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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졌던 소설!"
노벨문학상 수상 때문인지, 도서관 전체 보유 권수가 늘었음에도 한참을 기다려서야 받을 수 있었던 <소년이 온다>는 읽고 난 후 다시 더 꼼꼼히 읽어보고 싶을 정도의 긴 여운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었다.
특히 마지막 6장에 서술된 내용은 소중한 자식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엄마의 절절한 마음을 담고 있어 유독 더 마음이 쓰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또 과거 어느 영상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에필로그를 통해 그 내막 또한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열흘간 광주에서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그리고 있는 소설로, 저자 자신이 실제로 광주에서 살 당시 인연이 있던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시작은 아버지가 감춰둔 사진첩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열두 살 저자는 그 사진첩에서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것을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살다가 후에 취재와 고증을 통해 세상에 내놓게 된다.
특히 <소년이 온다>의 '소년'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소년 '동호'의 경우 저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저자의 아버지가 가르쳤던 제자이자,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동호의 집이 실제 저자가 살았던 옛집이기 때문이다.
이 인연으로 후에 광주를 찾은 저자는 5.18에 관련된 정보를 모으는 한편, 수소문하여 동호의 친형을 찾게 되고 그를 인터뷰하면서 마침내 동호를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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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 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21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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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년이 왔고, 저자는 앞서 나가는 소년을 따라 그날의 처참하고 어두웠던 이야기를 써 내려가게 된다. 그때에 그 자리에 있었던 그들 덕분에 현재의 우리는 아마도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다시는 그때의 그 악몽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런데 그런 우리의 믿음에 찬물을 끼얹듯, 2024년 비상계엄이 갑작스레 선포되었다.
한밤중 날아든 그 사건으로 2025년 새해가 밝은 지금까지도 우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현재 거리를 메운, 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는 거리의 시민들과 그때 광주의 시민들이 오버랩되며 다시금 끔찍한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반복, 자행되는 이런 상황을 과연 언제까지 두고 봐야만 하는가 문득 그런 의문이 든다.
현장에 있었던 다섯 명의 이야기에 더해,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엄마의 가슴 아픈 이야기까지 읽다 보면, 어느새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더불어 이것이 단 열흘 동안의 일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아무 죄 없는 이들이 도처에서 폭력과 희롱을 당하고,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상황은 끔찍함을 넘어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의 만행처럼 느껴진다.
들어는 봤지만,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때 그 현장의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생생히 만나보며, 어떤 것을 기억하고 지켜나가야 할지 가슴에 새기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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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및 배경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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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관
처음에는 시신을 도청 민원봉사실 복도에 안치했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상무관으로 옮겨 시신을 관리하게 된다.
■동호
-중학교 3학년으로 만 15살
-부모님, 두 명의 형
-큰형은 서울에서 9급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음
-작은형은 늘 1등을 하는 수재지만 대학 시험에서 거푸 실수를 해 삼수 중
※취재에 응해줬던 형은 작은형임. 당시 큰형은 서울에 따로 살고 있었음
■박정대
-동호와 동갑내기 친구
-동호네 사랑채에서 누나와 함께 세 들어 살고 있음
-아버지는 대전에서 일하고 있어 따로 살고 있음
■박정미
-스무 살
-정대의 친누나
-방직공장에서 근무
-혼자 검정고시 공부를 하며 의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음
-일요일에 행방불명 된 이후 계엄군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됨
■김진수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휴교령 때문에 광주로 내려왔음
-예쁘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음
-희생자 파악과 시신 관리를 총괄, 필요한 물품 조달업무
-수감 후 외모 때문에 변칙적인 고문을 더 당함
■은숙
-수피아여고 3학년
-대학 생활을 하다 여러 이유로 포기하고 작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함
-담당 원고 검열 문제로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가 일곱 대의 뺨을 맞음
-상무관에서 시신을 관리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음
■임선주
-봉제공장에서 일하던 당시 노조활동을 하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뒤 직업을 바꿔 충장로에 있는 양장점 미싱사로 근무
-상무관에서 은숙과 함께 시신을 관리하는 자원봉사를 함
-추후 경찰에 연행되면서 끔찍한 성 고문을 받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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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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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어린 새 "동호의 이야기"
정대는 동호네 집 상하방에서 누나와 함께 자취하고 있는 동갑내기 친구로, 둘은 함께 시위대의 행진 도중 인파에 몰려 정대와 떨어지게 되고 잠시 후 동호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쓰러져 죽은 정대를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계엄군이 지나간 뒤 정대를 찾기 위해 상무관으로 오지만 정대의 시신은 찾지 못한다. 그러다가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에 그곳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시신들 위에 천을 덮어주거나, 가족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씩 걷어서 얼굴을 보여주거나, 시신에 대한 기록(장부에 날짜와 시간을 적고 죽은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기록)을 하는 업무였다.
