 상호 침투한다는 이런 사유의 기저에는 성이 어느 시대에도 그 자체로 투명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본래의 긍정적이고 해방적인 성에 반대되는 현재의 부정적이고 억업적인 반성(反性)을 반성(反省)하게 함으로써 사회의 그림자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사회의 과잉 억압과 실행 원칙에 대해서 반항하는 것이 자유로운 에로스의 구가이고, 그것을 통해 특정한 역사적 제약을 넘어서는 것이 영원한 인간성의 획득이 된다.


우승제의 『열려라, 방』은 “나는 다 필요없어. 단지 그녀와 마음껏 섹스할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돼.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아주 비밀스럽고,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 좌절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서의 ‘나’와 ‘그녀’는 마레크 플레스코의 소설 『제8요일』에 나오는 아그네시카와 피에트레크가 벽이 있는 세 평의 방을 찾아 공산주의 지배하에 있었던 바르샤바를 헤매고 다니듯이 둘이 함께할 시간과 공간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이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제8요일에나 가능하다.


『열려라, 방』에서의 ‘나’와 ‘그녀’는 “이쪽 도시”와 “저쪽 도시”로 양분되는 사회 어느 곳에서도 그들만의 방을 마련하지 못한다. “이쪽 도시”에서는 “창호지 같은 판자벽” 때문에 섹스 행위조차 공동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느닷없이 침입하는 혁명가 집단 때문에 항상 조루나 발기불능의 증세를 보이고, ‘그녀’ 또한 불안해서 언제나 오르가슴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애무조차 부르주아적인 발상이 된다. 그런데 “이쪽 도시”를 위해 혁명을 정당화시키는 글을 쓰던 ‘나’는 혁명을 무화시키는 글을 쓰면서 “저쪽 도시”로 편입된다. “저쪽 도시”에서 원하는 글은 “체면의 상실, 최대의 소비(정액까지도), 무조건 상품화”라는 3대 원칙에 충실한 글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육체적 조루나 발기불능이 아닌 정신적 조루나 발기불능 증세를 보이게 된다.


이처럼 우승제의 『열려라, 방』은 온전한 오르가슴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을 고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나’는 “성기와 내 주변관계와는 어떤 질긴 끈이 있길래 내 주변적 상황에 의해 발기를 했다가, 조루가 됐다가, 이렇듯 발기불능이 되어버리는 것일까”라며 한탄하고 있다. ‘열리지 않는 방’은 이런 ‘닫혀 있는 존재’ 자체에 대한 은유이고, 이런 은유로 인해 이 소설은 성애소설이자 풍자소설이 된다. 권력의 억압에 대항하는 반권력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박성원의 「라이히 보고서」 「해뜨는 집」 「이상(異常)·이상(李箱)·이상(理想)」 등은 자본이나 제도와 연관된 권력에 의해 왜곡된 성을 통해 성 자체의 순수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이 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김해경 혹은 이상(李箱)으로서, 그들을 통해 작가는 “사회·정치·경제적 혁명이 없이는 성의 만족은 없다”라는 빌헬름 라이히의 명제를 확인시킨다. 박성원이 라이히에 기대어 말하고 싶은 것은 금전 경제학이 정액 경제학과 만나는, 즉 마르크스와 프로이드가 결합되는 프로이드적 마르크스주의이다. 이들 소설은 모두 성적인 쾌락에 대한 두려움이 심리적인 병을 일으키므로 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제반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면서 보다 건강한 성 생활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상의 1990년대적 화신에 해당하는 ‘나=그=김선생’을 통해 박성원은 그가 “섹스에 미친 병자”가 아니라 “이상한 이상에 대한 이상”을 지닌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섹스에 대한 탐욕이 존재 자체의 본질과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연심=본래의 성’을 탐하지 못하게 하는 “악마적인 안타까운 현실성” 때문에 ‘나’와 ‘그녀’는 자포자기적이고 허무한 섹스를 나눈다. 이때 ‘나’는 그런 모습에서 “섹스에 미친 패인(敗人)을 자처하는, 무지개같이 파장이 분열된 폐인(廢人) 같은” 1990년대판 이상의 원형을 발견한다.


이처럼 박성원의 소설에 나타나는 성은 가장 인간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본능성으로 인해 굴절되고 왜곡되어 있는 기형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박성원은 타율성과 자율성, 왜곡과 순수, 억압과 해방, 권력과 저항 사이에 놓인 성 담론의 가파른 경계선을 문제삼는다. 그리고 그는 그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성을 통해 악마적인 현실을 극복할 힘을 기르려 한다. 이렇게 볼 때 성을 가장 중요한 인간의 조건으로 본다는 의미에서 박성원은 유물론자이고, 그런 물질적인 성을 통해 영혼의 치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다시 유심론자가 된다.


