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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목격자
황민구 지음 / 부크럼 / 2022년 8월
평점 :
최근 억울한 일을 겪으면서 맘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남다르게 다가왔던 <천개의 목격자>. 최근 들어 영상에 대해 관심이 부쩍 많아졌는데 '자기보호'와 '기록'의 이유로 특히 더 관심이 갔다. 과거에는 몰카와 같은 안 좋은 키워드들이 가장 먼저 떠올라 영상보다 사진에 더 관심이 많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핸드폰의 기술이 좋아져 대중화되고, 급할 때는 사진보다 영상이 현장 상황을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어 영상이 더 유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여행 유튜버들을 보면서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 영상을 찍는 것을 보며 삶의 기록으로도 활용할 수 있지만, 신변보호와 안전을 위해서 영상을 배워 활용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cctv를 제3의 눈이라고 말할 정도로 없는 곳을 찾기가 힘든데, 개인은 물론 공공기관, 도로 등 수없이 많은 곳에 cctv를 설치하여 사람은 물론 모든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분초 단위의 모든 것들이 기록된다. 그리고 사건사고를 비롯한 교통법규 위반, 미아나 분실 등 다양한 곳에서 cctv가 활용되고 있다.
단순히 동선을 따라가는 것을 넘어 보다 분석적이고 디테일한 확인이 필요한 경우 영상 속 진실을 찾는 일을 하는 사람을 '법 영상 분석가'라고 하는데, 사실 아직까지는 아주 익숙한 직업은 아닌듯하다. 그럼에도 현재는 물론, 앞으로 비중과 중요도가 커질 것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저자가 '법 영상 분석가'로써 다양하게 만난 사람들과 사건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배운 인생철학과, 진실을 파헤쳐 가는 과정들을 엿볼 수 있는데, 단순히 직업에 국한된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를 통해 저자의 '인간다움'도 함께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눈으로 좇으며 숨겨진 1%의 진실을 찾는 직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법 영상 분석가'라는 직업은 어딘가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전문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한때는 회의감이 들어 술로 시름을 잊으려 노력하던 때도 있다고 하니 새삼 놀랍다는 생각도 든다. 더군다나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는 저자의 이력을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쉽게 성공했을 것 같다는 편견을 가질 수 있지만, 사실 그도 처음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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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재판이냐? 개판이지? 나나 우리 가족이 저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상상을 하니까 무섭더라. 아무도 말을 들어 주려고 하지 않네. 왜 너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거야? 영상에 뻔히 보이잖아. 안 넘어간 게"
"내가 하는 일은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일인 것 같아. 그만하는 것이 낫겠어. 내가 알고 있는 영상 속 진실은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야."
2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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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의 이력과 신뢰에 중점이 맞춰져 정작 본질이 훼손되는 일들을 겪지만, 저자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보다 확실한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시도한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양쪽의 입장에서 비평해 보는 방법을 다양하게 시뮬레이션 해보면서 움츠림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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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얻는 방법으로 '철저한 준비'를 택했던 것이다. 가끔은 직원에게 상대측 변호인이나 검사가 되어 보라고 하고 내 분석에 비평을 시켜 보기도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검사나 변호인의 심문 내용이 모두 내 시뮬레이션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조금씩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속에서 움츠림은 나를 철저한 영상 분석가로 만들어 준 것이다.
(...)
누구에게나 시련은 온다. 그럴 때, 도망갈 데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자. 시련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자. 하늘의 뜻에 맡기는 건 그다음 일이다.
189~1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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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을 얻는 방법으로 '철저한 준비'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이나 '회피'를 가장 먼저 선택할 것이다. 마지막 말이 상당히 인상 깊었는데, '시련이 왔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자. 하늘의 뜻에 맡기는 건 그다음 일이다'라는 문장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 온갖 모욕적인 상황과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가슴에 새겨야 할 인생 교훈 하나를 배워간다.