2장. 검은 숨 "죽은 정대의 이야기"
시위대의 행진 도중 총에 맞아 사망한 정대는 어딘가로 실려가게 된다. 그곳은 정대와 같은 시신들을 쌓아두는 검은 숲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다.
이미 사망한 후 혼의 형상으로만 남아있던 정대는 영혼이 몸에 묶여 자신의 몸에 피가 흐르고, 살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과정을 낱낱이 목격하게 된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나를 왜 죽였고, 누나는 왜 죽였는지, 또 어떻게 죽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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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 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5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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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사람들을 급기야 탑처럼 쌓아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것도 직접 확인하게 되는데, 그렇게 몸이 사라지면서 정대는 자신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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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몸에 달라붙어 썩어가던 피 묻은 옷들이 가장 먼저 타서 재가 되었어. 다음으로 머리카락과 잔털들이, 살갗이, 근육이, 내장이 타들어갔어. 숲을 집어삼킬 듯 불길이 치솟았어. 대낮같이 공터가 밝아졌어.
그때 알았어. 우리들을 여기 머물게 했던 게 바로 저 살갗과 머리털과 근육과 내장이었다는걸.
(...)
우리들의 몸은 계속 불꽃을 뿜으며 타들어갔어. 장기들이 끓으며 오그라들었어. 간헐적으로 쉭쉭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우리들의 썩은 몸이 내쉬는 숨 같았어. 그 거친 숨이 잦아든 자리에 희끗한 뼈들이 드러났어. 뼈가 드러난 몸들의 혼은 어느샌가 멀어져, 더 이상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마침내 자유였어. 이제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었어.
어디로 갈까, 나는 자신에게 물었어.
누나한테 가자.
하지만 누나가 어디 있을까.
(...)
나를 죽인 그들에게 가자.
하지만 그들이 어디 있을까.
(...)
너에게 가자.
그러자 모든 게 분명해졌어.
61~6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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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내, 너마저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게 어디인지 모르지만, 동호가 죽는 순간을 느끼게 된 것이다.
3장. 일곱 개의 뺨 "은숙의 이야기"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해 다니던 그녀는 아버지가 뇌출혈로 오른쪽 몸을 못쓰게 되면서 엄마는 약국 보조원 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리기 시작했고, 은숙은 휴학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안 일과 두 동생을 돌보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가 스스로 거동을 할 수 있게 될 무렵 복학했으나, 한 학기 만에 다시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하게 된다. 그렇게 2학년까지 마친 뒤 결국 졸업을 포기했고 교수의 추천으로 작은 출판사에 입사하게 된다.
당시에는 출판사가 책을 출판하기 전에 당국의 원고 검열을 받은 후 출판할 수 있었는데, 담당하던 원고의 검열 문제로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간 은숙은 그곳에서 치욕적인 '일곱 대의 뺨'을 맞게 된다.