백민석은 『내가 사랑한 캔디』에서 동성애를 발기부전이나 변태의 이형태(異形態)로 간주하면서 비정상적이고 일그러진 성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백민석이 다른 이성애주의자들과 다른 것은 그런 동성애를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동성애는 이성애로 가기 위한 성, 음울한 시간들을 견디기 위한 성, 시대적 억압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기 위한 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형적 성에 환멸적인 시대와 세계를 담음으로써 시대나 세계가 비정상적이기에 성 또한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유추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런 동성애의 배경으로 입시 지옥이나 전교조, 지강헌 사건, 김귀정이나 이한열의 죽음 같은 역사적 사건이 등장한다.


이처럼 전교조 1세대로서 “호모가 아니면 발기부전, 아니면 변태”일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 본격적으로 1990년대로 진입하여 도달한 곳이 바로 “믿거나말거나박물지사”에서 개최하는 세기말 콘서트장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믿거나말거나박물지젤라틴풀장”은 수간(獸姦)이나 항문섹스, 오랄섹스, 동성애가 판치는 난교파티장이다. 왜 이런 충격적인 성을 묘사하는가? 권태롭기 때문이다. 그런 권태는 어디서 오는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세상이 평화로운가? 오히려 환멸스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성은 세상에 대한 분노나 저항을 내장한 위험스런 폭발물에 다름아니다.


백민석이 보기에 세상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것들로 꽉 찬 불가사의한 괴물이다. 그런 세상에서의 삶은 당연히 소풍이 아니라 유배이다. 그런데도 그런 폭력성을 숨기면서 교묘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세상을 폭로하기 위해서는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부도덕한 포르노로 오해받을 위험조차도 감수한다. 어차피 오해되건 이해되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지만 그는 절망적인 유희를 계속한다. 심각함이 지나치면 유희가 된다. 그래서 이런 일탈적인 성 자체가 백민석에게는 이 세상을 견디는 “은밀한 장난감”이다.


백민석은 말한다. 자신이 묘사한 성은 일그러져 있다고. 그래서 그걸 보고 야하다거나 외설적이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정말 변태라고. 자신이 진정 원한 것은 그런 성이 야기시키는 불편함이라고. 그 불편함이 반성을 촉구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는 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학과 피학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헐벗고 왜곡되어 있는 현실이다. 그런 성마저 만들어낼 수 있는 현실적 상상력이다. 성난 성은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이때 느끼는 공포가 바로 백민석이 원하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승제와 박성원, 백민석은 현실의 성에 저항하는 성을 통해 성다운 성을 환기시키면서, 성을 성답게 만들지 못하는 권력을 비판하는 작가들에 속한다. 그들의 소설에서는 사회적 억압을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성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육체적인 성을 다루고 있지만 그 성을 통해 정신을 문제삼는다고 할 수 있다. 정신 자체가 육체에 의해 좌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소설의 인물들은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발기불능도 되고 오르가슴에도 도달한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소설에 나타난 정신과 육체는 이원론적 일원론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함수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정신에 의해 육체가 좌우된다고 봄으로써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정신주의자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근성(近性)의 성, 가족의 그림자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나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보면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출생을 기형적이고 슬프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산모의 상반신은 흰 시트로 가려져 있어 그 표정을 알 수 없으며, 아이는 머리가 축 늘어진 채 힘겹게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산모 머리 위의 마리아상은 단검에 맞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자신을 낳아줄 어머니는 죽었다. 그래서 혼자 태어나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은 없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혼자 태어났기에 그들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미련이 크기에 그들은 남아 있는 가족끼리도 섹스를 한다. 이런 성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성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대로 된 성은 아니지만 온전한 성이 되려고 하거나 성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근성(近性)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성은 가족 같은 연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가족이 남처럼 간주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가족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이때의 근친상간적인 섹스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부재할 때에나 가능한 슬프고도 위험한 것이다.


특히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에게는 가족다운 가족이 없다. 그들에게 더이상 가족은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을 새롭게 만들거나 차라리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섹스한다. 가족을 너무 사랑하거나 지독하게 증오해서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가족과의 섹스는 이런 사랑과 증오를 배설하는 행위이다. 배수아는 가족으로부터 거부당했기에 더욱 가족을 추구하고, 이응준은 자신을 거부한 가족을 스스로도 부정하거나 극복하려 한다. 조경란은 운명처럼 주어진 가족을 인내하려 한다. 그들에게 사회의 속살이 가족이고, 가족의 피부가 사회가 된다.


