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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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기간 차 안에서 <그녀의 눈물 사용법>을 읽었다.
재미있는 소재들이 좀 덜 발효된 이야기들을 읽은 느낌이다. 4분의 3정도까지 신나게 따라가다가 맥이 풀려버리는 이야기들. <잘 가라, 서커스>에서 어떤 근성을 엿본 적이 있는 독자로서는 많이 아쉽다.
<알리의 줄넘기> 같은 것은 장편으로 발전시켜도 재미있을 것 같다. 인물들의 면면도 그렇고, 스리슬쩍 마술적인 분위기도 착 가라앉은 다른 작품들과 달라 읽는 재미가 있었다.
<잘 가라...>를 쓰기 위해 실제로 취재를 나섰다는 일화를 듣고 천운영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무언가를 끝까지 밀고 나가 끝장을 볼 것 같은 느낌을 줄 것 같았다. 다음번에는 그 칼을 좀더 깊이 쑤셔넣어도 될 것 같다. 그 중심을 관통해 빠져나온 칼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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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에로틱한 잠재력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김경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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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는 내내 <아멜리에>를 틀어놓고 지내던 몇 년 전의 여름날이 데자뷔처럼 머릿속을 떠다녔다. 엑토르의 기상천외한 수집 목록(새벽 5시의 소음을 모으다니 깜찍해라)은 니노의 증명사진 앨범과, 아멜리에가 화장실 바닥 타일 벽 너머에서 찾아낸 '투르 드 프랑스' 미니어처 컬렉션을 떠올렸고, 엑토르와 브리지트 사이의 오해(!)는 아멜리에와 니노의 숨바꼭질과 닮은꼴이다. 그리고, 이 둘에는 고독과 사랑에 관한, 사랑스러운 고찰이 담겨 있다.

꼼지락거리며 하나하나 손으로 빚은 것 같은 아날로그적인 인물들, 가족 모임을 하고, 수집대회를 열고, 끝없는 수다의 마당을 펼치는, 다분히 프랑스적인 풍경들. 폐부를 찌르는 통렬함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곤조곤 떠들어대는 스냅샷 사이로 보이는 삶의 진실 같은 문장들에 자꾸 밑줄을 치게 만든다. 적재적소에 잠복해 있는 유머도 멋지다! <쥐비알> 이후로 이렇게 웃은 프랑스 소설은 처음인 듯 :-)

<타인의 취향> <아멜리에>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것 같다. 우디 앨런의 유머와 비교하기도 하던데, 그 정도로 시니컬하지는 않고... 흠,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같은 영화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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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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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적 요소가 강한 내러티브는 텍스트가 영상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추리소설조차 갑자기 범인은 당신이었어! 라며 의기양양하게 으쓱거리는 것이 영 시큰둥했으니 호러소설이라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싶었다. 게다가 SF까지 넘어가면 '멋진 신세계'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이 괴로울 정도로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 바로 나다.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은 벌써 읽다가 포기한 게 세 번이나 된다 -_-)

그럼에도 <샤이닝>을 잡은 건 순전히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의 이름 때문이다. 고기 맛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진정한 고기 맛을 보고 싶었다;

까페에 처박혀 두 시간 동안 하권을 독파한 후, 한숨을 내쉬었다. 오오오. <유혹하는 글쓰기>를 읽으며, 보통보다 많이 스마트한 포스를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두서 없어 보이는, 여기저기 깔린 복선들,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악몽을 교묘하게 끼워맞추는 논리, 캐릭터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묘사, 그리고 현실에서 붕 떠 있지 않은 오히려 혹시 정말로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리얼리티가 꿈틀거리는 이야기(그래서 소설 앞에 오버룩 호텔이 온전히 작가의 상상만으로 만들어낸 장소라는 설명까지 나온다. 하하)...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었다. 하지만 대니에겐 빛(샤이닝)이 있으니, 언젠가 또다른 악몽을 목격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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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ka - Life In Cartoon Motion
Mika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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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의 재림, 뭐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확실이 음색이 비슷하긴 하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에 비해 기교는 좀 덜 들어가서 머큐리 특유의 절절함을 부담스러워하는 ^^ 내겐 더 좋았다. 뭐 사실 음색만 비슷하달 뿐, 음악은 마이 다르다.

