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는 소설을 만드는 법 - 페레스 레베르테
■이 글은 스페인의 작가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가 원래 『라 반과르디아La Vanguardia』에 발표한 것을 다시 『리르』 지 1999년 3월호에 전재한 것이다.
나는 전업 소설가이다. 나는 문학 이론에 관심이 없다. 문학 이론은 그것을 떠맡고 싶어하거나 그럴 시간이 있는 사람, 또는 남이 써놓은 것에 대해 젠체하며 떠벌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예술적 측면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 역시 나의 소관이 아니다. 그런 문제를 살피는 일은 예술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창조의 고통을 잘 알고 숭고한 아름다움의 비밀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맡기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의 일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가급적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소설이 일반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죽어 버렸는지 아니면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내 관심사의 맨 뒷전에 있을 뿐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 소설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나는 쓸데없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그러한 내가 이번만큼은 예외적인 일을 한번 하려고 한다. 지난 해 10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켄 폴릿과 함께 어떤 심포지엄에 참가했다. 그 행사가 끝나고 난 뒤, 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내가 심포지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생각을 좀더 발전시켜 보라는 거였다. 그러고 나서 그 친구는 아주 친절하게도 『라 반과르디아』의 지면을 내게 마련해 주었다. 나는 내친김에 한번 해보기로 하고 원고 청탁을 받아들였다. 이 기고가 나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것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실, 나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이유가 없다. 무릇 자기 작품과 모순되지 않는 작가는 자기가 쓰는 한줄 한줄의 글을 통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니까 말이다.
내가 켄 폴릿에게 했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어떤 소설이든 독자가 거기에서 즐길 거리나 생각할 거리, 자기 맘에 드는 인물, 희망, 지식, 위안 혹은 책이 제공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이라도 찾아낸다면, 그 소설은 마땅히 존중을 받아야 한다라고. 그런 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들을 한목에 마구 싸잡아 부르는 이른바 베스트셀러라는 것들도 여느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존중을 받아야 마땅하다. 세상 물색을 도통 모르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학교 교육도 별로 받지 않고 열여덟 나이에 선머슴 같은 남자와 결혼해서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장보고 청소하느라고 열네 시간을 보내는 여염의 아낙에게 저녁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여자에게는 감상적인 연애 소설을 쓰는 작가가 더 고마울지도 모른다. 만일 그녀가 그런 소설들을 읽으며 현실에서 벗어나 꿈을 꾸고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말이다. 결국, 책이란 열매 하나를 잡아당기면 다른 것들이 따라오는 버찌 같은 것이다. 감상적인 연애 소설만을 읽던 독자가 언젠가는 다른 책을 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설령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한들, 그게 뭐 대수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어떤 책에든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누구도 남의 작품을 경멸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는 아주 단순한 뜻에서 대중 소설이라 불리는 베스트셀러는 짜임새만 제대로 되어 있다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앵글로색슨의 아무리 생경하고 졸렬한 일회용 베스트셀러일지라도, 혹은 그저 영화화라는 맹랑한 영광을 노리고 쓴 베스트셀러일지라도 저 나름의 오락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면 멸시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경찰관들과 아칸소 주민들이 등장하는 얼빠진 텔레비전 연속극과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런 베스트셀러가 연속극보다는 낫다. 게다가 베스트셀러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제임스 클라벨의 『쇼군』이나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재칼』, 존 르 카레의 소설들, 켄 폴릿의 『지구의 버팀목』 등과 같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작품들도 있으니 말이다.
앵글로색슨의 베스트셀러는 19세기 유럽의 대중 소설과 영화의 언어에서 똑같이 많은 것을 빌려온 매우 효과적인 서술 기법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기법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유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의 독서 대중은 매우 폭넓은 시청각적 교양을 지니고 있고, 그 교양은 날로 풍부해 지고 새로워진다(이 점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고 자멸적인 짓이리라). 소설의 소재가 어떠한 것이든 이런 대중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다룰 때는 앵글로색슨의 기법을 참고하는 것이 아주 유익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소설 작법을 옛날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작가의 깜냥대로 가장 효과적인 수단(플롯, 인물, 문체 등)을 이용해서 그것을 해결해 가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들 중에는 아직도 소설은 그렇게 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특히 독자들이 그렇다. 그 점이 중요하다). 소설가가 아무리 장점과 재주가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다 해도, 또 온갖 심미적 재능을 아무리 많이 타고났다 해도 엄격하고 규율 바른 작업이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우아하고 세련된 어떤 천재적인 작가가 최근에 주장한 것과는 달리, 누구도 나비처럼 이꽃 저꽃으로 옮겨 다니면서 오늘 조금, 다음 달에 조금 하는 식으로 소설을 쓰지는 않는다. 누구도 하늘에서 내려 주는 영감만 믿고 소설을 쓸 수는 없다. 또, 문학 토론회에 자주 나가고 문인들을 만나고 신문에 칼럼을 쓰고 인기 좋은 술집을 드나드는 것으로 작가라는 직업을 유지한다고 해서 소설이 저절로 써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몇 일 몇 달 간의 항상적인 규율과 작업이 있어야만 한 편의 소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소설이든 저마다 존중을 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도 몇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첫째로, 누구의 기분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해서 옥과 돌을 뒤섞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켄 폴릿의 『눈 달린 무기』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모두 이론의 여지 없는 베스트셀러이지만 바보 중의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 두 소설을 같은 가방에 넣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앵글로색슨의 베스트셀러와 유럽의 성공한 소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시장을 유일한 목표로 삼고 있고 경찰과 도둑의 대립이라는 도식을 거의 벗어나지 못하는 서사 방식에 맞서서, 오직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고자 하는 일념으로 액션과 오락에 매달리는 작태에 맞서서, 또 단지 영어권 시장이 거대하다는 이유 하나로 도나캐나 판을 치는 상황에 맞서서, 유럽의 성공한 소설들은 거개가 아주 견실한 자주성을 획득했고, 제 뿌리와 역사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대량 판매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질적 수준에 도달했다. 유럽의 성공한 소설은 스스로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건강성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독자들의 지지를 향유하고 있다.
