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 보통날의 그림책 1
마리야 이바시키나 지음, 김지은 옮김 / 책읽는곰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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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담은 이국의 단어가 건네는 공감과 위로"



때때로 말이 마음을 다 담지 못할 때가 있다. 지금의 기분과 생각, 상황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동동거리다 겨우 비슷한 단어를 이어붙여 내뱉었던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좀처럼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그런 내 마음에 아름다운 이국적인 말들로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돕는다.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언어들이지만, 그럼에도 자꾸 곱씹게 되는 건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미묘한 감정과 상황을 정확히 나타내는 단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가 느끼는 감정이나 삶은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큰 의미에서 모두가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이 기회를 통해 마음 깊이 자리한 내 감정을 들여다보고, 어떤 단어가 내 마음을 대변하는지, 또 어떤 감정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지 고민해 보면 어떨까?


그런 후 나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순간이나 혹은 그런 날, 나만의 이름표가 붙은 단어들로 그날을 기억해 보자. 이를 통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생생하게 떠올릴 하나의 추억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이 책은 각 나라의 분위기나 특징을 잘 살려낸 그림과 세계 17개국 71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덕분에 페이지마다 그 나라를 여행하는 기분이 물씬 느껴진다.


발음이나 어휘가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 대다수인데, 하나하나 발음하다 보면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들이 어느새 내 마음에 쑤욱 들어와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세계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나만의 단어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아래는 개인적으로 내 마음에 와닿았던 단어들 위주로 소개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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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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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히도니아

일을 다 끝마쳐서 더는 그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


●쿠리

몸을 웅크린 채 구석에 누워 있는 것.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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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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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슈트페르틀리

차를 타고 가면서 꽃구경하기.

활짝 핀 봄꽃을 보려고 속도를 줄여 차를 천천히 모는 일.


●슈투름프라이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 없이 집에 혼자 남아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게보르겐하이트

완벽하게 안전한 기분.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며, 믿음과 사랑을 나누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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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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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타

목적 없이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면서 들려오는 소리와 풍경을 즐기는 일.


●메라키

어떤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 깊이 녹아 들어가 진심과 영혼을 쏟아붓는 상태. 무슨 일이든 메라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를테면 사랑을 담아 누군가를 위해서 커피를 내리는 일. 우리는 이런 작은 일상에도 온 정성을 다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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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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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겐프리스크

잘 자고 일어난 새벽에 느끼는 상쾌하고 청량한 기분.


●휘게

일상에서 얻는 기쁨. 맛있는 아침 식사, 친구들과의 만남, 영화 관람처럼 단순한 일에도 감사할 줄 아는 능력.


●아르바이스글라에데

일에서 느끼는 행복감. 남들이 얼마나 우러러 보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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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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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칸

어떤 일을 서두르지 않고 즐기면서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뿌듯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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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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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드

즉흥성과 지혜. 틀에 박힌 생각에서 벗어나면 적은 것으로도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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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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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타 렛다스트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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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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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르 알 디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기에 오늘에 충실하기.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기.


●바실란드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보다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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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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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지성베이

커다란 기쁨을 맛본 뒤에 찾아오는 텅 빈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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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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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무오베레

누군가의 이야기가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


●돌체 파르 니엔테

모든 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달콤한 게으름.

그 순간을 즐기는 일이니, 시간을 허비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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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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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젤리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만들어 내는 감각.

자신보다 더 굉장한 것에 속해 있다는 기분.


●아윗바이언

산책을 하면서 여러 가지 불필요한 생각을 거두고 머리를 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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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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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엘반트

산길을 걷는 습관. 등산은 목표를 만들어 주고 육체 활동은 기쁨을 가져다 준다.


●포렐스케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에테르포클록스카프

실수로부터 얻은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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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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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즈분다르

가슴속의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일


●데센하스칸쿠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때에도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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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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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결단력과 회복력을 보여 주는 것.

어떤 도전에도 대처할 수 있는 내적 능력.


●라스키아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갖는 용기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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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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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페이제

낯선 나라에서 익숙지 않은 상황에 놓였을 때 경험하게 되는 새로운 감정.


●주아 드 비브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뻐할 이유이다. 움직이고, 보고, 햇살의 따스함이나 친구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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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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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곰

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필요한 만큼.


●피카

함께 모여 커피나 디저트를 즐기며 수다를 떠는 시간.


●레스페베르

여행을 떠나기 직전, 불안과 기대로 가득 차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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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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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가이

매일 아침 당신을 눈뜨게 하는 삶의 의미.


●아운

가까운 친구끼리 아무 말 없이도 서로 이해하는 것




낯설지만 익숙한 나의 감정을 대변하는 이국적인 단어들 속에서 나의 감정을 대변할 수 있는 '이름'을 찾았기를. 이 단어들을 통해 특별한 순간을 다시 한번 느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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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치고 잘 뛰네 - 남자들의 세상 속 여자들의 달리기
로런 플레시먼 지음, 이윤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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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비를 넘어 마침내 발견한 나를 위해 달리는 법!"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문득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과 무시, 혹은 부당한 대우들이 왜 이토록 오래도록 사회 깊숙이 뿌리내려 여성들을 괴롭히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여성만 할 수 있는 일들(이를테면 출산 등)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며 강요와 의무로 덧씌우면서 왜 여기에는 어드밴티지가 붙지 않을까? 더불어 왜 여성이 상품화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대한민국 안에서만 벌어지는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아주 오랫동안 뿌리 깊이 자리 잡으면서 삶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고,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여성들은 많은 부분에서 차별을 받으며 살고 있다.


법을 바꾸고, 공식적인 선포를 통해 알려도 실제 시스템에 도입이 되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기에 어쩌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스포츠계에서 오랫동안 몸담았던 한 소녀가 여성 장거리 챔피언으로 성장하고 이후 은퇴하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는 회고록이자 여성 스포츠에 실상에 대해 가감 없이 고발하는 선언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스포츠와 큰 연이 없는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여성 스포츠인들만 알고 있는 비밀 아닌 비밀을 이 책을 통해 공개함으로써, 뛰어난 여성 선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와 남성 선수와는 달리 여성 선수들이 오랫동안 성적을 낼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힌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오랫동안 타인이 아닌 자신을 위해 달리는 법을 찾으면서 관찰하고 실험하고 배우면서 얻었던 모든 것들을 총망라해 이 책에 담음으로써 후대에는 동등한 평등과 권리를 갖기를 희망한다.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정책과 시스템, 그리고 몸이 성장함에 따라 성적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을 객관적 지표로 조목조목 밝히면서 미래 여성 스포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한다.


