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ㅣ 오늘의 젊은 문학 4
이경희 지음 / 다산책방 / 2022년 1월
평점 :
이토록 유쾌하고 매혹적일 수 있을까?
누구든 이 책을 손에 잡는 순간 눈에서 뗄 수 없는 SF 속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조금은 이질적으로 느껴지던 SF 장르물의 개념을 뛰어넘어 제목처럼 '다정한' 이야기들 속에서 과거/현재/미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태까지 봐왔던 여느 SF물들은 아주 조금씩 느껴지던 이질감이 있었다. 이건 나만이 느끼는 부분일 수도 있지만 약간은 미심쩍은, 조금은 틈이 있는 것 같은, 약간의 괴리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완전히 융합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SF 장르를 접할 때마다 느껴지곤 했는데 이 책을 읽는 순간 그 틈이 완전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
<목차>
살아 있는 조상님들의 밤
우리가 멈추면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
바벨의 도서관
신체 강탈자의 침과 입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
=====
이 책에 수록된 6가지 소설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었고, 현실적이었으며, 유쾌했고, 사회적 문제들을 담고 있었다. 무엇보다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상상의 끝의 끝을 그리는 미래의 모습과 컴퓨터 부품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만 같은 환상이 그려지는 필력을 통해서 무한의 이미지를 그릴 수 있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소설 속 공간들은 상상할 수 있지만,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냈다.
재기 발랄하고 획기적인 아이디어와 3D, 4D,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공간을 생성해냄으로써 하나의 영상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다. 6편의 그 어느 소설도 버릴 것이 없는 매력과 개성이 있어 SF 장르물에 대해 거부감이 있거나 어렵게 느끼는 사람에게 꼭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은 읽는 내내 귀에서 피딱지가 생기는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잔소리를 피해 한껏 움츠린 자세로 요한나 일행의 뒤를 따라다니며 때론 좀비 같은 조상님들과 맞서 싸우기도 하는데 설정 자체가 기발하고 서술되는 몇몇 부분은 상상만으로도 빵 터지는 웃음을 유발하곤 했다. 여느 좀비들과 다르게 다시 살아난 좀비들이 조상님들이라는 점과 전염병을 전파하거나 누구를 해치는 폭력성이 아닌 잔소리로 상대방을 무력화시킨다는 점은 매우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 없애기 운동 본부 →조상 없애기 운동 본부로 변경
▶내 부모 내 손으로 보내드리기 협회
▶이성으로 미신을 물리치는 과학자들의 모임
한국 사회의 단면을 적절히 보여주는 작명 센스도 엿볼 수 있다.
=====
스티브 잡스가 무덤에서 뛰쳐나와 아이폰 엔지니어들을 고문하고 있었고 유럽에서는 히틀러와 처칠, 드골 사이에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마오가 되살아난 중국은 참새를 잡느라 여념이 없었다.
36페이지 中
=====
온갖 종류의 조상님들이 되살아나 말로써 폭격을 가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엄마의 잔소리 폭격은 저리가라일것이다. 기발하면서 유쾌한 '너의 다정한 우주로부터' 소설의 시작은 그렇게 웃음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우리가 멈추면>은 먹먹하고 찡~한 스토리로 감동을 주는 소설이었다. 현실 속 노동자들의 문제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으며 정치인과 사측(기업)의 태도 변화나 언론을 활용한 여러 가지 대응 부분에 있어서도 현실과 판박이인 부분들이 많아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비대면의 생활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 속에서 반대로 접근하는 세경의 모습을 통해 직접 얼굴을 맞대고, 관계를 맺어가는 것,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
우리가 멈추며어어어어어언!
(...)
우주가 멈춘다아아아아아!
129페이지 中
=====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을 읽으면서는 내내 컴퓨터 속 부속품 중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혹은 메타포 세계 속 아바타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들이 쫓던 욕망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아마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욕망구현장치'를 손에 넣게 된다면 어떤 욕망을 실현하고 싶으신가요?
<바벨의 도서관>은 말 그대로 환상의 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느낌이었다. 바벨의 도서관 속에서 펼쳐지는 공간의 입체감은 높이의 끝도 공간의 끝도 알 수 없었다. '24만 3542층'이 상상이 되시는가? 사람 같기도, 기계 같기도 한 이들의 이상스런 모습은 그저 언제든 교체할 수 있는 껍데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외형에 상처가 나면 피가 나듯 쇳물이 뚝뚝 떨어진다.