배수아의 『랩소디 인 블루』에서 미호가 자신의 친오빠와 섹스를 하는 것은 그녀가 가족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오빠는 오빠가 아니라 그저 “관심을 가져주는 다정한 사람”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오빠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이자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남자이다. 이런 오빠를 떠나보내지 않기 위해기 그녀는 오빠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그녀가 이렇게 가족에 집착하는 이유는 “난 아무것도 아니다. 혼자서는 결국은 모두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혼자이지 않기 위해서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라도 자신의 몸 속에 가두고 싶어한다.


이런 가족에 대한 성적인 이끌림이 『부주의한 사랑』에서는 더욱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나’의 친언니이자 사촌인 연연이 이모부를 연인으로 삼은 것은 자신의 친동생인 ‘나’나 이모부의 가족으로부터 떠나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이모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아버지가 없었던 그녀는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사랑하게 된다. ‘나’ 또한 사촌지간인 택이와 운이 모두와 섹스를 나누는 것은 그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가 유부남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택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가족애를 느끼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그러고 있으니 마치 정말로 그가 나의 사촌처럼 느껴졌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언제나 생각나는 나의 사촌”이라는 고백은 연인이 아닌 가족에 대한 갈구를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녀는 보호와 안정감을 줄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지 성적인 만족을 줄 수 있는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밖에 ‘나’의 사촌인 미진이 ‘나’의 애인이었던 철희와 사귀는 것(「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이나 아버지가 이모와 사랑을 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하는 것(「프린세스 안나」)은 모두 뿌리가 흔들리는 존재들의 불안한 내면을 보여준다. 현실은 가족처럼 난공불락이기에 바꾸거나 선택할 수 없다. 그러니 성 또한 그런 현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의 삶은 다르지 않다는 운명의 회귀성이나 불행의 지속성 때문에 그녀는 가족을 거부할 수 없게 된다. 가족에서 가족으로 유전되는 병이 바로 외로움이나 결핍감이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잘 알아본다.


그들이 이처럼 부도덕하고 부주의한 근친상간적 사랑에 빠지는 것은 세상 모든 인간들이 사생아나 고아이기에 인위적으로라도 가족을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버려진’ 존재들이고, 배수아에게는 이런 유기(遺棄)가 가장 나쁜 상태이다. 나쁜 존재들이 강렬하고 치열하게 나쁜 섹스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런 근친상간적인 섹스는 가벼움과 무감각성의 기호가 아니라 외로움과 두려움의 기호이다. 고아처럼 자신들을 방기한 부모나 형제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발짓이 아니라 그들을 재발견해서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손짓이다. 그런 성은 다른 사람은 없고 가족밖에 없기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라는 점에서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한 것일 수 있다. 부주의한 성은 그것 이외의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데서 오는 상처와 폭력의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라캉식으로 표현하면 배수아가 머무르고 싶어하는 아이(homme-lette)의 상태는 오믈렛(hommelette)과 비슷한 존재이다. 형태가 없는 계란 덩어리처럼 어린아이는 비정형상태로서 아무런 경계나 의식, 욕망을 모르는 상태이다. 그래서 결핍 또한 모르는 상태이다. 배수아는 이런 상태를 지향한다. 오믈렛은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니며, 우유도 아니고 계란도 아니다. 그녀는 이런 오믈렛처럼 거울을 보기 전, 그래서 자신에 대한 자각조차 생기기 이전의 유아처럼 유모차에 앉아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로 머물고 싶은 것이다. 자아를 발견하면 그때부터 가족의 보살핌을 거부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거울조차도 필요 없다. 이런 그녀의 섹스는 아이로 남아 있기 위한 구순기적 욕망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미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 깨어진 계란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머니의 양수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상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이 현실은 어머니의 품속으로의 회귀를 용납하지 않는다. 배수아와 달리 이응준은 이런 자궁회귀의 불가능성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아버지 같은 현실을 닮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이응준의 소설에 나타난 성장의 의미이다. 이런 성장을 해야 “묘지 같은 세계에서의 유령 같은 삶”(『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애정결핍에 시달리며 배고픔처럼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들에게 어머니라는 존재는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에서 ‘나’가 고아 출신의 식모인 무리누나에게 첫사랑을 느끼면서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 여자임과 동시에 어머니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나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에서 꼽추인 친구가 자신의 굽은 등의 마디마디를 어루만져주는 여자들을 보면서 “창녀들에게선 어머니 냄새가 나”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어머니 같은 연인을 위한 말들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엄마 말 잘 듣는 애처럼”(「그 시절을 위한 잠언」) 어린 창녀의 요구에 따라주기도 한다.