이를 통해 여성이 스포츠와 더 가까워지기를,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에 큰 변화가 일기를, 마지막으로 여성을 성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마주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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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적으로 보면 좋을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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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의 달리기 사랑이 실패와 경험을 거치며 챔피언의 자리에 이르게 한 성장담의 과정

■여성 스포츠의 뒤떨어진 시스템과 현주소

■평생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 달리는 법을 배우려 노력한 저자의 끝없는 도전과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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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통해 살펴보는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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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로런은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의 육아정책에 따라 어릴 때부터 몸쓰는 일을 즐기며 성장하게 된다. 때문에 아빠의 영향을 유독 많이 받으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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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빠의 눈, 힘을 가진 자의 눈, 남성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2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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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사용하는 것은 저자에게 강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고, 때문에 단순히 몸쓰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든 이기기 위해 몸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바뀌어갔다. 특히 남자아이들을 이길 때마다 인생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곤 했다.


그때쯤 학교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교육했으며, 신체적 외모와 아기를 가지는 것 외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고 가르쳤다. 또 이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또 이때에는 곳곳에서 '최초의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기회가 주어지던 시기였는데, '최초'의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저자에게 있어 최초의 여성들은 무척 중요했다.


남녀 구분이 되지 않던 시기에는 항상 달리기로 1등을 차지하던 저자는 어느 날 사춘기에 접어든 로키가 저자의 최고 기록보다 1분을 단축하는 것을 보고 이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춘기가 가져오는 변화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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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여성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몸이 외모 말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그 전까지만 해도 사춘기는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

내 몸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운동할 때면 몸에서 안정적이고 믿음직스러운 힘을 느꼈다. 같은 반 여학생들에게 호감을 가진 남자아이들의 눈에 띄지 않아도 운동선수로서의 자신감 덕분에 쉽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

하지만 로키에게 진 뒤로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의 몸이 변한다는 사실은 나의 우정과 사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변화하는 소년의 몸이 내 정체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27~2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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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또 한 번 몸의 변화에 대해 자각하는 시점이 발생하는데, 8학년 댄스 파티를 위해 드레스 쇼핑을 하던 중 친구들과 자신을 몸을 비교하면서다.


스포츠에서 내가 강력하다고 느끼게 해준 몸은, 이제 올바른 몸, 여성으로서 자격을 갖춘 몸과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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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여성 운동선수들의 삶과 커리어에서 계속 반복되는 현상, 즉 남성 지배적인 시선을 받는 여성의 신체 기능과 외모 사이에서의 충돌, 육체적으로 강한 동시에 성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다.

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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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또래의 아이들보다 성장이 더뎠던 저자는 오히려 육상에서는 빛을 발하게 된다. 캐니언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키가 125 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고, 몸무게가 35 킬로그램에 불과했는데, 그런 작은 체구 덕에 선배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은 물론, 친구들도 얻을 수 있었다.


크로스컨트리에서는 처음에 달리기 그룹 '새내기'에서 시작해 둘째 주에는 주니어 대표팀으로 옮기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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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달리기는 더 넓은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몸은 가벼워졌고 얼굴은 경외감으로 부드러워졌다. 하늘을 나는 건 아니었지만 하늘이 가까이 있는 느낌이었다.

3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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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자에게 있어 달리니는 그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세상 전부였다. 더불어 스포츠는 노력을 보상하는 그 자체였기에 저자에게 있어 달리기는 그 무엇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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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보상하는 스포츠 문화는 내가 세상에 대해 믿고 싶었던 모든 것을 대변했다.

(...)

달리기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바로 자기 결정이 가능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노력은 명확하게 측정되고 보상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43~4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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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저자에게 있어 스포츠는 노력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는,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믿는 것 중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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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사랑에 빠지고 있는 이 스포츠에서 성공은 전적으로 통제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

코치 받은 내용을 적용하는 능력이, 내게 투자할 만큼 나를 사랑해 줄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내 계획에 협조해 줄 몸이 필요했다. 몸이 변하면 모든 것이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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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자신이 믿는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몸이 변하면 자신이 원하는 데로 실현되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회를 거치면서 보고 듣는 내용들이 많아지면서 몸의 변화가 가져오는 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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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위에 서 있다가 사라진 소녀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

"엉덩이랑 가슴이 생겨서 끝났어요."

"신입생 때 정점이었죠."

"사춘기는 여자애들이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이에요."

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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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마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부상으로 취급하는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참 달리기에 대해 부푼 꿈을 안고 있는 이 소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보통은 몸의 변화에 대해 위협적인 것 혹은 두려워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았을까? 여기에 더해 슬퍼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됨으로써 결국은 몸의 변화를 거부하려는 동기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후 저자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건강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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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선수가 남자 선수보다 부상이 두 배나 많다는 사실을 몰랐다. 여자 대학 스포츠에 아무도 메우려 하지 않는 구멍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8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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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에 전념할수록, 동료들과 오랜 시간을 공유할수록 늘어가는 동료들의 부상을 그녀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고민 끝에 입학한 스탠퍼드 대학교에서도 그녀의 행보는 꾸준히 이어진다. 한날에 800미터, 1600미터, 3200미터 모두 우승하는 트리플 크라운 달성을 하면서 코치인 들롱과 저자는 시즌에 세웠던 모든 목표를 이루게 된다.


이로 인해 학교, 도시, 지역 단위에서 선수에게 수여될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다 차지하는 것은 물론, 올해의 선수, 올해의 화제 인물로도 선정되게 된다.


이후에도 저자는 여자 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NCAA 선수권대회에 출전할 때마다 그해 최고의 대학 선수를 일컫는 올 아메리칸에 선정 총 네 번이나 올 아메리칸에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실내 계주에서 NCAA 우승을 차지해 '월 오브 챔피언스'에 첫 명패를 달기도 하고, 5000미터에 출전해 미국 주니어 신기록을 세워 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할 자격을 얻기도 한다. 덕분에 입학할 때 받지 못했던 전액 장학금도 받게 된다.


하지만 이런 행보 뒤에 저자의 체력은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몸 안의 모든 세포가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오로지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피로 누적으로 몸이 무거워진 저자는 이후 준결승전에서 꼴찌를 하면서 연승으로 이어가던 우승 행보는 끝나게 된다.


이후 이런 패턴은 수없이 반복된다. 부상으로 인해 출전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챔피언이 되어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한다. 또 몸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꾸준한 컨디션을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저자는 어릴 때 아빠를 관찰함으로써 화를 피했듯, 타인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과 상황들을 파악하려 애쓴다. 또 생리학과 영양학 강의를 들으며 칼로리를 파악하고 식품일지를 통해 습관을 바꾸는 등의 노력도 기울인다.


알려주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이런저런 방법들을 자신의 몸에 대입하면서 실험하면서 방법을 강구하지만, 이내 이 모든 방법들은 결론적으로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이 되고 만다.