많은 칼럼리스트들이 2007 최고의 앨범으로 뽑은 앨범이다. 들어보고 나니 대중도 그렇지만, 칼럼니스트들이 많이 반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신선함과 패기가 가득 찬 음반을, 게다가 신인의 음반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에너지를 유지하며 듣는 사람을 쥐었다 놨다 한다. 기분 좋은 뮤지컬을 듣는 느낌이기도 하고. 정말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니! 이 음악은 딱 월요일 아침 출근용이다 ^^

벌써부터 다음 앨범이 기다려진다. 부디 이 사람에게는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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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황시내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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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주 좋은 에세이집 한 권을 읽었다. 혼자 발견해낸 책은 아니었다. 신문을 잘 들여다보지 않아서 이 사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는데, 중앙일보에도 칼럼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황시내. 소설가 황순원의 손녀이자, 시인 황동규의 딸이라고 한다. 그런 문학적 후광 때문일까. 책 뒷표지에는 마종기, 성석제, 김형경이 그녀 뒤의 아우라에 압도당한 듯한 상찬을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책 뒷날개에는 '한국 문학을 빛낼 새로운 에세이스트의 탄생!'이라는 자못 흥분에 들뜬 선언이 적혀 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이 아주 좋았다. 이틀 만에, 그것도 피곤한 잠자리와 출퇴근 버스 안에서 내리 읽어낼 만큼. 나와 나이 차가 크게 나지 않는 동시대인임에도 그녀의 글을 저 옛날 뮌헨의 슈바빙 거리를 배회하는 전혜린의 그것과 닮았으며,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하고도 긍정적인 시선은 장영희 교수의 글을 닮아 있었다. 고전적인 단단함과 낭만적인 부드러움이 섞여 있었다. 그녀 삶의 무대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지금-이곳'을 살아가는 이의 고단함이라든가 지긋지긋함 따위는 없었다.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부러웠고... 또, 이곳을 긍정하며 살아야겠다는 유치한 다짐 같은 걸 했다. 지난 일 주일, 내게는 그 다짐이 너무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것, 시간의 단면을 잘랐을 때 나타나는 마블링 무늬 같은 것. 그것을 어떤 모습으로 간직하느냐는 다분히 주관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간직하느냐를 떠나) 황시내의 기억 속 이야기는 아름답고 이국적이고, 다정했다. 그게 내게 어떤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 시절이 내게 어떤 무늬를 남기고 지나갈지를...

 

   
  삼십대를 맞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삼십대가 된 지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나는 갑자기 내가 어쩐지 삶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삶, 이 생활, 이 저녁, 이 불빛, 이 설거지, 이 외로움, 이 반복되는 생활의 면면들이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고, 그러나 그것은 삶에 대한 권태로움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 오히려 그 반대였어. 뭐랄까,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것 하나 없지만, 그리고 아직 세상에 보탬이 될 만한 일 하나 한 것 없지만 웬지 이제는 드디어 온전히 세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은 느낌. 삶의 주인이 된 듯한 느낌.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이라는 클럽의 준회원이었다가 어느덧 정회원 자격을 부여받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어. 그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이었을지? 아마도 여태까지 쌓아온 경험들과 추억이 아니었을까. 예전에 그리도 심각하고 목숨 걸 만큼 절박하던 일들이 지나고 보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 데서 오는 느긋함, 웬만한 일은 이제 큰 집착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여유로움... (p.204-205)

 

기다림이 충족되는 순간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온다. 해는 서서히 기울다 눈 깜짝하는 새 숲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기나긴 사유의 틈새 사이로 잠은 소리 없이 밀려든다. 새벽이면 새들은 한순간 잠을 깨어 지저귀기 시작하고, 퇴근하여 들어선 책상 위에는 주문하고 잊은 책이 기다리고 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갑자기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깨닫고, 또 갑자기 사랑이 끝나버렸음을 알게 된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고, 은행 전광판에는 기다리던 번호가 떠오르며, 잊었던 유년의 기억은 순식간에 섬광처럼 형체를 드러낸다.  (p.218)

 

생 앞에 홀로 놓인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이구나, 하고 나는 그 아름다운 노래를 나름대로 이해했다. 아주 잠깐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띠운다 해도 그것은 끝없는 혼란과 숙명적인 고독 속의 찰나일 뿐.

교실 바닥에 주저앉아 공들여 왁스칠을 하며 열다섯 살의 나는 대상이 모호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어쨌든 생은 내 앞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고, 나는 그것을 성의 있게, 할 수 있는 데까지 헤쳐나가볼 용의가 있었다. (p.268-269)
 
   


 

+ '한국 문학을 빛낼 새로운 에세이스트의 탄생!'이라는 문구에 왠지 빈정이 상해서 몇 마디 투털거려본다. 한국 문학이 얼마나 에세이스트를 대접해주었는지, 한국 문학계에 지금 훌륭하다 할 에세이스트가 얼마나 많은지도 잘 모르겠다. 아마 저 카피는 앞에 이야기한 대로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었으리라. 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글을 어떤 그룹 안에 가둬두지 않기를, 황시내가 계속 좋은 에세이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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