둘째로, 이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거니와, 문화적 지평이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제한되어 있는 현재의 소설 세계에서 유럽의 소설은 지극히 풍요롭고 밀도 높은 과거에 의지하고 있다. 성서 및 동지중해 문화와 함께 태동하여 그리스 로마를 거친 다음 스페인과 남부 유럽에서 이슬람의 영향으로 더욱 풍요로워지고 중세의 라틴 어 문화와 르네상스를 통해 성숙해진 뒤 스페인의 배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갔다가 바로크의 형태로 다시 돌아와서 18, 19세기에 갖가지 새로운 발상과 가능성의 향연을 흐드러지게 벌인 3천 년의 유산이 버팀목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소설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이다. 그 역사와 기억 덕분에 유럽의 소설은 과거가 없는 앵글로색슨 계 베스트셀러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럽 대륙의 많은 소설가들은 평론가들의 평가와 수십 년 전부터 문화를 볼모로 잡고 있는 거물들의 질타에 전전긍긍하면서 자기들 자신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작가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의 선두 자리를 미국 베스트셀러의 번역물에 내주는 것을 체념하듯 받아들이고 있다. 마치 이야기를 쓰고 독자를 얻는 것이 작가의 수치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유럽의 작가들은 텔레비전 토론 또는 신문의 문예란에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소위 소설의 시체라는 것을 껴안고 애도하면서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올바른> 비평을 거부하고 자기들에게 힘과 자부심을 주는 그 거대한 서사적 자산, 그 오랜 전통과 거대한 기억에 새로이 눈길을 돌리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나 앵글로색슨 문학에서 새롭고 효과적인 기법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차용하여, 잘 팔리고 미래가 있는 장르, 독자들의 지지를 누리면서 유럽 문학의 국제적인 경쟁력을 높여 주는 장르를 만들어 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적의 무기를 사용해서(그래서 나쁠 게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전통과 깊이와 재미가 서로 화합할 수 있게 하면서 말이다.
유럽 소설을 쇄신하고 그 활력을 온전히 되살리고자 한다면, 아마도 위에서 제시한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것에 대한 확신을 얻고 싶다면, 지난 10년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서 소설의 발행 부수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하면 된다. 그 발행 부수는 20년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수치에 도달해 있다. 분명히 독자들은 집단적인 문화와 기억을 떠올리는 양질의 소설들에 대대적인 호응을 보이고 있다. 스페인에서 최근에 나온 세 소설, 즉 미겔 델리베스의 『이단자』와 헤수스 페르난데스의 『페온 데 레이』, 마누엘 리바스의 『목수의 연필』에 수만 명의 독자들이 열렬한 환대를 보였다는 사실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비단 역사 소설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뿌리를 박고 있는 다양한 소설들 역시 유구하고 풍부한 전통, 오늘날의 우리를 가능케 한 수천 년 전통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에 뿌리를 내린 소설들이 오히려 앵글로색슨 세계의 관심을 끌 수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국에서 유럽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 토마스 핀천의 『V』보다 더 유럽적인 것이 있을까? 자기들 나름대로 유럽 문명의 기억을 담지하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계 주민들이 점증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중장기적으로 유럽 문학이 미국에 파고들어 갈 가능성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미국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인 영업 체계 덕분에 어떤 책이든 <잘 팔릴 만한> 것이면 며칠 만에 대량으로 국제적인 영어 시장에 내놓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비록 내수 시장이 잘 정비되어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유럽과 역사적인 기억으로 연계되어 있는 독자층도 분명히 존재한다. 주로 교양 있는 계층 내에, 그리고 이탈리아 계와 유대 계 등등의 공동체 내에 말이다. 그러나 주된 장애는 출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씌어진 소설들을 찾아서 읽는 수준 높은 독자들이 너무 적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 때문에 유럽 작가들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물론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고, 대서양 건너로 진출하는 스페인 어 작가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내가 보기에 늙은 유럽의 미래는 전통을 되살리는 일에 달려 있다. 전통은 글쓰는 사람에게 자기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일깨움으로써 그로 하여금 평형을 잃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브뢰겔이 없다면 피카소 같은 화가가 나오기는 불가능하다. 엉터리 평론가들의 찬사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바보 천치들이 아니라면, 겨우 쿤데라의 소설이나 타란티노의 마지막 영화에서 비롯하는 일천한 문학적 또는 문화적 기억을 가지고 작업을 하면서 후대에 길이 남을 만한 책을 쓸 수 있다고 정말로 자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페레스 갈도스, 바예인클란, 스탕달, 케베도, 베르길리우스, 호메로스, 디킨스, 뒤마, 스티븐슨, 멜빌 등과 같은 영원한 작가들, 이야기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그 옛 스승들은 우리가 글을 쓰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남아 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언어라는 무기를 갈고 닦고, 우리 소설의 문체와 구조를 다듬어야 한다.
-열린책들, 미메시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