세상을 알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모르면 성장할 수 없다. 이응준의 소설에서는 불행을 알게 하는 성장의 촉매로서 가족과 성이 등장한다. 가족은 세상의 속악함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그런 가족의 속악함은 일그러진 성관계에 기원을 둔다. 때문에 이응준의 소설 속에 나타난 근친상간적인 사랑은 배수아의 소설에서처럼 소외를 극복하면서 합일을 추구하려는 성이 아니라 아름다움에서 추악함을 발견하게 되는 모멸과 치욕의 성이다. 이응준은 부모를 통해 그런 성을 경험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극복하는”(「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것임을 알게 된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에는 “세상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한 식구가 된” 가족의 슬픈 사진이 찢겨 있다. ‘나’는 열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다. 이미 그 왕국에 살고 있던 아버지의 적자(嫡子)인 인하형은 탐욕스럽고 권력지향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우아하고 고상한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 이런 구도이기에 이 소설 속의 가족관계는 다음처럼 재편(再編)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억압적인 부성 원리를 대변하는 인물은 아버지와 생모이다. 젊고 아름답지만 천박한 생모는 아버지를 닮은 또다른 아버지이다. 그리고 합일적인 모성원리를 대변하는 인물이 인하형과 인하형의 어머니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아름다운 것이 옳은 것이다”라는 유미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인하형은 불쌍하게 죽어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와 ‘나’의 생모에 대한 복수를 단행한다. 형의 침대에 같이 있는 생모를 보면서 나는 보고 싶지 않은 생과 성의 이면을 보게 된다. 인하형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키지 못하게 한 것은 부도덕한 아버지 때문이고, 그가 스스로 악과 추함이 되어 복수를 하게 만든 것도 패륜적인 세상 때문이다. 이런 더러운 성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진흙탕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에 대해서는 가해자이지만 고통에 대해서는 패배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배운다.


이보다 덜 충격적이지만 성장의 계기로서 부모의 성이 등장하는 또다른 경우가 「아이는 어떻게 숲을 빠져나왔는가」이다. 이 소설에서 어머니는 오래 앓았던 아버지가 죽자 삼촌과 결혼한다. ‘나’는 아픈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바랐었기에, 그리고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마저 중동에서 낙사(落死)했기에 더욱 죄책감을 느낀다. 더욱이 삼촌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아름답고 추함에 의해 세상의 희망과 혼돈을 가늠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나’의 미의식의 진원지였다. 이런 속물 아닌 사람의 죽음을 통해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란 결코 오래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 삶이란 “비슷한 몸무게를 지닌 고통과 환멸이란 두 사내가 타고 노는 녹슨 시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들의 성과 죽음이 그를 성장시킨 것이다.


조경란에게는 가족을 견디면 세상을 견딘 것이 된다. 가족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부동성은 가족 밖으로의 움직임에 대한 생래적인 두려움을 내장하고 있는 식물적 정지를 의미한다. 그래서 다른 소설들보다 그녀의 소설에는 운명적인 색채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운명성은 스스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거나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더욱 강화된다. 조경란은 굳은살이나 사마귀, 겨드랑이털처럼 가족을 달고 다닌다. 아무리 자르고 잘라도 다시 생겨나는 것,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조경란의 소설에 나오는 가족의 실체이다. 또 조경란에게 있어 가족은 식빵이기도 하다. 모든 빵의 기초이기에 잘 만들면 다른 빵들도 손쉽게 만들 수 있으나 잘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식빵 같은 존재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힘들게 하는 또다른 ‘나’이다.


그래서 조경란은 『식빵 굽는 시간』에서 처음과 마지막에 식빵을 굽는다. 이것으로 보아 그녀가 가족에서 시작해 가족에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다. “너를 낳은 건 나다.” 이것은 이모에게서 그녀가 들은 말이다. “우리는 아버지가 달라요. 그러니까 남매라고 하면 이해가 빠르겠군요. 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해요.” 이것은 ‘나’의 애인의 여동생에게서 들은 말이다. 이 두 말을 통해 서른 살이 된 그녀 앞에는 “혼자 지내야 하는 시간들”만이 남게 된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소란스럽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운명론적 사고는 모든 만남과 헤어짐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식빵처럼 더욱 굳어진다.


