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번째 생신을 며칠 앞둔 딸아이가 오랜만에 내 서재를 방문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제 책을 좀 읽어보시겠단다. 반가운 마음에 용기를 내서 그 녀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을 했다. 


“우선, 내가 쓴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어떠니?” 거부 반응은 없다. 다만 왜 그 책들을 읽어야 하며 그 책을 읽으면 어떤 발전을 하게 되는지 설명을 해보란다. 어이가 없었다. 대학생이라고는 하지만 제대로 된 화장은 커녕 커피를 마셔본 적도 없고, 하이힐을 신은 적도 없는 애송이에게 8권 책을 낸 대문호가 영업 프레젠테이션을 하란 말인가? 


물론 그 애송이에게 굴욕적인 행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내 책이 왜 위대한지를 알려주는 객관적인 훈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표지에 붙어 있는 ‘올해의 청소년 교양도서’, ‘2019 세종도서’딱지를 가리키며 이 훈장의 의미와 취득의 어려움에 대해서 누누이 설명했다. 아무 말이나 공감의 표시가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애송이 앞에서 갈수록 더 비참해졌다.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내 불후의 명저를 다른 책 더미에 슬쩍 숨겨버렸다.


대신 다른 책을 추천했다. 마구잡이로 책을 사들인 보람이 있더라. 여기저기에서 딸아이의 전공과 관련이 있는 책이 쏟아져 나왔다. 딸아이는 내 책을 이야기 할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열광했다. 제 방 책장은 꽉 차서 지금은 가져가지 못하지만 차근차근 읽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딸아이는 내 서재를 떠났다. 딸아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조금 전에 숨겨버린 불쌍한 내 책을 꺼내서 어루만졌다. 딸아이에게 정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을 혼자 속으로 되새겼다.


“이 책 말이야, 아버지가 딸에게 고전이야기를 들려주는 대화체이거든. 그 아버지가 나고 딸이 바로 너란다” “내내 너를 생각하면서 쓴 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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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2-19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원래 그래요 등잔밑이 어둡잖아요. 언젠간 따님도 아빠가 대문호였다는 걸 알 날이 있을 거예요.^^

박균호 2020-12-19 11:26   좋아요 1 | URL
그랬게 말씀하시니 부끄럽습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