저자와 같은 이런 어려움은 다른 선수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는데, 섭식장애를 앓기도 하고, 무리한 다이어트로 인해 나중에는 온갖 부상에 시달리는 등 점점 더 악재에 치닫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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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경쟁에 집중했다. 우리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스스로와의 싸움에 쏟았다.

10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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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춘기에 도래하면서 몸에 변화를 느끼게 된 여성 선수들은 오롯이 경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변화하고 있는 자신 스스로와의 싸움에 쏟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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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식장애, 자해, 자기 파괴 같은 결과는 전 세계 모든 팀에서 예측 가능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묻기보다 실망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여성을 비난하기만 한다. 이러한 행동은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특수한 스포츠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선택이다. 여성들은 이곳에 접근하기 위해 싸워야 하지만, 이곳을 꾸려나갈 기회는 없다.

11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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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여성의 문제들은 예측 가능하지만 대비하지 않으며, 결과만을 보고 여성 선수를 비난하거나 실망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때문에 여성 선수는 홀로 싸워야 하며 그러한 스포츠 환경에서 적응해 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저자의 선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의 변화가 시작된 이후 스스로 컨트롤 되지 않는 몸 상태로 인해 해볼 수 있는 온갖 방법은 모두 시도해 보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마치 자신의 몸이 실험체인 것 마냥 관찰과 적용을 통해 마침내 문제점을 하나하나 찾아 나간다.


갈망을 무시하면서 그것이 '절제'라고 생각했고, 무월경을 무시하면서 그것이 '적응'이라고 생각했으며, 외로움을 무시하면서 그것이 자립이라고 생각하며 서서히 몸이 망가지는 상태를 경험한다. 또 어떨 때는 외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포인트가 엇나가기도 한다.


그리고 스포츠계와 스폰서인 나이키를 경험하면서 어린 여성 선수들을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또 문화를 바꾸기 위해 어떤 것들을 적용하면 좋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여성 선수들을 성 상품화하며 불공정 계약으로 밀어붙이는 상황들을 타파하기 위해 나이키 CEO를 만나기도 하고, 다양한 캠페인에 참여하며 여러 기회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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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선수가 여자라는 이유로 그들이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이타적이어야 한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 선수에게는 그런 기대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노력으로 얻어낸 자리였다. 마땅한 것을 누리고 있을 뿐이었다.

21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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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스스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타성에 젖어 있음을 상기하게 되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기도 한다.


스포츠계에 만연한 여성 선수들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과 부상, 그리고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어느 순간 저자는 새로운 것에 눈을 돌리게 되고, 남편 제시의 제안으로 블로그와 트위터 등을 통해 직접 대중과 소통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부상을 딛고 트라이애슬론 선수가 된 남편이 매번 기성제품을 먹고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직접 수제로 에너지바(피키바)를 만들면서 이것 또한 상품으로 판매하게 된다.


그렇게 저자는 프로선수 경력을 쌓으면서 할 수 있는 완벽한 부업을 이어나가게 되는데, 명성은 물론, 대중이 몰랐던 여자 선수들의 고충과 실패와 성공에 대한 비하인드를 서슴없이 공개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준다. 덕분에 이 모든 사업은 모두 성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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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롤 모델이 없었지만, 나는 내 방식대로 롤 모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

선수들이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우승할 때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고, 오래전에 지나간 힘든 시절을 회상하지도 않았다. 해피엔딩이 보장되지 않아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직접 썼다.

(...)

육상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내가 성장하고 승리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프로선수들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랐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가장 큰 승자는 나였다. 트랙 밖에서의 삶이 더 확장될 수록 나는 더 큰 만족감을 느꼈다.

24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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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대높이뛰기 선수이자 친구인 로 맥게티건과 함께 소녀들을 위한 훈련 일기를 출판하기도 하고, 마음이 맞는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나이키와는 완전한 안녕을 고하게 된다.


운동선수로서 임신은 사형선고와도 같았는데, 와젤의 초기 투자자인 밥과 세라 레스코, 그리고 둥지 대표 샐리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 여성 프로 선수 최초로 공개적으로 임신한 상태에서 중요한 후원 계약을 체결하는 선수가 되기도 한다.


이 계약으로 인해 여성이 코치하는 여성 프로팀이 전무하던 시기에 여성 선수를 위한 전담팀을 만드는 또 하나의 '최초' 여성 코치가 되기도 한다.


개인 커뮤니티 영역을 확장한 이후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시상식인 쇼티 어워즈에서 유명한 후보를 제치고 최고의 프로 운동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점차 그녀의 영향력은 커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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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포츠와 달리기가 더 선량해지기를 원했다.

(...)

코치를 한다면 내가 지도하는 선수들을 위해 선량한 스포츠의 코치를 하고 싶었다.

27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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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선수들에게 코치를 하기에 앞서 자신이 겪었던 몸의 변화와 일련의 잘못된 방식들을 교훈 삼아 선수들을 위한 몇 가지 지침을 만들게 되는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접근 방식을 건강에 두고 시작한다.

2. 주요 의사 결정을 선수들 스스로가 함으로써 자신의 달리기와 삶을 주도하도록 한다.

3. 이미 실패와 부상을 입은 선수들이기에 체력적인 측면은 물론 스포츠에 대한 애정부터 다시 쌓도록 한다.



또 스포츠 시스템 자체가 여성의 필수적인 생리적 경험을 평가절하하거나 부정하고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우선순위를 강조함으로써 여성에게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2016년 공식적으로 은퇴 선언을 하면서 그녀는 비로소 코치라는 직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고, 이후 그녀는 여자들의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춰 선수들을 관리하기에 이른다.


그 후 5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여성을 중심에 두고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는 답도 찾게 된다.


그녀가 코치로 있으면서 돌봤던 리틀윙 육상 선수 여섯 명은 2021년 모두 생애 최고의 기록을 세웠고, 모두 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할 자격을 얻는 것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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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 내 안에서 망가진 것들을 고치려는 시도가 나를 코치의 세계로 이끌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사람들과 내가 사랑했던 팀원들에게 상처 입힌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혼란 속에서 안전한 곳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해냈다.

29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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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스포츠에서 여성 신체의 건강을 구체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말하며, 여성 선수의 '성'과 '기복'에 관한 교육을 의무화하는 공식 자격증이 필수라고 말한다.


