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했으니, 즐거움과 괴로움도 매한가지일 터. 남의 눈에 비친, 남의 옷을 걸친 가짜 즐거움을 떨치고 자기만의 옷을 찾는 괴로움을 거쳐야만 인문학적 즐거움에 이를 수 있으니, 어쩌면 이번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은 전작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프리퀼이라 할 만하다. 김수영, 김춘수, 황동규와 들뢰즈, 사르트르, 비트겐슈타인의 만남을 기획한 전작에 이어 이번에는 최승호와 게오르그 짐멜, 문정희와 이리가레이, 채호기와 맥루한의 만남을 마련했다. 매 꼭지가 하나의 책처럼 전혀 다른 감각을 일깨우는 탄탄한 구성에, 사랑, 돈, 여성, 타자 등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부터 대중문화, 글쓰기, 감각, 관계 등 현실과의 접점까지 함께 다룬 폭넓은 시선이 '역시' 강신주답다.
들어가는 글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아파트 10층 현관문 앞에 도착한 순간, 나는 절벽을 마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채로 산에 갔다 온 탓일까요. 현관문 앞에서 도무지 문을 열 수 있는 암호가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휴대전화기를 찾았지만 주머니나 배낭 안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능선 산행을 할 거라 휴대전화기를 집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때늦게 기억하게 됐습니다. 암릉을 기어오를 때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당혹스러운 상황에 가족에게 전화도 할 수 없게 된 겁니다. 심지어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가족의 번호마저도 헛갈립니다. 매번 저장된 번호를 기계적으로 눌러왔기에 번호가 도통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진퇴양난이란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겁니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주민등록번호, 생일 등등 내가 비밀번호로 쓰고 있는 모든 번호를 입력해봅니다. 그러나 잠금장치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암호를 한두 번 잘못 입력하면, 몇 분간 입력도 되지 않는 첨단 도어록이라는 사실을 이때서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암호는 갈수록 오리무중에 빠지고, 당혹감은 나를 더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내 집 인데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아무데도 연락을 할 수 없다는 것.
불현듯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소설,《성(Das Schloss)》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당혹스런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성에 들어가려고 하면 성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성을 벗어나려고 하면 어느 사이엔가 성이 눈앞의 뿌연 안개 속에서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을 벗어나 인근 편의점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호주머니에 잔돈이 조금 있었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애써 집과 현관문의 암호를 잊으려고 애썼습니다. 늪에 빠진 현관문 암호가 저절로 떠오르기를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진짜 집과 암호에 대한 생각을 잊게 되었습니다. 철학자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의 이야기를 음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저《부정변증법(Negative Dialektik)》에 등장하는 구절이었을 겁니다.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자물쇠들을 여는 것과 같고, 그 열림은 하나의 개별적인 열쇠나 번호가 아니라 어떤 번호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다”라는 취지의 생각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특정한 암호로 열리는 자기만의 고유한 문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편의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들었습니다. 시인과 철학자를 포함한 모든 진지한 인문 저자들은 저마다 고유한 문의 암호를 잃어버린 사람들 아닐까요? 그러니 암호를 찾아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시집과 철학책들은 모두 특정한 문을 열 수 있는 암호와 같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시인과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암호를 아무리 입력해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당혹스런 경험을 했던 겁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책《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읽고 그들은 사랑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실제로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은 알게 된 겁니다. 베르테르의 사랑으로는 결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탄식하며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도대체 사랑이 뭐지?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있지?” 그들은 사랑이란 문을 열 수 있는 암호를 잃어버린 겁니다. 그렇다고 절망만 하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랑의 암호는 그들에게 사활을 건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삶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물과 사건들, 그리고 소중한 모든 가치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바뀌기 이전에 통용되던 암호를 떠올리며 항상 문을 열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은 아닐까요? 막상 살아가다 보면 어떤 문도 열지 못하는 나약한 상태라는 것을 종종 깨닫게 됩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암호를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암호로는 우리가 들어가고 싶은 문을 통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암호를 다양하게 배열해서 문을 열려고 했던 작가들의 분투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우리와 유사한 삶의 조건을 공유하는 시인과 철학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그 골목 을 어떤 식으로 벗어나려고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교훈은 그들처럼 우 리도 사물이나 사건, 혹은 가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의 암호를 잃어버렸다는 자각 아닐까요? 그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잠금장치의 숫자를 다시 신중하게 배열하려는 의지와 용기가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삶은 남의 제스처로는 살아낼 수 없다는 것.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가르침은 바로 이겁니다.