특히 원해서 만나지 않았고, 원해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족은 운명 그 자체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는 거대한 산처럼 움직일 수 없는 존재이고(「내 사랑 클레멘타인」), 어머니와 남동생은 아무런 예고 없이 열차사고로 내 곁을 떠나간다.(「당신의 옆구리」) 뚜렷한 이유도 없이 술 취한 아버지는 가위로 어머니의 목을 겨눈다. 그런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자식이라서 ‘나’와 동생 경서 또한 살의를 품은 적의를 지닌 채 한방에서 지낸다.(「환절기」) 이처럼 가족은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페스트 같은 질병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노력해서 피해볼 수도 있는 ‘불행’일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이유가 너무 당연하기에 노력해서 피해볼 수도 없는 불행을 말한다. 아버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이런 올가미 같은 가족이 짜는 가장 튼튼하고 커다란 그물은 ‘성’이라는 실을 가지고 짜여진다. 「내 사랑 클레멘타인」에서 ‘나’는 아버지와 교접하는 꿈을 꾼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아랫도리를 내놓고 집 안에서 서성거리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목이 긴 사내 이야기」에서 마치 의처증 남편처럼 딸을 감시하고 의심하는 경우이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는 딸이 자신을 떠나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연유한다. 그래서 중 3짜리 남자 제자와 정사를 나누며 아버지에 대한 배반과 집에서의 탈출을 꿈꾸면서도 ‘나’는 결국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푸르게 질린 입술을 벌려 나의 이 단단한 젖가슴을 물려주고 싶은 심정”을 갖는다. 아버지의 구순기적인 욕구를 채워주고 싶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 자체가 불륜”(「꿈」)으로 유지되지 않는가.


이처럼 가족을 통해 세상은 ‘나’를 조롱하고 시험한다. “삶은 내게 어떻게든 견뎌보라, 자꾸만 약을 올린다.”(「환절기」) 그런 가족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 그 길은 무당벌레가 되어 자신이 깨고 나온 알껍질인 가족을 뜯어먹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치매에 걸린 아버지는 방에 그대로 있고, 과거에 사는 다른 아버지는 목이 점점 길어지면서도 여전히 밖을 내다보고 있다. 유일하게 ‘나’에게 남아 있는 길은 그저 그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들은 ‘거기’ 있고, ‘나’는 ‘여기’ 있으면 되는 것이다. 가족을 가족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족은 너무도 지독하여 그 냉대나 거리도 극복한다. 그러니, 가족이지 않겠는가. 다시, 운명이다.



4. 무성(無性)의 성, 자아의 그림자



김영하나 박청호의 소설에서의 섹스는 성적인 즐거움이나 의미 있는 쾌락보다는 일상적인 무의미와 절망적인 환멸을 확인시키는 행위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설에 나타난 섹스는 노골적이어도 야하지 않고, 빈번히 행해져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섹스는 단지 ‘섹슈얼 비즈니스’에 불과하게 된다. 대부분 불감증을 앓고 있는 이런 육체를 가지고는 오르가슴을 꿈꾼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넌센스이다. 그들의 삶에 엑스터시가 없듯이 그들의 성에도 오르가슴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섹스는 대부분 지리멸렬하고 불만족스럽게 끝난다. 이런 성은 성이어도 성이 아닌 무성(無性)의 성에 불과하게 된다. 그들의 소설이 어떤 교성(嬌聲)도 들리지 않는 무성(無聲)의 소설인 것도 이 때문이다.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레퀴엠을 들으면서 행해지는 섹스에 몰두하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성은 죽음과 육교(肉交)하면서 존재의 불안한 형이상학을 그려나간다. 성과 죽음이 만나 절망이나 허무라는 새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 자체가 유일하게 자신의 살아 있음을 증명해주지만 그 살아 있음조차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도 절망적인 포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나’의 고객인 ‘클림트’는 섹스를 하면서도 추파춥스를 빨며 게임처럼 성교를 한다. 총알택시 운전사인 K는 여성의 성적 매력보다는 달리는 차의 속도감이나 노름인 ‘섰다’를 치는 긴장감에 보다 쉽게 발기를 한다. ‘나’ 또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사람과 섹스하는 일은 편안하다. 잡념없이 감각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느낀다. 그런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섹스에는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근원적인 분리감이 존재한다. 비닐로 각자의 몸을 감싼 후에 섹스를 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울에 대한 명상」에서처럼 나르시시즘에 빠진 인물과의 섹스는 훨씬 비극적인 것이 된다. 이 소설의 ‘나’처럼 자아도취형의 인간들은 “섹스에 몰입하지 않고 사정하는 순간까지도 이,미,지,를 고민”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상대 여성과 성교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자신과 섹스하는 것이다. 이때의 나르시스는 “세상 어디에든 자신의 복제품을 생산”하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들이다.