=====
제이는 다리를 하나 잃었다. 녹아내린 절단면에서 붉은 쇳물이 뚝뚝 떨어졌다.
218페이지 中
=====
소중한 알파를 지키기 위한 <바벨의 도서관>에서의 오랜 사투를 끝내고 다다른 마지막에는 반전의 소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푸네스가 건넨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신체 강탈자의 침과 입>은 코로나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 현실 세계에서 손을 잘 씻는 것과 같은 개인위생의 중요성과 위협성을 재미있게 잘 그려낸 소설 같다. 술잔을 돌리고, 손을 씻지 않는 등의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외계인들이 퍼트린 바이러스 전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부분과 그들을 피하기 위해 KF94 등급 마스크를 쓴다는 설정은 코로나 바이러스를 겪고 있는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통해 익살스럽지만 무게감 있는 현실의 문제를 잘 다룬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먼 미래의 유크로니아>는 해당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이다. 그만큼 탄탄한 스토리와 드넓은 우주의 억겁의 시간 여행을 경험할 수 있다.
=====
떠나세요. 당신만의 유크로니아로
=====
당신만의 유크로니아는 어디인가요? 30년 동안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지구! 은하의 죽음 이후 미래로 떠나버린 하나와 그런 하나를 따라 웜홀을 지나 미래로 직진하는 정원! 미래를 향해 도약할수록 인류와 우주의 모습은 수없이 변화를 거친다. 2077년, 2098년, 6763년 (...) 18542년 인공지능 기계와 신체를 결합한 인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과거를 복원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겼다. 20000년, 25922년 (...) 점차 세계는 희미해졌고 경계는 점점 녹아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기존의 기준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25900년 (...)
=====
나와 같은 사람들을 인터섹스라고 불렀어요.
(...)
굳이 따지자면 은하는 트랜스젠더였어요. 하나는 바이섹슈얼이었고, 동시에 우리는 폴리아모리였고, 레즈비언이었고, 젠더 플루이드라고 불리기도 했어요.
313~314페이지 中
=====
우리가 규정지었던 젠더와 인종, 성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억겁의 시간이 지난 미래의 모습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
인간은 함께 와서 함께 떠나요. 중간에 잠시 혼자가 될 뿐
327페이지 中
=====
우리는 보통 혼자 와서 혼자 떠난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는 오히려 '함께 와서 중간에 잠시 혼자였다가 함께 떠난다'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자신이 믿는 신념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하나에게로 향하는 미래 도약 주기는 점점 길어져 금세 수천만 년이 흘렀다. 대륙판이 이동한 탓에 아프리카 대륙이 둘로 쪼개지고 지중해는 거대한 산맥으로 변했다.
52억 3520만 5639만 년
78억 8262만 2109년
89억 2537만 1921년
1조 2222억 4729만 3740년
미래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도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의 끝으로 향하는 여정을 하나와 정원이를 따라가다 보면 인류의 진화와, 우주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SF라는 장르를 통해 최대한의 시간과 공간의 끝에 다다르는 순간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되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모습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도, 엉망일 수도 있다.
=====
저는 모든 존재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실수를 했어요.
(...)
당신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요. 더 작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길. 더 약한 이들에게 섬세하길. 더 사랑할 것과 덜 사랑할 것을 구분할 수 있길..
350페이지 中
=====
"1조 2222억 4729만 3740년" 숫자로 헤아릴 수도 없는 미래의 시간이 상상이 되는가? 황폐해진 지구의 모습, 화성과 목성, 천왕성에 거주하는 인류, 먼지 파편처럼 사라진 행성들, 지구에서 달까지 쌓아올려진 탑, 미래로 향할수록 인간인지 인공지능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변하는 외형, 이후에는 그마저도 형체의 경계가 사라진 인류의 모습, 사랑하는 방법마저도 완전히 변해버려 모든 것이 '기존의 모습'을 잃어버린 혹은 변해버릴 만큼의 시간이다. 지루할 틈도 없이 우리는 그렇게 억겁의 시간을 거쳐 미래로 향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끝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한 번쯤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누군가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고도 말하고, 누군가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빙하기가 도래하여 인류의 멸망을 논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여 지금보다 나은 인류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지구 한정의 공간이 아닌 우주 공간 전체를 두고 미래를 그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는 누구나 그릴 수 있고, 꿈꿀 수 있다. 미래의 모습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