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이념보다는 가족애가 우선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인 염상진과 염상구는 서로를 향해서 총구를 겨눠야 하는 처지다. 형 염상진은 빨치산을 동생인 염상구는 우익의 편에서 형을 소탕해야 하는 입장이다.
마침내 염상진이 토벌군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빨갱이라고 모욕을 받을 때 염상구는 가슴에 넣어두었던 형제애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놓는다. ‘살아서 빨갱이지 죽어서도 빨갱이냐’고 형을 보듬는다. 내 입장에서는 태백산맥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지점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퇴근해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넷플릭스로 삼국지를 보기로 했다. 과연 책으로 읽었던 때와는 다른 감동이 느껴졌다. 이제 막 여포가 천하의 절색 초선의 꼬임에 빠져서 주군인 동탁을 향해 창을 겨누는 순간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내가 피식피식 웃으면서 <뽕숭아 학당>을 봐야 하니 지금 보고 있는 삼국지를 그만 보란다. 식겁했다. 그놈의 임영웅, 뽕숭아 학당.
그건 그렇고 마치 등 뒤에서 아내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착각을 했다. 가족 계정으로 묶인 사용자들은 다른 사용자가 어떤 영상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다. 새삼 참 무서운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아내의 목소리 뒤로 딸아이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내의 여포인 딸아이는 분명 대낮에 운동이나 공부를 하지 않고 골방에 혼자 누워 넷플릭스에 빠져 있는지 애비를 탓하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아내에게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넷플릭스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일으켰다. 몇 번을 돌려보아도 지겹지 않은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를 보다가 딸아이에게 들키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으로 아내에게 전혀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키보드로 손을 뻗는데 전화기 너머로 딸아이의 목소리가 커졌고 무슨 말을 하는지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빠는 혼자 사는데 넷플릭스라도 봐야지. 아빠는 그냥 보게 하고 엄마가 나중에 봐”
이십 년 동안 마음에 두었던 염상구의 형제애가 새삼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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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12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색의 감독..이 도대체 뭔가 해서 검색해봤네요ㅎㅎ; 저는 조카가 제 계정으로 넷플릭스 시청 중인데 가끔 이 아이가 뭐 보나~ 체크-_-해 보게 되더라구요 호호^^ 효녀 따님이시네요. 흐뭇하셨을 듯. 그러나 임영웅의 늪은 매우 깊은가봐요. 일흔 넘으신 제 엄마도 영웅 앓이 중^^;;;;;;

박균호 2020-08-12 21:53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감히 불후의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av에 대한 순수하고 열정적인 태도 ㅎㅎㅎㅎ 리스펙트하게 되던데요. 그리고 초반에 주인공이 영어교재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성공스토리가 나오는데 너무 재미나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