책에 담긴 사례에는 성취감이 드는 이야기, 화가 나는 이야기, 울분이 가시지 않는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 사기꾼 이야기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볼 수 있는 사건사고들이 다양하게 담겨 있었는데, 인간의 타락 과정에 대해 다룬 이야기 하나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최근 뉴스에서도 이슈가 되어 많이 거론되고 있는 '성범죄' 관련 내용이었는데, 성범죄 그 자체보다 이것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과 솔직한 생각이 담긴 부분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사이다 같은 발언과 인간다움, 거침없는 성토를 통해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구나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영상분석에서도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줄 것 같은 믿음이 들어 든든함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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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나체를 촬영하고 이를 유포해도 처벌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냥 무시하고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단순히 내 분석이 인용되지 않을 수 있다고만 생각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터무니없었다.
(...)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놈은 언젠가 분명히 처벌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전달하고 싶었다.
(...)
"현 세계에서는 벌을 줄 수 없어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는 평생 죄책감 속에 살아갈 것이고 그가 죽으면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 제우스 신, 단군신, 관우신, 저승사자 등이 평생 지옥에서 그놈을 괴롭힐 거예요, 지금 당신이 힘들어하는 모든 걸 신들만은 알고 있을 겁니다"
20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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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언사는 다른 사례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저자의 인생 이야기도 함께 녹아들어 있어 한편으로는 타인과 나라는 관점보다 함께 마주 보며 날리는 팩폭을 그저 즐길 수 있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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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면 원하는 대로 써주는 줄 알고 현금도 내보인다. 혼자 크게 떠들며 흥분한 의뢰인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도 않는다. 그저 의뢰인의 팔에만 눈이 간다. 빨래 짜기가 하고 싶어지는 날이다.
※빨래짜기: 양손으로 타인의 한쪽 팔을 잡고 빨래를 짜듯이 비틀면 피부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밀리면서 살갗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밀려온다.
24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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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동아리 선배의 빨리짜기 시전을 당해본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표현된 '빨래짜기'는 아는 사람만 아는 고통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돈만 밝히는 의뢰인의 팔을 상상하며 같이 빨래짜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고 유명세를 치르면서, 일은 점점 많아지고, 다양한 의뢰를 담당하게 되면서 처음과는 다른 부분의 어려움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가 언급한 부분을 곳곳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데, 특히 저자가 좋은 마음으로 진행한 무상 재능기부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부분에서는 어딘가 마음이 찌르르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선행을 선행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나는 피해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상처들. 저자의 이러한 선택은 나 역시 경험해 본 적 있는 일이기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더불어 더 나은 선택을 위한 고민과 '덤'이라는 개념의 도입 방식은 두 번째로 얻은 인생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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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 보면 덤으로 줄 게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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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은 참 행복한 것이다. 다만 그 행복은 내가 여유가 있을 때, 공짜가 아니라 대가를 받고 덤으로 줄 수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다. 억지로 하는 재능 기부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
29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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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파헤치는 사람, 진실을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진실 그대로를 전할 수 있는 사람! 저자가 만약 제자를 들이게 된다면 필수적인 조건으로 꼽는 것들이다. 누군가의 인생을 구할 수도, 망칠 수도 있는 그의 직업은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소신'과 '진실을 규명하는 사명감' 없이는 쉬이 도전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다.
여러 사례 속에서 몇 번 언급된 위의 조건들에 흔들리는 비전문가들의 행태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목도하면서, 특히 더 '법 영상 분석가'라는 직업은 소신과 사명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분석을 통한 진실규명을 위해 확인하는 영상들은 대체적으로 끔찍하고, 부끄럽고, 알고 싶지 않은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때론 보고 싶지 않은 영상들도 있지만, 누군가의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처절한 외침이 들려 저자는 계속해서 자신의 원칙과 철학을 지키며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를 고발하는 정직한 목격자! 법 영상 분석가 황민구. 저자를 대변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