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알라디너 분들의 서재에서 보이기에 탐내고 있던 차에 도서관에서 발견하곤 <워드슬럿>을 냉큼 빌려왔다. 0장과 1장을 다 읽었고 2장으로 넘어간 상태다. 여성용 단어가 격하를 거친 사례를 읽는 건 매우 괴롭고 분통이 터지지만 흥미롭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인 슬럿slut만 해도 '칠칠맞은'이라는 형용사로 남성까지도 수식하던 단어였으나 성적으로 '헤픈'이라는 의미로 성판매자를 칭하다가 1990년대에 포르노에서 많이 쓰이면서 젠더화된 모욕으로 격하되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런 단어에 대처하는 방법은 아마도 사용을 피하는 것일 테다. 이 책에 등장하는 예시 중 '노처녀'와 같이 개념 자체가 시대에 낡아버려 해당 단어를 사용하는 게 우스워진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사라지게 만들려는 목적이 없더라도 발화하는 것만으로 기존 권력과 체제를 강화하는 단어를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른 길을 제시한다. 단어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재정의해서 단어를 탈취해오라고 한다. 모욕을 위해 사용되던 단어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서 애정을 담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재전유하라는 것이다. 저자가 제목으로 사용한 '워드슬럿wordslut' 역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언어에 죽고 못사는 사람, 단어 덕후라는 뜻으로 단어를 탈환해온 것이다.


미드 <보스턴 리걸>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Brad Chase: I outrank you.

Alan Shore: And I'm such a slut for authority.


내가 너보다 직급이 높으니 따르라는 말에 알았다는 대답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slut'이 권력이라면 껌뻑 죽는다는 의미로 재전유되었다.


(65) 이는 모든 단어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유로 혹은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용 중지를 선언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이는 규칙에 대한 저항이다. '슬럿' 혹은 '푸시'와 같은 단어를 악의적으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거절함으로써, 우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남성우월주의를 위해 만들어진 불균형한 기준을 거부하는 셈이다.


내가 남몰래 무척 애정하는 이라영 작가는 <말을 부수는 말>에서 권력의 언어는 쉽게 발언권을 얻고 널리 들리지만 저항의 언어는 말하는 데만도 어마어마한 위험이 수반되며 설사 발언권을 얻는다 해도 쉬이 묻힌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라영 작가가 꼽은 저항의 언어 중 '퀴어'가 있다. 어맨다 몬텔 역시 '퀴어'를 재전유되고 있는 과정에 있는 단어로 꼽았다. 재전유 과정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58) 의미론적인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 의미가 천천히 다른 한 의미를 덮어 기존의 의미가 지평선 아래로 지는 점진적인 과정에 가깝다. 단어의 긍정적인 변주가 점점 더 흔해지고 점점 더 주류를 차지할수록, 다음 세대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이러한 의미를 먼저 집어들게 된다."


나는 이런 접근방식이 우리에게 유용할 것이라 생각한다. 대다수는 들어보지도 못했거나 들어봤다 하더라도 남성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여기지 않는 단어를 남성 혐오로 규정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움직임이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조오억개' 같은 단어. 그들은 해당 단어에 애초 함의된 바 없던 남성 혐오라는 허구를 만들어내 이를 권력으로 여성 혐오를 정당화한다. 이때 이 단어를 말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그들에게 힘을 실어줄 뿐이다. 그들의 의도가 입막음이라면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함으로써 그걸 도와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더 나은 대응은 단어를 되찾아와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공격의 빌미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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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5-11 14: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워드 슬럿>은 9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로 선정해둔 참인데, 책먼지 님의 이 페이퍼를 읽노라니 어서 빨리 9월이 됐으면 좋겠어요. 읽고 싶습니다. 언급하신 이라영의 책은 내내 벼르고 아직도 구입하지 못한 책이네요. 이라영이라면, 아마도 책먼지 님 처럼, ‘남몰래 무척 애정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서재브리핑에 글 올라온 거 보고 반가운 마음에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역시 1등이네요? 껄껄.

책먼지 2023-05-12 10:16   좋아요 0 | URL
으아 제가 본의 아니게 예습을 해버리고 말았군요!! 이 책 내용도 좋지만 말투가 엄청 유쾌해요(읽으면서 다락방님 글 닮았다는 생각을 살짝 했답니다!!) 요즘 무슨 책을 읽어도 감흥이 별로 없었는데 이 책 덕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다락방님도 이라영 작가님 팬이셨나요!!! 핡💕 <말을 부수는 말>은 시의성이 있어서 몇년만 지나도 지금처럼 확 와닿지는 않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 좋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1등 축하드립니다💕🎉🎂🎊🥳 드릴 건 그저 저의 격한 애정과 감사뿐..❤️

공쟝쟝 2023-05-11 17: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조오억개!! ㅋㅋ 맞는 말 대잔치!!! 저는 적어도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지쳐서 못 싸우는 사람까지는 모르겠고요.. 뭐 좀 쉴 수도 있죠..) 미러링 전략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하고(물론 희진샘은 회의적이십니다) 부단히 언어에 대해서 사유를 하는 것(그걸 글로 써내는 것)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그냥 막쓰는 사람들은 그런 언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사유 안하고 막쓰거든요.

더 고급스러운 언어를 발명하는 것까지는 아직 못하지만 일단 오조오억오조오억오조오오오오오오억!!!

책먼지 2023-05-12 10: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오조오억개 오조오억개 오조오억개!!!!! 쟝님의 이 댓글을 제가 오조오억번 좋아합니다💕
저는 미러링이 끝나지 않는 복수의 복수의 복수를 낳는 것 같아서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습니다(일회성이라는 점에서도요!! 반복하면 바로 충격요법이 효과를 잃는 느낌) 하지만 욱하면 미러링이고 뭐고 다하는 편ㅋㅋㅋㅋ 그런데 이 책에서 제시한 방법은 긍정으로 부정을 이기고 단어를 탈환해온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부단히 언어에 대해 사유하고 글로 써내는 게 중하다는 것에 너무너무 공감합니다!! 쟝님 글들을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어흑 맞아요.. 좀만 생각할 줄 알아도 수치스러워서 그냥 막쓰고 못살죠!!!

자목련 2023-05-12 1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급해주신 이라영의 책은 목록을 살펴보니 궁금해지네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 제대로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