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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평점 :
다양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견딜 수 없는 사랑>에는 유독 독특하게 다가오는 사랑의 형태 하나가 눈에 띈다. 평화로웠던 어느 날,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 하나로 모이게 된 이들에게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중에서 특히 더 특이한 일을 경험하게 된 한 남자를 따라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파고들게 된다.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등장하는 이들을 먼저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태로워 보이는 열기구를 보고 모이게 된 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일들이 생기게 될지 기대감을 가지고 주목해 보기 바란다.
■조 로즈: 유명 과학저술가이며, 주요 등장인물
■클래리사: 조의 7년 된 연인
■존 로건: 42세, 옥스퍼드에 살고 있으며 일반 개업의로 두 아이가 있으며, 열기구 사고 시 모였던 이들 중에 신체적으로 가장 건강했던 사람이다.
■진 로건: 존 로건의 아내, 역사학자
■조지프 레이시: 63세, 농장 잡역부로 동네 볼링팀의 주장이기도 했으며, 언덕 아래쪽에 있는 와틀링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토비 그린: 58세, 레이시의 동료로 직업은 레이시와 마찬가지로 농장 잡역부로 미혼이다. 어머니와 함께 러셀스 워터에 살고 있으며, 레이시와 그린은 스토너 농장에서 일했다.
■제임스 개드: 55세, 열기구 조종사, 작은 광고 회사 대표이며 아내와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성인 자녀 한 명과 함께 레딩에서 살고 있다.
■해리 개드: 10살, 열기구 바구니에 있던 소년으로 조종사의 손자다. 런던 캠버웰에 살고 있다.
■제드 패리: 28세, 무직자이며 유산으로 받은 햄프스테드의 주택에서 살고 있다.
스물네 개의 단락과 뒤이어 담긴 부록 1, 2에서는 충격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특히 이 책의 소개 글에서 언급하는 '소설 말미의 부록은 반드시 봐야 한다'라는 글로 인해 한동안 현실과 소설을 더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 책의 키워드라고도 할 수 있는 <드클레랑보 증후군>의 사실 여부를 비롯해 한동안 이 소설에 담긴 내용이 진실인지 픽션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한참을 고민하며, 픽션이 아닌 논픽션에 대한 글인지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검색을 통해 <드클레랑보 증후군>에 대한 사실 여부를 검색해 보았다.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실제 있는 병명으로, 부록마저도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 구성이었다는 점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쫄깃한 긴장감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작가의 트릭이었던 셈이다. 어떤 식으로 작가가 재치를 발휘했는지는 책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책을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내용들을 우선적으로 정리해 보았다. 등장인물, 그리고 참고하면 좋을 작가의 의도까지.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온갖 사랑의 형태가 뒤범벅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던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날은 유명 과학 저술가인 조 로즈가 오랜만에 연인인, 클래리사를 다시 만나 매우 기쁜 날이었다. 6주 만에 만나는 것으로 7년을 사귀는 동안 가장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재회하는 거라 기쁨은 더 컸다. 그래서 그들은 소풍을 즐기기 위해 들판으로 나가 이제 막 데이트를 즐기려던 참이었다. 날은 화창했고, 평화로웠으며,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그때 난데없이 어디선가 고함 소리가 들렸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열기구를 발견하게 된다. 순간 조를 비롯한 주변에 있던 남자 4명이 나타나 열기구의 줄을 붙잡게 된다. 열기구의 바구니 안에는 어린 소년이 혼자 타고 있었으며, 조종사는 열기구를 땅에 붙들기 위해 막 바구니를 벗어나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조를 비롯한 남자 4명이 줄을 붙잡고 소년을 바구니에서 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이미 두려움에 잠식된 소년은 벗어나기를 거부했고, 이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갑작스레 불어든 두 번의 돌풍으로 그들의 몸은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고, 위험을 감지한 그들은 하나둘 잡고 있던 줄을 놓게 된다.