한대 한 대를 잊으려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 은숙의 이야기 속에는 살아있음에 대한 치욕, 그리고 죽어서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동호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절절히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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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스러운 데가 있다. 먹는다는 것엔. 익숙한 치욕 속에서 그녀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이다. 삶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게는 삶이 있었고 배가 고팠다. 지난 오 년 동안 끈질기게 그녀를 괴롭혀온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기를 느끼며 음식 앞에서 입맛이 도는 것.
8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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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102~10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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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쇠와 피 "진수의 이야기"
윤은 진수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사람을 찾아 진수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다. 진수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검하며 그때 그 사건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다면서.
아무개는 진수와 함께 생활했던 수감생활과 이후 그와 함께 나들에 대해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하는데, 그 속에는 무자비함과 지나친 폭력성이 가득했다.
아무개는 감옥에 투옥된 후 진수와 한조로 생활했던 사람으로, 가까이에서 진수의 생활을 목격하게 된다. 진수는 여성적인 외모를 가졌다는 이유로 수감된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더 변칙적인 고문을 당했는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성 고문이었다.
이후 재판을 통해 판결이 내려지지만 곧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면서 이들은 각자 흩어져 자신만의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다 간혹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었는데, 무력감과 회의감으로 점점 피폐해지는 진수를 목격했다고 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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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 해 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다는 걸 증명한 거야.
13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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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겨울날 진수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서 화장장까지 갔다가 돌아온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전한다.
윤은 진수가 유서와 함께 남긴 사진을 건네며 그 속에 있는 직선으로 나란히 쓰러져 죽어 있는 아이들에 대해 묻는데, 그 아이들은 바로 도청에 끝까지 남아있던 다섯 명의 아이들이었다.
바로 자신들이 캐비닛에 숨어있다가 조용해지면 나와서 항복하라고 일러두었던 바로 그 아이들. 아이들은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계엄군은 자비 없이 어린 학생들을 빨갱이 치부하며 망설임 없이 총을 발사해 그 자리에서 사망케 한다.
그리고 한 줄로 걸어오고 있던 아이들은 그렇게 나란히 그 자리에서 사망하게 되는데, 그 사진 속 모습이 바로 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동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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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13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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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밤의 눈동자 "선주의 이야기"
선주의 이야기는 현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앞서 진수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 아무개를 찾아갔던 윤이 이번에는 성희에게 선주의 연락처를 물어 연락해 왔다.
윤은 자신이 쓰고 있는 논문 주제와 심리 부검의 초점으로 삼았다는 시민 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인터뷰를 요청한다. 하지만 선주는 그대로 거절한다.
그리고 십 년 만에 그는 다시 연락해 꼭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며, 끈질기게 설득을 이어나간다. 인터뷰가 어려우면 녹음을 해달라며 녹음기까지 소포로 보낸다.
선주는 올해로 만 사십 삼세가 되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때의 그 일은 여전히 선주의 발목을 잡고 있다. 때문에 선주는 짧은 결혼생활을 끝으로 더 이상 남자와는 얽히지 않으며, 근무하고 있는 직장에서조차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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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는 중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일을 시작했다. 교도소에서 보낸 일 년여의 시간을 제외하면 한 번도 노동을 멈춘 적이 없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열다섯 시간을 일했고, 한 달에 이틀을 쉬었다. 봉급은 남자 공원의 절반을 받았으며, 잔업수당은 없었다. 하루 두 알씩 타이밍을 먹어도 잠을 매번 쏟아졌지만, 꾹꾹 참아가며 일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퇴근하는 여공들을 몸수색하던 경비들은 브래지어 언저리를 더듬어 갖은 치욕을 맞보게 했다. 여공으로 일하는 동안은 치욕, 기침, 잦은 코피, 두통, 가래를 뱉으면 뭉쳐져 나오던 거무스레한 실밥 덩어리는 기본이었다.
그렇게 인간 같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지내던 중 노조 활동을 하다 잡혀가게 되면서 여기저기 맞아 장 파열로 입원하게 되고 이후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이후 고향 집으로 내려가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더 이상 방직공장에서는 일할 수 없게 되면서 선주는 친척의 주선으로 광주 충장로의 양장점에서 미싱사 시다로 취직하게 된다.