프롤로그
1.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를 아시나요? 그렇다면 그의 《피아노 협주곡(Piano Concerto)》제2번과 제3번을 기억하실 겁니다. 러시아의 작곡자이자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그의 연주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바닥없이 추락하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비상하는 감동을 주니까 말입니다. 라흐마니노프를 몰랐던 시절, 내게 그의《피아노 협주곡》제2번과 제3번을 들어보라고 권했던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습니다. 라흐마니노프를 굉장히 좋아해서 그런지, 혹은 내가 라흐마니노프 음악도 들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서인지, 그녀는 시간을 내 직접 라흐마니노프 음악 연주회에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좌석에 나란히 앉았을 때, 그녀는 내게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동을 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신의 애인을 소개시켜주는 처녀처럼, 그녀는 달뜬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마침내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비장한 선율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랑 같이 연주회에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것처럼 말이지요. 음악에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화려하기도 하고 때로는 비장하기도 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연주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음악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습니다. 눈을 감고 듣다가 어떤 선율에서는 양미간을 찡그리곤 했습니다. 같이 듣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왜 그런 감정적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시 내가 라흐마니노프 음악으로부터 전혀 감동을 받을 수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그녀처럼 라흐마니노프를 ‘깊이’ 느낄 수 없었을 뿐입니다. 연주가 끝난 뒤 나는 어느 부분이 좋았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전체적으로 좋았다고만 이야기할 뿐,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더 감동을 받았는지 말하지는 못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집중은 자신을 떠나서 관심을 가진 무엇인가로 건너가는 상태니까 말입니다. 영어로 관심이나 흥미를 뜻하는 ‘interest’ 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사실 이 단어는 ‘사이’를 뜻하는 라틴어 ‘인테르(inter)’와 ‘존재함’을 뜻하는 ‘에쎄(esse)’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이에 존재함’으로써 ‘interest’는 나와 타자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집중은 바로 내가 나와 어떤 타자 사이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집중의 상태는 완전히 나로 머물러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타자로 건너가서도 안 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집중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념에만 매몰되어 있다면, 우리는 음악은커녕 상대방의 이야기조차 들을 수 없기 때 문이지요. 후자의 경우라면 집중은 일종의 최면이나 환각 상태로 변질됩니다. 집중해야 하는 주체, 즉 ‘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라흐마니노프 음악에 집중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녀는 결코 자신이 라흐마니노프의《피아노 협주곡》에 ‘깊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라흐마니노프 음악에 깊이가 있다고 느낀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입니다. 단지 그녀는 집중하고 몰입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그녀뿐만 아니라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제 역으로 말해도 좋을 것 같네요. 여러분이 깊이가 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집중’과 ‘깊이’, 이 두 상태는 동전의 양면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의 비밀을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는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었던 겁니다.
2.
이름 모를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길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 상념에 빠져 그냥 지나쳤다면 꽃들과 길에 대해 어떤 감흥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잠시 걸음을 멈춰 한 송이 꽃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여러분은 그 꽃을 상세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다. 오직 응시와 집중만이 사물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법이니까요. 나아가 사물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시적 감수성도 기적처럼 솟구쳐 오르게 될 겁니다. 언젠가 질 것이기에 더욱 찬란하기만 한 꽃을 노래할 수도 있고, 아니면 꽃을 통해 자신과 이웃의 삶을 예견할 수도 있습니다. 지하보도를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버려진 종이상자로 작은 집을 만들어 그 속에 누에고치처럼 들어가 잠을 청하고 있는 노숙자의 삶을 응시해보세요. 당신도 겪어내고 있는 자본주의적 삶을 묘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 말입니다. 꽃을 묘사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노숙자를 응시하고 묘사하다 보면 자본주의로부터 상처받고 있는 자신의 삶도 명료하게 들어올 겁니다.
자신이 직면하게 된 사람이나 사물 혹은 사건에 고강도로 집중할 때, 우리는 그로부터 발생하는 내적인 동요를 묘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셈입니다. 그래서 집중은 자기만의 표현과 묘사, 즉 고유한 스타일을 낳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시인이나 철학자들의 글은 읽기가 힘든 겁니다. 너무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무나 구체적이고 개성적이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다면 내가 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글을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위대한 시 나 철학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들은 아주 높은 곳으로 비상해서 모든 것을 관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가피한 착시효과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으로 하강해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겁니다. 이제 느낌이 오시나요? 삶이 묻어나는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표현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만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들이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A la recherche du temps perdu)》에서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도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단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몇 백만의 세계, 인간의 눈동자와 지성과 거 의 동수인 세계가 있고, 그것이 아침마다 깨어난다”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권력이나 자본 혹은 관습이 강요하는 공통된 색안경을 끼고 자기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만의 제스처가 아니라 남의 제스처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삶이 우울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지요. 자기 옷이 아닌 남의 옷을 입고 사니까 말입니다.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자기 몸에 맞는 자기만의 옷을 만들어 입는 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로부터 제스처를 배워서 그것을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헤어진 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각오를 다져야만 합니다. “아! 저 친구는 저렇게 자신의 삶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감정과 생각에 집중하는구나. 나도 그래야지. 이제 더 많이 내 감정과 생각을 돌아봐야겠다.”이제 시인이나 철학자들을 선생님이나 정신적 멘토로 숭배하지 마세요. 그들이 남긴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 외우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삶이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고민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세요. 언젠가 여러분도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고 그것을 표현 할 수 있는 시인이나 철학자가 되어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3.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는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노래하거나 논증합니다. 그들의 시와 철학에는 유사성은 있지만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김수영의 시와 신동엽의 시, 그리고 바흐친의 철학과 바르트의 철학이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시인과 철학자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데 성공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의 궁극적 유사성은 바로 그들이 자기만의 제스처와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와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도 그들처럼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정신의 소망입니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자 신의 힘으로 영위하고 그것을 표현하라!”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 자의 삶에서 자유와 기쁨을 얻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 게 인문학이 필요한 유일한 이유일 겁니다.