이후 마지막까지 혼자 줄을 잡고 있던 존 로건은 가벼워진 열기구를 따라 하늘로 높이 치솟았고, 몇 초 사이 땅으로 추락하게 된다. 이 일로 몇몇은 가벼운 부상을 당했고 또 누군가는 멀쩡한 모습으로 존 로건의 사망을 목격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한순간에 이후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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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연달아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드 패리는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다. 토비 그린은 발목이 부러졌다. 최고 연장자에 낙하산 부대에서 복무했다는 조지프 레이시는 일시적인 호흡곤란을 겪었을 뿐 다른 이상이 없었다.
(...)
아직도 한 명이 밧줄에 매달려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의사이며 산악구조대였던 존 로건의 마음속에서 이타심의 불길이 조금 더 강하게 타올랐던 것이 틀림없었다.
30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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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병의 차가운 감촉과 제임스 개드의 고함,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발생한 이 순간들이 상황의 전환점이었고, 예상에서 벗어나게 된 출발점이었다.
이후 경찰과 구급대가 도착한 것을 것을 마지막으로 뿔뿔이 흩어진 그들은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고, 조와 클래리사 역시 그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와 잠을 청한다. 이때 한밤중 난데없이 전화 한 통이 걸려오게 되는데, 그 사고 현장에 있던 4명의 남자 중 한 명인 제드 패리로, 난데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조는 무시하고 이내 잠자리에 들게 되는데, 이는 그가 첫 번째로 저지른 중대한 실수의 시작이었다.
무심코 넘겼던 그의 작은 실수는 점차 집착과 집요함, 스토커의 형태로 크기를 부풀려 그의 앞에 나타나게 된다. 종교적 신념과 사랑 구애, 용서를 바라는 그의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밀어붙임은 조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고 어이없게 느껴진다. 사고가 일어난 그날 단 한 번의 눈 맞춤이 그에게 보낸 사랑 신호이며, 남다른 애정을 전한 표시였다며, 제드 패리는 쉼 없이 그의 주변을 맴돌며 스토커 행위를 이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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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통해 당신을 하느님 앞으로 이끄는 것이 내 목적임을 아는 것처럼. 아니면 이렇게 표현해 볼까요? 나는 사랑의 치유력을 통해 당신과 하느님 사이의 벌어진 틈을 메울 거예요.
149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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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점차 이 행위들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을 것을 직감하고 연인인 클래리사에게도 이 사실을 숨김없이 이야기하지만, 클래리사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오히려 만나서 차분히 이야기해보라는 충고를 전한다. 조는 자신의 집주변을 맴도는 것은 물론, 자동응답 전화기를 통해 수십 통의 부재중 음성을 남기는 그를 보고 경찰서까지 방문하여 신고하지만 경찰 역시 이를 가벼이 넘기게 된다.
더 이상 주변에서 도움을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 조는 직접 그를 떼어낼 방법들을 강구하게 되면서 집착적으로 그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으고 그를 구속할 방법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 클래리사는 조와 점차 마찰을 빚게 되고 심지어 깊은 오해와 갈등이 쌓이게 된다.
제드는 이 와중에도 지속적으로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가 외출하는 이동 동선에 나타나거나, 집 근처에서 기다리거나 혹은 전화나 편지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에게 만남과 연락을 취한다. 이 과정들에는 무수히 많은 감정과 서술들이 담겨 있는데, 어느 순간 조가 망상장애이거나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차 의심이 들기 시작하게 한다.
직접적인 증거나 협박은 피하고, 클래리사 앞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조에게만 나타나 집착하는 형태는 연인인 클래리사 마저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어느새 제드 패리가 실존하는 인물인지 긴가민가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더불어 여기에 열기구 사고 당시 사망한 존 로건의 일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면서 사랑에 대한 복합적이고 새로운 여러 이야기가 담기게 되는데, 이들 각자에게 견딜 수 없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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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에게 다른 면에 있었어요. 존은 항상 최고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이젠 옛날처럼 다방면에서 최고가 아니었죠. 나이가 마흔두 살인 걸요. 존은 상처받았어요. 받아들이지 못했죠.
185페이지 中 (남편인 존을 의심하기 시작한 아내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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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마침내 조는 미치광이 같은 집착을 보이는 제드 패리에 대한 증상을 정의할 수 있는 병명을 찾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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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클레랑보 증후군. 그 이름이 마치 팡파르 같았고, 나 자신의 집착을 떠올리게 하는 분명한 트럼펫 소리 같았다.