그리고 어렵게 배운 기술로 삼 년 만에 미싱사로 일하게 되었을 때가 스물한 살이었다. 그러다가 양장점 주인이 대학생 아들을 데리고 영암의 동생 네로 내려가 버리게 되면서 낮에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선주는 그렇게 상무관으로 가게 된다.
***
윤은 계속해서 기억해달라고,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선주에게 있어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여성으로써 너무나 끔찍한 성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이년 동안 하혈을 하고, 현재까지도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그 일을 어떻게 증언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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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 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 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6~16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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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는 총기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다른 여대생들과 따로 수감되었고 거기에서 빨갱이 년으로 불리며, 하혈 끝에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석방 후 정미(정대의 누나)가 그 봄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나중에 카톨릭센터 외벽에 붙어있는 사진을 통해 도청 안마당에 처참한 모습으로 모로 누워있는 정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선주는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6장. 꽃 핀 쪽으로 "동호 엄마의 이야기"
이 장에서는 삼십 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어린 아들을 추억하고 기억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애끓는 모성에 더해 후회와 자책에 시달리는 엄마의 모습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엄마는 늦둥이로 태어난 아이의 사랑스러움부터, 문간방에 세 들인 남매에 대한 원망과 미안함, 여기에 더해 다른 아들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로 둘러댄 상황까지 떠올리며 막내아들을 잃고 시린 겨울 속을 살아온 날들을 회상한다.
장례까지 치르고, 아들들이 장성한 뒤에도 여전히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막내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엄마는 가만히 아들의 이름을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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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찾아갔을 적에, 네가 그리 순하게 저녁에 들어갈라요,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으까이. 나는 안심을 하고 집에 가서 느이 아부지한테 그랬어야.
여섯시에 문 잠그고 집에 온다요. 다 같이 저녁 묵자고 약속했소. 그란디 일곱시가 되도록 네가 안 들어온게, 느이 작은형하고 나하고 둘이서 집을 나섰다이. 계엄이라 일곱시가 통금인디.
(...)
꼬박 사십분을 걸어서 가본게 상무관에는 불이 꺼지고 아무도 없어야. 도청 앞으로 간게 총 든 시민군들이 지키고 섰드라마는, 우리 막내아들을 만나봐야겄다고 사정한게, 어리디어린 그 시민군들은 파랗게 얼굴이 굳어갖고 안된다고, 아무도 들여보내면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라이.
(...)
제발 들어가게 해주소, 하고 나는 빌었어야.
(...)
지금 들어가면 못 나옵니다. 저 안에는 죽을 각오가 된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느이 작은형이 알겄다고, 일단 들어가게만 해달라고 언성을 높일 적에 내가 말을 막았다이. 그 아그가 기회를 봐서 제 발로 나올라는 것이여... 분명히 나한테 한속을 했단게.
(...)
이라다가 남은 아들까장 잃어버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을 했다이.
그렇게 너를 영영 잃어버렸다이.
184~18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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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아쉬움으로 통탄하게 되는 그날 그 시점에 대해 회상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때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후회와 자책이 짙게 베어나 더 마음이 아픈 부분이다.
그날 그냥 손을 붙잡고 데리고 왔다면, 동호가 그렇게 순순히 집에 온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둘째 형을 말리지 않았다면 등등.
엄마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얼마나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가슴을 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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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말이다이, 내가 뭣한다고 문간채에다 사람을 들였을까.... 생각한다이. 그까짓 사글세 몇푼 받겄다고... 정대가 이집으로 안 들어왔으면 네가 정대 찾는다고 그리 애를 쓰지 않았을것인디...
(...)
내가 그 불쌍한 남매를 원망하면 큰 죄를 받제.