이런 이유로 김영하는 자위를 보다 선호하게 된다. 최소한 실제의 인간을 복제품으로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도덕적인 섹스가 바로 자위행위이기 때문이다. 「도마뱀」에 나오는 담배여인의 이야기가 이런 자위의 원형을 보여준다. 어느 날 정액으로 칠갑을 한 채 죽어 있는 남자의 사인은 자신의 담배연기로 만든 가상의 연인과 나눈 격렬한 섹스로 인한 심장마비이다. 자신의 연기로 만든 여인으로부터 남자는 애무를 받고 섹스를 나눌 수 있지만, 자신이 그 여자를 만질 수는 없다. 이런 섹스는 상호교환적이거나 소통적인 섹스가 아닌 일방적이고 고립적인 섹스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과 통한다. 결국 자위는 “삐삐를 통해 호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나 자신일 뿐”(「호출」)인 인간들이 고독을 배설하는 행위인 것이다.


보다 과격하게 이런 자위행위를 발전시키는 육체의 도구가 바로 ‘손’이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손은 눈의 관념성과 의식성, 위선을 극복하게 해주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더듬이로 작용한다. 하지만 성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성기의 삽입으로 인한 완전한 일체가 아니라 자신이나 타인의 몸을 더듬어줌으로써 발생하는 환상적인 결합만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자위의 도구에 머물게 된다.


다소 모호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도마뱀」에서 여성화자인 ‘나’의 꿈속에 등장하는 도마뱀은 남성(아버지)의 성기를 대신하는 자신의 손일 수 있다. 때문에 이 소설 속의 ‘나’는 꿈결에 손을 몸 속에 집어넣으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금기의 위반과 자위행위라는 육체적인 금기의 위반이 도덕의 검열을 통과하면서 ‘나’의 의식은 분열된다. 「손」에서는 타인의 몸을 만지는 손이 등장한다. ‘나’가 레즈비언으로서 성적인 흥분을 느끼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몸을 손으로 더듬을 때이다. 그러나 그런 손의 감촉은 전유(專有)될 수 없거나 상상적인 것이기에 서로간의 거리를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런 ‘나’의 불구적 성은 남자동생의 자위하는 손과 겹쳐지면서 좌절된 쾌락이나 불안, 쓸쓸함을 강화시킨다.


이렇게 볼 때 김영하의 나르시시즘적인 자위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임의 성이다. 삽입이 아닌 발기를 문제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위는 소비만 있고 생산은 없는 성이다. 이때 타인과의 상호소통적인 성교는 불가능하고 대화가 아닌 독백의 사랑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기자신이라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처절한 생존전략이 된다.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능한 것은 자신의 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이럴 때의 자위는 성교의 실패와 자아의 존재 증명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자가발전인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체위가 바로 자위인 것이다. 자기자신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몸과 성교한다. 김영하는 그런 웅크림과 단절이 확대와 소통을 위한 기다림의 자세가 되기를 바란다. 그때야 비로소 남의 손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연주하면서 자신의 손을 조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청호는 이런 김영하보다 상대적으로 낭만주의자이고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편의 연애소설』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들이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확인과 사랑에 대한 희구 사이에서 끝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에서 이 사실은 확인된다. 그는 사랑의 존재를 믿기는 하지만 사랑에 희망을 걸게 됨으로써 상처받을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끝까지 꿈이나 낭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박청호 소설의 특징이다. 그만큼 박청호는 사랑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


물론 박청호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또한 자기자신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기에 기본적으로는 나르시시스트들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만족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보호본능이 더 강하다. 이런 인물들이기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의 언어만을 발설할 수 있을 뿐이다. “육체적으로는 내가 그녀 몸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 분명한데 그녀의 구멍은 어느새 다물어져서는 쓱쓱 입맛까지 다시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장씨행장」) 혹은 “남자는 여자에게 섹스도 육체의 사용일 뿐이니까 어떤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충고한다. 본능적인 행위에 어떤 당위성을 부여하면서까지 정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Talk to talk about」)