또 이 모든 것은 여성을 성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마주하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며, 여성과 소녀들이 직면하는 문제를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바꿔야 할 인간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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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제시한 객관적 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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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여학생은 14세가 되면 또래 남학생의 두 배에 달하는 비율로 스포츠를 그만두고 17세가 되면 절반 이상이 완전히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에 발표된 연구에서는 캐나다 청소년의 경우 10대 후반이 되면 스포츠를 하는 남학생 10명 중 1명이 운동을 그만두는 반면 여학생은 3명 중 1명꼴로 그만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생에서 이 시기는 여학생의 스포츠 평등을 위한 노력에서 가장 크고 완고한 누수가 발생하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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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스포츠재단이 25년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학생이 스포츠를 그만두는 여섯 가지 주된 이유는 접근성, 안전 및 교통수단의 차이, '동성애자' 꼬리표와 같은 사회적 낙인, 경험의 질 저하, 비용, 긍정적인 롤 모델의 부재 등이었다. 하지만 경쟁 스포츠를 떠나는 근본적인 요인 중 하나인 사춘기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28~2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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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현실이다. 여자아이들은 움직임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변화하는 신체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아이들은 함께 뛰놀던 또래 남자아이들과 움직임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끼지만 여아들의 신체는 성애화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어른들에게 이야기하기 어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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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성별에 따른 운동 능력의 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는 12세까지 다양한 스포츠와 분야에서 또래 남자와 경쟁하며 연령대별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사춘기 호르몬이 여성과 남성의 신체에 서로 다른 변화를 일으키는 12세가 되면 수행 능력의 경로가 두 갈래로 나뉜다.

4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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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이후 생물학적으로 달라지는 신체의 변화에 대해 당연히 다른 방식의 대처가 필요하다. 여태까지는 남성의 신체에 맞춰 기준을 정함으로써 여기에 부합하지 못하는 여성은 탈락하거나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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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의 수행 능력 격차는 해가 갈수록 커지다가 20세 전후가 되면 종목에 따라 남성이 10~50퍼센트 유리한 상태로 안정화된다. 훈련, 영양, 자금, 의료 서비스와 같은 요소를 통제하더라도 이러한 패턴은 일관되게 나타난다.

4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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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구조의 변화에 따라 벌어지는 능력 차이를 통계를 통해 확인하고, 이것을 남녀 각각에 맞는 형태로 적용하여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맞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기준안을 가지고 다른 한쪽이 따라가는 것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성장이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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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에게 18~22세는 테스토스테론이 최고조에 달하고 훈련 능력이 극대화되며 회복력이 강해지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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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여성에게 18~22세는 어머니의 몸으로 변화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우리는 생식에 집중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몸은 생물학적으로 생식력 극대화에 투자한다.

(...)

이러한 신체 구성의 자연스러운 변화는 꾸준하고 선형적인 개선이라는 남성적 표준과 양립할 수 없다. 여성의 신체 변화를 고려하면 이상적인 경기 체중 역시 터무니없는 개념이다. 여성 운동선수들은 새로운 체중 대비 근육량에 힘줄, 인대, 근육, 뼈가 적응하는 과정에서 내가 겪었던 운동 능력 정체나 저하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이지만 스포츠 세계는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다.

11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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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과 여성 각 신체가 생물학적으로 변화하는 시기에 맞춰 훈련하고 회복을 도와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기준안을 두고 일정 몸무게를 유지하기를 강요하거나 무기하게 훈련하게 되면 운동 능력 정체나 저하를 경험하게 될 뿐만 아니라 부상을 야기할 수도 있다.


이제는 스포츠계의 전통에 따르는 것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스포츠에 참여하는 선수들의 안전과 신체 상황을 고려해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달리는 것이 좋아 시작했던 선수 생활이 직업이 되면서 서서히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불안과 피로감으로 다가온다. 사춘기가 도래하기 전에는 가벼운 몸 상태로 날듯이 뛰면서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노력하는 대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었지만, 실상 사춘기를 겪으면서 이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된다.


몸의 변화가 가져오는 영향력은 실로 컸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부상과 컨디션 난조를 경험한다. 수많은 챔피언 자리를 석권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실패와 좌절도 수없이 맛보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여타 선수들과는 다르게 거기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위해 다양한 공부도 하고 이를 직접 적용하고 테스트해보면서 호르몬과 월경, 사춘기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객관적인 통계와 지표를 통해 통상적인 기준과 방법으로는 해결책이 없음을 알고 새로운 방법과 변화를 통해 몸의 건강은 물론 정신적인 건강까지 도모하게 된다.


추후 그녀는 블로그와 같은 SNS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같은 경험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 이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게 되면서 많은 대중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된다.


그녀의 그 모든 수고와 노력은 자신을 위한 달리기 방법을 찾는 시간이었으며, 또 다른 여성 선수들이 스포츠와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자 함이기도 했다.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부상으로 스포츠와 유유히 멀어져 간 수많은 여성 선수들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녀가 여성 선수를 위해 노력한 수많은 노력들(의상, 캠페인, 돌봄, 정신적 치유, 신체적 다름의 인정, 책 출판 등)이 빛을 발하기를 멀리서나마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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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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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것을 담아낸 소설!"


앞서 읽었던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처럼 긴 여운을 남긴 이 소설은, 키건의 스타일을 잘 드러내는 또 하나의 역작이라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약 100여 페이지 정도의 얇은 두께지만 압축된 언어로 표현하는 대사들, 미묘한 암시를 통해 드러나는 정황들 때문에 어쩐지 머릿속에서는 그 이상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겉으로 명확히 드러내진 않으면서 말할 듯 말 듯 의미심장하게 전달되는 뉘앙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바짝 다가서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실제 아일랜드에서 벌어졌던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 더해지며 흥미를 더한다.


단출한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관점에 따라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양산할 수 있는 이 소설은 숨겨진 분량과 이야기를 곱씹을 수 있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또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가, 빌 펄롱이라는 개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너무 가라앉지 않으면서도 다각도에서 상황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한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개인과 사회, 집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또 집단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한 사람의 행동 패턴이 이 집단에 어떤 상황을 야기할지 그려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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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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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했던 시설로, 당시 '성 윤리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여성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곳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죄 없는 소녀들과 여자들이 그곳에 감금된 채 폭행과 성폭력, 정서적 학대 속에서 노역에 시달렸고 그들의 아기들 또한 방치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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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및 작품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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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은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다 평가받는다. 특히 키건에게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 책은 '역대 부커상 후보에 오른 가장 짧은 소설'로도 알려져 있다.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이 작품은 현재 아일랜드 배우 킬리언 머피가 직접 주연과 제작을 맡아 영화로 제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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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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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나라 전체가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며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뉴로스. 기울어 가는 도시의 풍경은 처참한 그 자체였는데, 추위 속에서 먹고 자고 입는 것이 변변찮아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은 점점 길어졌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도 추운 집에서 지내며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자는 사람도 있었다. 또 여자들은 매달 첫째 금요일에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장바구니를 들고 우체국에서 줄을 서기도 했다.