18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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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더 거슬러 올라가 아들을 죽게 된 원인에 대해 곱씹는다. 문간채에 들인 남매를 괜히 들였다고, 그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면 아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하면서도 이내 좋은 친구가 되어준 정대와 남매에게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내심 원망마저도 갈 곳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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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다시 와도 땀이 안 나도록, 뼛속까지 심장까지 차가워졌다이.
1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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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다 이렇지 않을까? 잘못한 것도 없이 한순간에 어린 자식이 총살당해 죽었다. 그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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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끄나, 내가 서른 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
너는 달랐는디. 왼쪽젖을 물리면 물리는 대로, 이상하게 생긴 젖꼭지를 순하디 순하게 빨아주었는디. 그래서 두 젖이 똑같이 보드랍게 늘어졌는디.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
어쩌끄나, 젖을 뗄 적에 너는 손톱이 종이맨이로 얇아질 때까지 엄지손가락을 빨았는디, 온나, 이리 온나, 손뼉 치는 내 앞으로 한발 두발 걸음마를 떼었는디. 웃음을 물고 일곱걸음을 걸어 나헌테 안겼는디.
1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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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기쁨을 선사한 어린 막둥이에 대한 애정이 절절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태어날 때부터 순하디 순한 아이가 방긋 웃던 순간, 엄지손가락을 빨던 습관, 한발 두발 걸음마를 떼며 안기던 순간.
이 모든 순간이 눈에 아른거리며 평생 가슴에 남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기억 때문에 엄마는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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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19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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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유일하게 당시의 아들 모습을 볼 수 있는 사진은 아마도 증명사진이 아니었을까? 중3, 졸업하지 못한 채 생을 다한 동호는 졸업앨범에서조차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래서 학생증의 사진을 오려 지갑 속에 고이 넣어두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동호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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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19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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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적부터 밝은 곳을 좋아했던 동호. 그늘이 지는 곳이 싫어 반짝 해가 뜬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던 동호.
어쩌면 그런 동호였기에, 어둠을 몰고 오는 계엄군에 용감하게 맞섰는지도 모르겠다.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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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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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13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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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고에 휘말렸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바로 위와 같은 말이다. 매일같이 악몽을 꾸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죄책감에 죽지 못해 살아간다 말한다.
이 책에 언급된 생존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렸다. 학살과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피폐하고 고립된 상태로 살아간다.
날마다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며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몸서리치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쩌면 이 문장은 이 책의 전체를 아우르는,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문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유독 더 인상 깊게 다가왔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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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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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1980년 5월 광주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 났다.
특히 엄마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서술되는 만 15살의 어린 동호에 대한 이야기는 더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왜 시위 현장에, 끔찍한 몰골로 누워있는 시체가 가득한 상무관에, 또 굳이 없어도 됐었던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을까? 그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들조차 참여하지 않았던 현장에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에서 엄마는 늦둥이 막내아들을 떠올리며, 나무 그들이 햇빛을 가리는 것조차 싫어했던 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를 통해 어쩌면 본능적으로 어둠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또 생생한 증언을 통해 서술되는 여러 고문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사람이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그들은 어쩌면 사람이 아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화나 다큐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들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들을 텍스트를 통해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면 읽다 보니 그저 악마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사람을 난도질하듯 고문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으로 사람을 쏘아대는 모습에는 그 어떤 도덕적 양심이나 부끄러움,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여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달까?
상황이 이쯤 되니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인터뷰를 요청한다고 해도 피해자 입장에서는 선뜻 증언을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선주처럼 과거 큰일을 겪고 그 일로 현재까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증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에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우리는 그날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토록 잔혹했던 지난 1980년의 5월을, 온몸을 다 바쳐 민주주의를 지켜낸 그 도시의 열흘을.
앞선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언제든 평온한 우리의 일상이 무너질 수 있음을, 누군가 또 권력을 무기로 삼아 총칼을 들이댄다면 당장이라도 지옥 같은 날들이 펼쳐질 수 있음을 말이다.
어쩐지 오늘만큼은 마음으로나마 희생된 이들의 혼을 위로하는 초를 밝혀두고 싶다. 동호가 그러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