18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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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클레랑보 증후군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는데, 그 증상과 행태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이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망상의 한 종류로, 색정광, 색정증, 에로토마니아(Erotomania) 으로도 불린다. 속된 말로 도끼병이라고도 한다. 조현병, 망상장애, 조증 환자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더 밝은 세상을, 사랑이라는 명분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드는 정상적인 연인들의 세상을 반영하고, 패러디하는 어둡고 비뚤어진 거울이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병인학적으로 다차원적인 질병이라고 결론지었다.
▶민감하거나 의심이 많고, 우월성을 강하게 느끼고,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사회적 무기력한 개인에게서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공허한 삶을 사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관계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혹은 성적이든 감정적이든 친밀성에 관한 두려움도 이에 못지 않게 크다.
▶사랑이 병적인 측면과 종교인이 다니는 교회의 신조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 사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이후의 연구 문헌들을 살펴보면 이것이 가장 지속적인 형태의 사랑이고 환자의 죽음으로만 종결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클레랑보 증후군 환자의 피해자들은 괴롭힘과 스트레스, 폭력과 성폭행, 심지어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여성들만 이 증후군을 앓는 것이 아니며 이성애적 끌림만 관련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침입성과 위험성의 정도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결론짓는다.
▶애정의 소통을 한다는 망상적 확신을 가진 환자는 그 다른 사람이, 즉 증후군의 대상이 먼저 사랑에 빠졌고 먼저 접근했다고 믿는다. 증후군은 갑작스럽게 발현하고, 대상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는 별로 없다. 환자는 대상의 역설적인 행동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병명의 여러 증상들을 찾아보면서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기에 이른다. 또다시 방문한 경찰서에는 여전히 그를 이상한 취급하기에 여념이 없고, 벌어질 대로 벌어진 클래리사와의 사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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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클레랑보 증후군이라는 병을 앓고 있어요, 망상장애죠. 내가 먼저 자길 유혹했다고 생각하고, 비밀 신호를 보내 자기를 자극한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조는 또다시 경찰을 찾아가 설명하지만 여전히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23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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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면서 누가 망상장애를 앓고 있는 것인지, '조'인지, '제드'인지 어떤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하기 힘들어지게 되면서 혼란이 거듭된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어나가다 보면 마침내 진짜 진실에 닿게 되는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본문이 끝났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부록의 끝까지 읽어야 진정한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수많은 사랑의 형태를 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더불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정'이라는 것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예측불가 현상을 맞닥뜨리게 되는데 이것은 각오해야 할 부분이다.
부부, 연인, 부모와 자녀, 이웃 간에 벌어지는 애정과 사랑 사이에는 수많은 감정이 오가며 관계를 이어나가게 되고, 거기에는 수많은 욕망과 믿음이 왜곡되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게 된다. 더불어 이것은 우리의 기억도 왜곡시켜 '나'의 시선에서 이로운 것들만을 기억으로 저장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내가 기억하고 보고 들은 것이 진짜라고. (과연 이것이 진실일까?)
중심인물인 조 로즈는 어떻게 보면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 중 하나다. 읽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헷갈리는 구간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온갖 지식을 섭렵해서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이 상황을 혼자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인물이다.
반면, 그와 대조적으로 감정적이고 집착적으로 모든 것을 사랑과 종교에 기대어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는 제드 패리와 같은 인물도 있다. 그 외에도 이 사건에 개입된 수많은 이들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 이성과 감정, 사랑과 집착, 과학과 종교, 직관과 논리의 이항대립 속에 인물들이 날것 그대로 부딪히고 대항하며 사건이 전개된다.
그래서 여기에 담긴 사랑은 복잡 미묘하고, 기이하게 다가온다. 광신도 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맹목성은 물론, 믿음을 저버린 왜곡된 시선 속에 누군가는 파렴치한이 되었다가 한순간 영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물 한 명 한 명이 강렬하게 다가오는데,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통해 진짜 진실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사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살짝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지만 입 꾹 닫고 참아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당신은 누구를 믿을 것인지, 그리고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더불어 믿음이 결여된 사랑 앞에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현실 또한 마주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