젖소를 돌보던 사람들을 시골을 떠나 대부분 영국으로 떠났고, 젊은 사람들은 런던, 보스턴, 뉴욕 등으로 이민을 떠나고 있었다. 빚을 진 사람들이 많았고, 오죽하면 어린 아이가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걸 목격하기도 할 정도였다.

뉴로스에서는 조선소가 문을 닫았고, 강 건너에 있는 큰 비료 공장 앨버트로스에서는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하는 등 혹독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딸들을 뒷바라지 하며 살 결심을 했다. 그러던 때에 우연찮게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고, 이로 인해 새롭게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게 되면서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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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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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소도시에서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난 빌 펄롱은 엄마가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미시즈 윌슨의 배려로 글을 배우고 잔심부름을 하며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한다.

학교 졸업 후 한두 해 기술학교에 다니다가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일머리가 있고 성실한 것은 물론 사람들과 잘 지낸다는 정평이 나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이후 아내 아일린과 약혼하자마자 미시즈 윌슨이 빌 펄롱에게 자리 잡는 데 쓰라고 몇천 파운드를 주면서 빌은 별도 사업체를 차려 야적장을 운영하게 된다.

※펄롱이 운영하던 야적장
펄롱은 선택, 토탄, 무연탄, 분탄, 장작을 팔았다. 또 조개탄, 불쏘시개, 가스통도 취급했다. 겨울에는 매달 부두에서 석탄을 실어 와서 실어 나르고 야적장에서 분류하여 무게를 달고 주문이 들어오면 배달하는 사업을 했다.

사업체를 운영하면서도 평판이 좋고 성실해서인지 펄롱은 시국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족들(아내와 딸 다섯)과, 사업체에 있는 직원들 월급이 밀리지 않고 생활할 만큼 형편이 좋았다.

다섯 딸들은 그런 부모를 보고 자란 탓인지 성실하고 똘똘했는데, 학교 성적이 좋은 것은 물론, 합창단에서 활동하거나 수녀원에서 악기를 배우고 그림 대회에서 상을 받는 것 외에도 아빠의 사무실로 출근해 장부 정리를 돕고 용돈을 버는 등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큰 기쁨을 주었다.

한편 펄롱은 어려운 이웃이나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잔돈을 주거나 땔감을 무료로 나눠주면서 주변 이웃들을 보살폈는데, 이에 대해 때때로 아내 아일린이 놀리곤 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던 그날도, 펄롱은 추운 날씨에 땔감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을 위해 주말에도 쉼 없이 배달을 나가게 된다. 그날은 강 건너 언덕 위에 있는 수녀원으로 배달을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우연찮게 걸레질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들과 마주치게 된다.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펄롱을 보자마자 처음에는 깜짝 놀라게 되는데, 이내 정신을 차린 한 여자아이가 이곳에서 자기를 꺼내달라며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아이를 함부로 도와줄 수 없었던 펄롱은 이를 거절한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을 안고 돌아선 펄롱은 이후 일요일 이른 새벽, 밀린 배달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가게 된다.

그리고 이내 컴컴한 창고를 손전등으로 비추던 펄롱은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듯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펄롱이 아무리 물어도 아이는 왜 거기서 머물게 되었는지 답을 하지 않는다.

꽁꽁 언 아이를 현관으로 데려가 초인종을 누르니 젊은 수녀가 나왔고, 소리를 지르고 다시 들어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수녀원장이 문을 활짝 열고 나오게 된다. 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어떤지 물어봐 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펄롱은 고민이 많아진다.

아이를 마주한 수녀원장은 능청스럽게 아이를 대하며 돌아가려는 펄롱을 끝끝내 안으로 들이며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 처음에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펄롱은 그런 수녀원장의 태도에 이내 마음이 바뀌게 되고, 상황이 종료된 후에는 오히려 더 머무르며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지만 떠나기를 종용하는 수녀원장의 눈치에 결국 돌아 나오는 길에 펄롱은 아이의 원래 이름과 살던 곳을 묻고, 자신의 이름과 사업장을 알려주며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난다.

한편 수녀원을 나온 후 마음이 심란했던 펄롱은 자신이 자랐던 미시즈 윌슨의 집을 찾아가지만, 정작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오히려 낯선 이를 통해 그 집에서 농장 일꾼으로 일하던 네드와 닮았다는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된다.

같이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과 네드를 연결시켜보지 않았던 펄롱은 닮았다는 그 말을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든다. 궁금해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생판 남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한참 뒤, 정신을 차린 펄롱은 새로 생긴 걱정은 밀어놓고 수녀원에서 본 아이 생각에 다시 마음이 불편해짐을 느낀다.

수녀원장이 주는 돈을 받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아이를 거기에 두고 그냥 나온 것이, 그 애가 유일하게 부탁했던 그 애의 아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래놓고 미사를 보러 간 자신이 마치 위선자처럼 느껴져 펄롱은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다가온 크리스마스이브, 펄롱은 무기력함이 느껴지고 며칠째 뭔가 가슴에 얹힌 것 같은 느낌이 지속됐는데, 그때 자주 가는 식당에서 주인인 미시즈 케호에게 의미심장한 충고를 듣게 된다.

수녀원하고 있었던 충돌을 들었다며, 거기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좋다는 말과 함께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는 말을 넌지시 건넨다. 여기에 더해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며,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라며, 어느 한쪽하고 척지면 다른 쪽하고도 원수가 되는 거라는 강력한 한방을 날린다.

세인트 마거릿 학교에는 첫째 캐슬린과 둘째 조앤이 다니고 있었고, 가운데 아이 실라와 넷째 그레이스는 화요일마다 학교 끝나고 수녀원으로 가서 아코디언을 배웠다. 이처럼 자신의 아이들과 깊이 관여되어 있는 곳이었기에 펄롱에게는 마음이 불편해도 그곳에서 만난 아이를 섣불리 돕겠다 마음먹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서 수녀원에 관한 일이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던 만큼, 또 사람들이 알면서도 쉬쉬하며 피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만큼, 위험하고 또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잘못 벌집을 건드렸다가는 작은 마을을 지탱하고 있는 끈끈하고 강력한 연대를 흐트러트린 배신자로 낙인찍혀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 모른 척 그렇게 눈 감고 살았던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펄롱은 계속해서 편안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정미사에도 가지 않고 방황하다 계속 자신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펄롱의 마음속은 서서히 무언가 다른 것으로 채워지게 된다.

이내 마음을 굳힌 펄롱은 혼란스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수녀원으로 조용히 다가가 예전에 아이를 만났던 석탄 창고에서 아이의 이름을 불러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내 아이를 데리고 수녀원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의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라는 펄롱의 제안에 아이는 이번에는 서슴없이 그를 따랐고, 그렇게 그녀를 데리고 그의 집을 향해 걸어간다.