때문에 박청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마녀 아니면 창녀이다. 그런데 마녀는 착한 악마와 결탁하고, 창녀는 나쁜 천사와 결탁한다. 그래서 그 둘의 차이는 전혀 없다. ‘나’가 지닌 이런 위험한 사고가 종교적인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녀들의 삶 속에 내재하는 엄청난 삶의 에너지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들은 “삶을 내팽개칠 수 있을 만큼 강”(「러닝타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사악한 뱀이 되어 여러 남성들과 한꺼번에 성교를 맺거나 아버지와도 섹스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폴란드産 마녀의 외출」) 그리고 “끔찍한 불륜이라도 경험하게 된다면 조금은 자유로워질지도 모른다”(「Telephone」)는 위험한 생각을 한다. 그런 성을 통해 그들은 스스로를 저주 속에 방치함으로써 기존의 도덕이나 신성(神性)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런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박청호는 섹스와 사랑의 힘을 믿는다. 여전히 “가장 인간적인 육체의 사용”(「폴란드産 마녀의 외출」)이 섹스이고, “만지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온몸을 비벼대면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는 것. 그리고 함께 잠드는 것”(「단 한 편의 연애소설」)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슬픔에 젖어 있을 수 있을 만큼 지독하진 못하”(「폴란드産 마녀의 외출」)기에 성다운 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김영하나 박청호의 소설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행할 수 있는 ‘가면의 정사’를 주로 연출한다고 할 수 있다. 감정 없이도 섹스를 행할 수 있고, 순간적인 발작처럼 쉽게 섹스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들은 이런 성 같지 않은 무성(無性)의 성을 통해 기쁨을 만들어내기보다는 고통을 견디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종교적인 위안이나 철학적 위안을 포기했기에 감정 있는 섹스는 오히려 피곤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의 섹스는 자위행위에 가깝게 된다. 상대방과의 상호성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소수(素數)로 존재하기에 자기자신으로만 나뉘어진다. 이런 자위행위는 부정적인 자아중심주의의 산물이기에 위무나 정화를 동반하지 않는 단순한 배설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소외의 성은 역설적으로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성에 대한 기억을 전제로 해야 가능하다. 그들이 보기에 환희를 포기한 메마른 성교는 단지 짐승들의 교미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들은 육체의 교환이 없는 사랑이 공상이라면, 사랑의 교환이 없는 섹스는 공포임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의미에서 겉으로 보이는 차갑거나 무미건조한 성은 오히려 낭만적이거나 정신적인 성의 역상(逆像)이라고 할 수 있다. 성 행위 자체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모르스 부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육체는 ‘사랑의 책’이다. 하기에 합일성과 낭만성을 상실한 성이 그와 반대로 삶의 활력이나 건강한 쾌락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5. 누드의 성, 알몸의 그림자


케네스 클라크에 의하면 알몸(naked)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 그 자체나 가식이 없는 본연의 상태를, 누드(nude)는 알몸에 하나의 시각을 도입함으로써 가면으로 변형되고 대상화된 상태를 나타낸다. 때문에 누드는 또다른 형태의 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을 고려할 때 1990년대 신세대작가들의 소설에 나타난 성은 알몸의 성이 아니라 누드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성 그 자체로 다루지 않고 사회나 가족, 자아 등의 프리즘으로 바라본 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 우승제나 박성원, 백민석은 권력에 저항하는 성(反性), 배수아나 이응준, 조경란은 가족의 결핍과 충족을 나타내는 성(近性), 김영하나 박청호는 소외를 확인시켜주는 성(無性) 등을 그림으로써 알몸의 성을 누드화시키는 옷을 입히고 있다.


신세대는 공포감이나 위기감 때문에 섹스한다. 그래서 오히려 성이 육체적 행위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심리적인 행위이다. 흔히 “영혼을 박탈당한 세대”라고 하지만 그들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를 박탈당한 세대일 수 있다. 육체가 영혼을 위한 도구로 쓰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으로 말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섹스한다. 그런데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그들의 실존이다. 성 자체가 존재증명이 아닌 부재증명의 증거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대문학의 성이 1)가벼움이나 쾌락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논의는 그들의 성이 지닌 그런 영혼의 무게를 생각하면 그 근거를 잃게 된다. 신세대문학의 성은 그들의 환부를 보여주는 상처의 언어이다. 때문에 그들의 성은 가벼운 웃음이 아닌 무거운 울음에 보다 가깝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무거운 웃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성은 향유할 수 있는 쾌락의 은유가 아니라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고통의 환유인 것이다. 한 번도 문학에서의 성이 누드가 아닌 알몸이었던 적이 없듯이 현실원칙이 아닌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아본 경우 또한 없다. 이것이 바로 신세대문학에 나타난 성 담론이 사랑의 표현이 아닌 동물적인 욕망을 배출하면서 전통적인 성관습을 붕괴시켰다고 우려하거나 기뻐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또 그들의 성이 2)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라는 오해는 그런 오해를 받을 정도로 신세대가 성에 관한 한 히스테리성 억압과 강박관념적인 집착을 동시에 강요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세대의 성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정치성을 띠지 않은 것이 없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자아와 사회의 공명판이라는 적극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발기불능이나 조루, 동성애, 근친상간, 자위 등은 모두 존재들의 정치적 무의식 속에 존재하거나 사회적 외상과 관련 있는 불구의 성들이다. 단 그들이 보여주는 이런 비정상적인 성은 정상적인 성을 희구하는 것이고, 단절적인 성은 소통을 원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비도덕성이나 무책임성은 도덕성이나 책임감을 네거필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신세대들은 포르노 같은 성을 통해 그런 포르노를 양산하는 포르노를 닮은 사회를 비판한다.