우리에게 김수영이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단순히 시인이기보다 인문정신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964년에 집필한 <요동하는 포즈들>이란 시평에서 김수영은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현대성보다도 사상보다도 백배나 더 중요한 일” 이라고 말이지요.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삶과 감정, 그리 고 생각에 진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남의 제스처를 흉내 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런 정신은 1953년에 쓴, 비교적 초기 작품에 속하는 <달나라의 장난>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 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聖人)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 김수영, <달나라의 장난>
1953년 어느 날, 김수영 시인은 돌아가는 팽이를 봅니다. 그리고 팽 이에게서 자신의 삶, 혹은 우리 인간의 삶을 직감합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하게 돌고 있어도 팽이는 언젠가는 멈추게 마련입니다. 어차피 멈출 것을 왜 돌고 있는지 의아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슬픕니다. “팽이가 돈다/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그렇지만 시인은 압니다. 팽이는 오직 돌 때에만 팽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팽이의 목적은 돌기를 멈추고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팽이는 돌기 위하여 존재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스스로 채찍질해야만 한다고 각오를 다집니다.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을 의식하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팽이는 다른 팽이가 돌도록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팽이놀이를 해본 분은 알겠지만, 돌고 있는 팽이 가 다른 팽이와 부딪치면 둘 중 하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멈추게 됩니다. 다른 팽이의 운동을 따라 하다가 스스로 멈추는 팽이처럼 우 리도 스스로 돌면서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가야만 합니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생각하면 서러운”일이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유로운 인간의 숙명인 것을 말입니다.
4.
2010년에 출간한《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 독자가 내 책에서 받은 인상을 토로했던 대목입니다. “시인은 그것이 무슨 씨인지도 모른 채 씨를 뿌리고 지나갑니다. 시간이 흘러 그 씨앗들이 다양한 꽃을 피우겠지요. 그러면 철학자가 뒤따라가면서 시인이 뿌린 씨가 어떤 꽃의 씨인지를 하나하나 알려줍니다.”이처럼 위로가 되는 평가가 또 있을까요? 고맙습니다. 나를 더 기쁘게 했던 것은 내가 다루었던 시인의 시집들이 과거보다 조금이나마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고,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나는 예기치 않은 투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을 다뤄줄 수 없느냐는 독자들의 바람이었습니다. 여기에 편승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출판사 편집자들도 내게 압력을 넣습니다. 마침내 나는 홍대 근처 상상마당에서 철학과 놀기 13기 강좌를 시작했습니다. “철학과 시가 부르는 사유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말입니다. 상상마당 아카데미의 꽃, 아름다운 매니저 한나 씨가 붙여준 매력적인 제목이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본 독자들이 수강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책의 부록처럼 강의를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비록 강의가《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의 속편일지라도,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세계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 ‘돈’, ‘여성’, ‘그리스도’, ‘타자’, ‘미디어’, ‘자유’, ‘역사’, ‘대중문화’, ‘글쓰기’, ‘감각’, ‘관계’ 등등을 주제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를 토대로 반드시 읽어보아야만 할 우리 시인들과 그들의 정직한 속앓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현대 철학자들을 선정했습니다. 시인을 선정하면서 특히 염두에 두었던 것은 전편에서 많이 다루지 못했던 여성 시인들이었습니다. 문정희, 고정희, 그리고 김행숙 시인을 다루면서 나는 여성 시인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려고 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다루지 못한 것이 못내 아 쉬웠던 시인들을 다루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백석, 신동엽, 이성복, 김정환, 그리고 허연 시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특히 신동엽 시인과 이성복 시인을 다룰 수 있어서 더 행복했습니다.
강의는 매주 강의안을 책 원고라는 완성된 형식으로 집필하여 읽었던 나만의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강의를 하면서 나는 김수영 시인을 울렸던 하나의 팽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아! 선생님은 자신의 삶을 응시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쓰는구나.” 뭐, 이런 느낌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팽이가 돌면서 김수영 시인을 울렸던 것처럼 나도 돌면서 수강한 분들을 울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김수영의 시 <폭포>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곧은 소리는 소리이다/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는 구절을 떠올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강하는 분들이 자기 삶을 채찍질 하며 스스로 서기 위해 노력한다면, 내 강의는 그 목적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강의는 내 의도대로 진행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자신의 속내를 정직하게 토로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입니다. 결국 강의실 안은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지 않는, 스스로 도는 힘으로 도는” 팽이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이런 고마운 선물이 다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공통된 제스처가 아니라 자기만의 제스처로 돈다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제목에 ‘괴로움’이 란 말을 넣었습니다. 이런 괴로움을 잘 이겨내면, 우리는 자신만의 즐거움을 얻게 될 겁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즐거움은 항상 괴로움이란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할 때에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