집으로 가는 길, 펄롱은 사람들을 피해 숨어서 몰래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맨발에 펄롱의 옷을 걸친 여자아이를 보고 수녀원에 있는 아이인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슬금슬금 피하거나, 세탁소 계집애 중 하나가 아니냐며 대놓고 따지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펄롱은 최대한 상황을 넘기며 계속 갈 길을 갔다.

가슴속에 설렘과 함께, 아직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맞닥뜨릴 것이 분명한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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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었던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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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2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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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이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마을의 습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작은 소문에 흔들리고, 한 끗 차이로 모든 것을 다 잃을 수도 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더 튀지 않고 사람들과 잘 지내며 일에만 몰두하며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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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느 일요일 밤 펄롱은 심란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이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 보다는.
3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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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가진 것을 베풀 줄 아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끔 아내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 그의 품성 덕에 어쩌면 석탄 야적장 사업이 잘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펄롱은 일도 잘했고, 성실했으며, 사람들과도 잘 지냈다. 일찍 일어났고 술은 즐기지 않는 건강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어릴 적 미혼모인 자신의 어머니를 돌봐준 미시즈 윌슨처럼 사람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것에 야박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문득 심란한 기분을 느끼고 지나간 것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한 부분은 어쩌면 뒤이어 일어날 일들에 대한 약간의 밑밥이 아닐까 싶다.

일상이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것에 안심하는 펄롱을 보고 오히려 추후에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어떤 일이 벌어지겠구나 예측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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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4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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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복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일상의 무료함을 느끼는 펄롱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런 반복적 삶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는 부분에서 사건이 일어나겠구나 직감이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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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
"당신은 속이 너무 물러."
(...)
"그냥 당신이 모르는 거 같아서. 당신은 딱히 어려움을 모르고 컸잖아."
(...)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
"그렇지만 우리가 가진 것 잘 지키고 사람들 하고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이 그 애들이 겪는 일들을 겪을 일은 없어. 거기 있는 애들은 세상에 돌봐줄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거야."
56~5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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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아일린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만 몰랐던 마을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은밀하고 내밀한 속내를 알게 된 펄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아일린은 수녀원에 있는 여자들은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며 살아가려면 때론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해야 살아갈 수 있으며, 펄롱은 어려움을 모르고 커서 그런 것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며 약간의 비아냥과 이기심을 섞어 이야기한다.

내 아이와 내 가족이 잘 살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척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며 자신들이 그런 일을 겪을 일은 절대 없다 말하는 아내의 말에서 펄롱은 어쩌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미시즈 윌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어머니 또한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이었기에, 펄롱에게 있어 수녀원에 있는 아이들의 일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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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2~10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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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을 누리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펄롱은 오히려 당연하게 주고받는 것조차 특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균형을 잡는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펄롱은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한다.

펄롱이 가진 생각과 관념, 인격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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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겨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머라고 부르든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119~12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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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행복해지는 장면이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하지 않는 사람을 종교인이라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며, 펄롱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따라 타인을 돕고 사는 것으로 인생의 방향을 굳힌다.

그렇게 정하고 나니 몸이 가벼워지고 당당해진 것은 물론 기쁨이 솟아난 펄롱은 한껏 오른 엔도르핀 덕에 후에 치를 대가가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고, 여태껏 단 한 번도 느껴못한 행복을 만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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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12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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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수녀원에 있는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미시즈 윌슨의 친절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에 자신과 어머니를 보호해 준 미시즈 윌슨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함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녀의 배려와 가르침 덕에 펄롱은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었으며, 학대와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사람다운 삶을 살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 수녀원에 있는 것이 어쩌면 어머니가 되었을 것이고, 자신은 죽었거나 멀리 입양 보내져 어떤 삶을 살았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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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은 지나갔다.
(...)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0~1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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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적으로 결정한 후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상황은 분명 현실적으로는 최악의 상황을 예측케 한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질 소란과 가정에서 벌어질 혼란은 상상이상으로 무시무시할지도 모른다.(더군다나 이미 딸아이가 다섯이나 있다)

하지만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아내를 위한 새 구두 상자를 들고 한껏 들뜬 모습으로 들어가는 펄롱의 모습을 보며 지금 당장은 그저 응원과 격려를 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선택을 용감하게 하고, 어려운 시국 속에서도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을 행함으로써 이타적인 삶에 과감하게 뛰어든 펄롱의 모습은 현실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쩌면 아내 아일린이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삶과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행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행여 알게 되더라도 섣불리 나서지 않으면서 비슷한 이들끼리 갖는 연대는 그래서 더 차갑고 매몰차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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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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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 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11페이지 中
마지막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보니, 새삼 첫 문단이 다시 보인다. 처음에 첫 문단 첫 페이지에서 이 문장을 접했을 때부터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는데, 그때는 정확히 그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읽다가 그저 부정적인 느낌만 안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런데 완독 후 옮긴이의 해석까지 읽고 보니 저자인 키건과 옮긴이의 노력이 엿보인다.

더불어 이것이 암시하는 바도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상징하는 바가 다르겠지만, 자살, 임신, 수녀원, 시신, 물에 빠져 죽음, 성폭력 등의 키워드를 통해 소설의 내용이 상징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처음에 우연찮게 만난 여자아이는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문득 그 아이는 이 강을 넘어 도망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자살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짧지만 이 소설이 상징하는 바는 단어와 문장 곳곳에서 발견된다. 은밀하고 미묘하게 암시하고 있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읽을수록 어쩐지 더 선명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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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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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을 꿈꾸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혹독한 겨울에 벌어진 이 이야기는 시대적, 계절적, 현실적으로 힘든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위태로운 이곳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짓밟고 그 위에 나의 안전과 평화를 지켜내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은 수녀원의 실체에 대해 짐작하면서도 입을 다물고 높은 담 안에서 저질러지는 학대에서 눈을 돌린다. 그리고 이내 나와 가족의 안위만을 챙긴다. 그것이 살 방법이라고 되뇌며 침묵으로 일관한다.

덕분에 수녀원에 머무르는 죄 없는 여성과 아이들은 수없는 학대와 착취에 시달리며 노동하거나 아니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묵인하고 덮어둘수록 언덕 위에 자리한 수녀원의 위력은 점점 커진다. 그리고 그럴수록 이 마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존재감은 희미해진다.

때문에 인생에 다시없을 아버지를 찾았음에도, 그리고 그 아버지가 아주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펄롱은 이내 곧 이 일을 덮어둘 만큼 아무 일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이내 온통 수녀원에 있는 아이에게 시선이 쏠려 결론에 이르러서도 아버지의 존재감은 사라지고 만다.

펄롱이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두려움과 불안함이 존재하는 것은 이처럼 강력한 수녀원의 존재감 때문이다.