3)이성과 반대되는 감성을 대변한다라는 의견 또한 신세대문학의 성이 이성의 전도체라는 점에서 반박될 수 있다. 신세대들은 이성을 적대시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의 성은 성에 관한 한 가짜낙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이성의 피곤한 역할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들의 성은 이성적인 저항을 지향하는 것이지 이성 자체의 실패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더 많이 벗었는데도 덜 감각적인 육체가 되는 것이다.


혹시 신세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지퍼 없는 섹스’일 수도 있다. 그것은 완전한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이고 순수한 것이기에 기대나 죄의식, 가책이 전혀 없는 섹스를 의미한다. 이런 섹스를 통해 애정과 책임감을 의도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모든 장애를 없애고 고도로 이상화된 동물적인 행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혹은 앤소니 기든스가 강조하듯이 앞으로는 피임기술이나 체외수정의 발전으로 인해 성에 대한 규범이나 제약이 사라져 조형적인 성(plastic sexuality)이 부상할 수도 있다. 이제는 주어진 성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한 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신세대들에게조차 이런 지퍼 없는 섹스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섹스는 바벨탑처럼 불가능한 꿈으로 보인다. 감정이나 의식이 없기 위해서는 항온동물이어야지 변온동물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항온동물인 인간은 성에 있어서만큼은 주변환경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카멜레온이 된다. 성 자체가 항온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변수를 많이 지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측면에서 성은 다시 바벨탑의 언어가 된다. 성은 영원히 의심의 해석학일 수밖에 없다. 성의 개념이나 본질은 계속 결핍되고 유예되어야 문학화될 수 있다는 모순 때문에 지금도 플라톤의 이데아나 UFO처럼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신세대문학에게 요구하고 신세대문학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모두가 그들의 ‘화장술’이 아니라 ‘변장술’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新세대나 辛(sin)세대임과 동시에 scene세대이자 seen세대이다. 때문에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면, 겉이 아닌 속을 보고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서로를 ‘본’ 것이 아니라 ‘겪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시선의 폭력이 오히려 성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성을 많이 볼수록 그것에 대해 덜 생각하게 되고, 너무 많이 보여주면 직접 하지 않았는데도 실제로 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각의 우월성이 육체의 빈곤을 초래하는 것이다. 신세대에게나 성에게나 진정 필요한 것은 ‘보는 눈’이 아니라 ‘만지는 눈’이다. 지금 신세대들의 육체와 성, 성 담론 자체 또한 보여지지 않고 만져지기를 원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눈 같은 손’이 아니라 ‘손 같은 눈’이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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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후 스트레스장애 [시려누-][명사]

 

[失戀後-障碍, post-broken heart stress disorder]

 

PBSD라고도 한다. 실연 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장애이다. 주요 증상은 당시 상황의 반복적 회상이다. 꿈에 상황이 재현되어 악몽에 시달리는 등 당시의 상황을 재경험하고 상기시키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회피하려 하고 감정이 둔화되거나 혹은 과민상태가 된다. 주로 과민반응, 환각, 감정회피, 불면증, 거식증, 구역질, 간혈적 두통, 우울증 등이 흔히 수반되어 나타나게 된다. 당사자 자체의 의지박약, 미련의 유무와 여부에 따라 개개인에서 보이는 증세의 정도는 다양하다. 급성이든 만성이든 후유증이 심하며 환자들 대부분의 감정은 비현실적이고, 타락, 분노, 우울, 자괴감을 잘 느끼게 된다. 알코올이나 약물남용, 헤픈 감정표현, 자해적 행동과 자살 시도, 대인관계 장애가 나타날 수도 있다. 정서적으로도 불안하여 합병증으로 해리증세나 공황발작을 동반하기도 한다. 치료방법으로는 최면치료, 정신과적 치료, 신경차단 치료요법 등 의학적 방법도 있으나 다른사랑을 하며 극복되는게 일반적이다.

 

**뜬금없이 이걸 올리는 이유는 내 지금 상황이 그렇다는게 아니라,(헐.왜이리 땀이 나지..)

이것도 정의가 된다는게 다소 놀라워서..이걸 어디 말로서 정의하랴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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