암묵적인 동의하에 모른척했던 마을 사람들이 펄롱의 기행(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을 목격했다. 아이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수녀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아이를 데려간 펄롱을 수녀원에서는 가만히 둘까?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고 있다 생각한 아내와 다섯 딸은 이 상황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이유로 후일담이 더 궁금해지는 소설이다.

펄롱도 물론 적지 않은 댓가를 치르겠지만, 목숨을 담보로 수녀원에서 모든것을 빼앗기며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모든것이 그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는 이처럼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바꾸는 일이 될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가볍고 얇은 소설 한편 속에 자리한 극명한 대조(빛과 어둠, 크고 작음, 행복과 불행, 크리스마스와 수녀원 등) 와 압축된 대화 속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가 확장되고 상상의 세계가 커진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저자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존재들이 숨죽여 터트리는 슬픔과 아픔이 서려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 아스라이 비치는 불빛 속에서 삶의 희망을 바라는 이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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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이 따로 있나, 내 삶이 꽃인 것을 - 인생 후반을 따스하게 감싸줄 햇볕 같은 문장들 65
오평선 지음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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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처럼 이 책은 곳곳에 햇볕 같은 따뜻한 문장들이 가득하다. 저자가 인생을 살면서 느낀 지혜와 깨달음의 문장들을 편안하고 진솔하게 전함으로써 쉽고 편안하게 와닿는다.

여기에 더해 중간중간 시선이 멈추는 명화와 철학자들의 명언은 깊이를 더한다. 그래서인지 선물용으로도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에게 주는 선물로도 좋고, 부모님이나 친구, 혹은 또 다른 소중한 이에게 전해도 좋겠다.

잠자기 전 곁에 두고, 어떤 날은 명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으로, 또 다른 날은 문장을 반복적으로 읽음으로써 마음에 새기고 위로와 위안을 얻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급성 심근경색으로 죽음의 문 앞까지 다녀온 저자는 비로소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졌다고 말한다. 덕분에 현재는 인생의 새로운 봄을 맞이하게 되면서 행복이 멀리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고도 전한다.

더불어 죽음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으며,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생각하면 지금 어떻게 살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 말하며,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고도 전한다.

위로와 응원, 지혜가 담긴 65개의 글과 40여 점의 명화, 그리고 철학자들의 명언을 통해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관계에 있어 중요한 점 등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이든다는 것은 그만한 경험과 지혜가 쌓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삶을 어쩌지 못하고 방황하며 시간을 허비하며 보내고 있다.

이것이 계속되면 때론 집착으로, 고집으로, 철없음으로 비치며 점점 더 고립되거나 불행 속에 내던져지고는 하는데, 그럴 때 삶의 '관점'을 재정비함으로써 변화는 물론, 봄날 같은 인생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전하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통해 위로와 삶의 의지, 용기와 응원을 듬뿍 받기를 바란다. 더불어 가까이에 있는 행복도 찾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여유로운 삶을 원한다면,
복잡하게 따져볼 것 없다.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된다.

무작정 달리러 나왔다가
발길마다 멈춰 잔뜩 여유를 부린 나처럼.
21페이지 中
=====

우리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따진다. 덕분에 매일이 고달프고 힘겹다. 이제는 그만 내려두고 원하는 바를 떠올리자!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언제든 행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
사람은 추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릴 때 죽는다.

우리 삶에도 삼한사온이 있을 것이다.
지금 같은 한파가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법은 없다.
한파 뒤에 따뜻한 햇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삶을 단단하게 만들고 나면
비로소 기나긴 봄날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을 것이다.
71페이지 中
=====

고통이 싫다지만,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행복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 매일이 봄날이거나 매일이 한파면 무엇이 고통이고 행복인지 과연 구분할 수 있을까?

계절의 변화처럼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긴 겨울을 보내고 나면, 싹을 틔우는 봄날도 이내 찾아올 것이다. 또 그렇게 한 뼘 성장하는 나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가 봐도 불행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다.

불행한 사람은 행운을 찾아도 불행하고
행복한 사람은 지척에 널린 것이 행복이다.
100페이지 中
=====

행복과 불행을 판가름하는 것은 어쩌면 외부적 상황이나 객관적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이 어쩌면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과 행복한 사람으로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일신우일신'이란
날마다 새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루를 맞이하는 마음과 각오가 새롭다는 뜻이다.
하루 끝에 성찰하고 반성하는 사람은
매일이 인생의 첫날이다.
(...)
매일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매일이 인생의 첫날인 것처럼 살아라.
115~116페이지 中
=====

'새해'나 '매월 1일'과 같이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준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계획하거나 실천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날을 '매일'로 설정해 보면 어떨까?

그럼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


=====
변화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만들어가는 것이고 내가 찾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라도 계기로 삼으면
풀 한 포기로도 인생은 바뀔 수 있다.
119페이지 中
=====

변화를 맞이하고 싶다면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스스로 계기를 만들어보자. 변화는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부자리를 정리하거나 같은 시간이 잠드는 등의 일상의 작은 습관을 통해서도 충분히 변화를 이뤄낼 수 있다.


=====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다.

경험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짧은 경험에 사로잡혀 모든 현상과 사물을
쉽게 단정 지어 판단하는 것이 경험의 독이다.

(...)
모든 일에는 반드시 양면이 있다.
144페이지 中
=====

나이 듦에 따라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경험을 바탕에 둔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싶다. 한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짓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함부로 남을 판단하거나 쉽게 단정 지어 결론 내리는 어리석은 행동은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
행운이란 살아가는 동안 찾아오는 기회다.
하지만 기회가 왔는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기회란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
만약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아채더라도
눈뜨고 기회를 날리는 사람도 많다.
양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치기 싫어
꽉 움켜쥐고 눈을 멀뚱히 뜨고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본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올 때
양손에 든 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을 잡으려는 도전정신이 있었다.
도전을 위해서는 가진 것을 놓을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150~151페이지 中
=====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낚아채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을 때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두 번째, 기회를 잡기 위해 손에 쥔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체념과 도전정신을 꼽을 수 있다.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도 않지만, 그 기회를 잡는 것 또한 쉽지 않다. 당신을 기회를 알아보는 눈과, 기회와 찾아왔을 때 도전할 결단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나간 과거를 가끔 돌아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시선을 과거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는
과거는 가끔 돌아보면 충분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는
가끔 살펴보면 충분하다.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지금 당장 차가 지나가는 바로 이 길이다.

어차피 지나간 상황은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오직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와 미래뿐이다.
지금 핸들을 어디로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바뀔 수 있다.
156~157페이지 中
=====

안전한 운행을 위해서는 전방 주시가 필수다. 가끔 백미러와 사이드 미러를 통해 뒤를 확인하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현재에 집중해야 원하는 과거를 남길 수 있다. 또 바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삶을 원하든 가장 우선시해야 할 점은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다.


=====
익숙하고 당연하다 느끼는 것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더 가지지 못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불행한 것이다.

이 진리를 삶을 마무리할 무렵에 느낀다면
후회의 한숨을 쉬며 떠날 것이다.
209페이지 中
=====

자신이 왜 불행한지 원인을 제대로 모르고 그저 불행하다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 '죽음'을 앞에 두고 무엇을 가장 후회할 것 같은지 떠올려보자.

그러면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하고 당연하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에서 죽음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사람들은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다. 단순히 나이 오십에 접어 들어서 저자가 이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만 '찬' 어른이 아닌, 삶을 제대로 마주하고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진짜 어른의 모습을 보면서 공감과 위로를 얻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명화와 삶의 깊은 깨달음을 주는 철학자들의 한 줄 명언들을 입안에 굴려보며 머리와 가슴에 새겨본다. 덕분에 오늘 나는 어떤 새로운 날을 맞이할까 설레하며 행복한 인생, 꽃 같은 인생을 그려본다. 내디뎌본다.

후회가 밀려올 때, 인생의 중턱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할 때, 삶에 회의가 느껴질 때, 삶의 반전을 꾀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를 때, 불안하고 공허함이 들 때 이 책을 꺼내들고 천천히 책 속의 문장들을 음미해 보자.

가족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열심히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사느라 미뤄뒀던 진짜 내 인생을 되찾는 방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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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날에, 흔들리는 나를 -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서영식 지음 / 진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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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날을 견딘 기록들이 주는 담담한 위로"



이 책에 실린 글은 저자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쓴 글로, 일종에 쓸쓸한 날을 견딘 기록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글 곳곳에는 짙은 삶의 무게감이 묻어난다.


일상 속에 찾아온 고됨을 저자는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덤덤히 풀어내는데, 그래서인지 더 울컥하는 순간들이 종종 발견된다. 억지로 위로하지 않아서, 강요하지 않아서 더 오래 곁에 두고 읽고 싶은 기분이다.



일상 속에 들이친 아픔과 괴로움, 얼룩진 생채기를 조용한 언어로 남기며 약하고 흔들렸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저자의 모습은 어쩐지 모든 것을 이미 득도한 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홀로 눈물짓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꽤나 힘들었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요란하지 않아서 덩달아 읽고 있는 나조차도 차분해지는 저자의 시와 산문은 혹독한 겨울날의 벽난로를 연상케 한다.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에 절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처럼.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절망 앞에 타인이 건네는 위로의 말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저 말없이 건네는 따스한 손 하나가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음도 깨닫게 해준다.


저자가 풀어내는 나직한 속삭임에서 흔들리는 삶의 다른 이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흔들리고 있는 채로 더 흔들리고 있는 이를 향해 가만히 손을 뻗어 주는 일이 곧 사랑이 아닐까요.

25페이지 中

=====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으면 더 흔들릴 것 같지만, 실상은 흔들리는 나와 손잡이 모두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켜 준다. 넘어지지 않도록 해준다. 어쩌면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세상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보다 더 흔들리는 이를 잡아주면 그나마 버티고 있던 나마저도 넘어질까 싶어 모른척했다면, 앞으로는 기꺼이 손을 잡아주자.


덕분에 나와 너 우리 모두 넘어지지 않고 버티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추어 설 때가 있다.

몸부림치는 일마저도 여의찮을 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고장 난 삶을 껴안고 옴짝달싹 못 할 때가 있다.

그런 날 내가 가장 듣고 싶은 소리는 이런 것.


"고장이 아닌 거 같아.

그냥 잠시 휴식하고 있는 걸 거야."


그리고 내가 시계에서 그렇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럴 땐 그들도 가만히 나를 기다려 주었으면 좋겠다.

고장이 아니라 단지 충전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런 날, 내가 나에게도 그런 휴식의 시간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59~60페이지 中

=====


'빨리빨리'를 일삼는 대한민국에서 멈춰 선 시계는 그저 고장 난 것으로 치부된다. 왜 멈췄는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버려진다.


그럴 때 만약 누군가 '잠시 휴식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준다면, '배터리를 교체하면 된다'라고 말해주면 어떨까?


번아웃이 왔을 때, 지쳐 나동그라졌을 때 잠시 충전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면, 그렇게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쩌면 조금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

우리에게 진짜 얼굴이란 게 있기나 할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심지어 사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달라 보이는데

하물며 사람을, 하물며 사람의 이름을

우리는 왜 그토록 하나의 틀 안에 가둬두고 있을까.

143페이지 中

=====


가까운 사이에서 트러블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쩌면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아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수천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하나의 틀에 가둬두려 했기에, 인정하려 하지 않았기에 어쩌면 멀어지는지도 모르겠다.



=====

"사람을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사물을 틀 안에 가두고 있는 것처럼

사람 또한 자기만의 틀 안에 가두고 산다.

맥주병에도 꽃을 꽂으면 꽃병이 되는데

하나의 이름이 그 이름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면

사람의 입장에서 이보다 서운한 일이 또 있을까.


뒤집어 보고, 바꾸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이해하는

가장 바람직한 시선은 아닐까.

170페이지 中

=====


어디에서 읽었는데, 한국 사람만큼 본래의 용도를 넘어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대할 때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걸 보면 정말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물은 그토록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왜 정작 사람을 대할 때는 요모조모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할까?


사람도 뒤집어 보고, 바꿔보고, 다르게 바라보자. 관점에 따라 상대방은 물병이 되기도 하고, 꽃병이 되기도 하며, 재활용품이 되기도 할 것이다.



=====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그렇다.

아무리 예쁘게 포장하고 매력 있게 다듬어도

그의 마음을 내가 먼저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은 어려워진다.


어떤 상황인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관심이라 부른다.

관심이 있어야 마음이 보이고

관심이 사람을, 관심이 사랑을 부른다.

181페이지 中

=====


무작정 내 마음을 들이대는 것은 범죄이며 악취미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무엇에 관심 있어 하는지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상대방을 소중히 하는 마음, 즉 관심에서부터 서서히 시작해 보자. 진심은 언제나 통하는 법이다.




저자가 덤덤히 풀어낸 글을 읽으며, 삶에서 진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사물과 행동들이 그냥 넘겨지지 않는다.


살면서 흔들리는 날, 고되고 힘이 드는 날 외로운 마음을 묵묵히 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조용히 어깨를 내어주는 이가 있다면 조금 더 버티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연대의 힘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꼭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작고 소소한 것을 함께 나누고 손잡아 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짜 연대의 힘이라 생각한다.


나를 온전히 나로 바라봐 주는 것,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는 것. 진정한 위로는 거기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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