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내가 인세를 제법 받았다는 사실을 실토하였다. 아내와 딸은 부의 재분배를 요구했는데 아내는 소박하게도 향수 하나면 충분하단다. 향수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지금까지 향수를 선물해준 적이 없으니 귀띔 해준 것이 감사하다.
인터넷과 주위 여자분들께 탐문 조사를 한 결과 적당한 것을 골랐다. 생각한 것보다 비싼 가격에 놀랐지만, 모름지기 아내에게 하는 선물인데 그 정도는 써야겠더라. 어이없는 것은 인터넷 쇼핑몰에는 팔지 않고 오직 오프라인 매장에 연락해야만 살 수 있다고.
어찌어찌하여 주문을 하고 배송을 기다리는데 담날인가 아내의 화장대에 내가 주문한 향수가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옳거니, 내가 없는 사이에 아내가 택배를 받았구나 싶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따로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부부 사이에 그 정도 일에 따로 인사를 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의아하게도 다음날 향수가 배송된다는 문자를 받았다. 업체에서 실수로 두 번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이제 막 아파트 입구에서 나에게 배송할 요량으로 택배 상자를 들고 오는 기사에게 반품할 것이니 다시 가져가라고 부탁을 드렸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아내가 느닷없이 ‘당신 향수 온 거 반품했지?’란다. 그제야 눈치를 챘다. 어지간히 무던한 양반이다.
내가 천리만리를 거쳐서 선정한 진상품이 사실은 아내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던 제품이었다. 아내의 화장대에 있던 향수는 아내가 구매한 것이고 거의 다 사용해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나 부주의한지 카드 사용 명세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었다. 자칫하다간 센스 있는 남편이 될 뻔한 기회를 놓쳐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기관장으로 승진할 기회를 놓쳤다고 해도 이토록 아쉬울까.
다행히 만회할 기회가 왔다. 오늘이 바로 아내의 생일이 다가왔다. 생일 선물로 문제의 그 향수를 선물하면 되지 않겠는가. 감동의 무게는 덜 하겠지만 말이다. 주말부부라 얼굴을 보지 못하는 아내에게 전에 없이 이모티콘을 보내고 생일을 축하한다는 문자로 부족해서 전화를 걸어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자연스럽게 선물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내는 물건을 싫고 미션 하나를 줄 테니 그것만 잘 수행해 달란다. 미션 내용은 문자로 통보하겠단다. 잠시 뒤에 도착한 아내의 미션을 보고 숨이 멎는 듯했다. ‘임영웅이 부른 ’바램‘을 불러 달라고’
자비로운 아내는 친절하게도 직접 불러주기가 머쓱하면 녹음을 해서 보내줘도 된다고 했다. 나는 학창 시절 음악 시간을 제일 싫어했다. 타고난 음치였다. 똘똘한 강아지에게 시켜도 나보다는 더 잘 부를 것이다. 당연히 성적은 항상 수우미양가 중에서 ‘양’이었다.
군대 시절 구보를 하면서 뒷줄에 선 고참이 장난삼아 나에게 군가를 독창하라고 했을 때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라는 심정으로 하지 않고 버티다가 구타를 당한 것이 얼마나 자주였던가. 모래에 원산폭격을 두 시간 시켜도 나는 끝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하긴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참이 시키는 노래를 하지 않았다고 번번이 고초를 겪는 나를 안타깝게 여긴 다른 고참이 한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균호야, 넌 참 쉬운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나’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 그 고참이 다시는 나에게 노래를 시키는 용기를 내지는 않았을 터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명품백이나 고가의 화장품을 마다하고 남편이 불러주는 노래 한 곡을 소원하는 아내의 ‘바램’을 거절할 수는 없다. 시험 기간이라 일찍 마치는 날인데 점심도 마다하고 퇴근을 했다. 빨리 집에 가서 ‘바램’을 녹음해야 하니까.
운전하는 내내 임영웅이 부르는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 차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크게 따라 불렀다. 과연 어려운 노래였다. 대학 시험을 볼 때도 이토록 비장하지는 않았다. 원룸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로 반주를 틀어놓고 학교에서 출력해온 ‘바램’ 가사를 낭독하기로 했다. 아내는 잘 불러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다만 불러달라고만 했다.
엄숙하게 작업을 시작하였지만, 뜻밖의 난관을 만났다.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 단 2~3초를 녹음하다가 혼자 웃음보가 터져 저 멈추기를 거의 열 번 이상이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상상을 하기로 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을 하면 웃음이 터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봤는데 노래 부르기에 너무 집중을 하다 보니 ‘생각’이라는 것을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온다.
노래를 부르면서 내 코를 쥐어박아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머리를 너무 세게 쥐어박았다가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 했다. 결국 웃음이 없이는 완창을 못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반주를 배경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불가능하고 반주를 듣고 나서야 노래를 할 수 있겠더라.
결국 웃음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내가 지금 국어책을 읽고 있는 게라는 생각이 들면 드는 대로, 불굴의 의지로 노래 부르기를 이어나갔다. 웬 노래가 이렇게 긴가. 가사가 복사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운다. 녹음이 진행될수록 나의 가벼운 목소리는 휴대폰 녹음 앱으로, 나의 무거운 영혼은 깊고 깊은 심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웃음을 참느라 한 소절을 읽고 입을 털어막아가면서 몰입한 결과 마침내 나는 ‘바램’을 완창하였다. 기념비적인 일이다. 러닝타임이 무려 4분 2초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세상에 없는 음치의 노래가 기초공사를 차곡차곡 하다가 마침내 거대한 불협화음의 성이 완공되어 있었다.
노래도 아니고, 낭독도 아닌 정체불명의 ‘중얼거림’ 정도로 정의해야겠다. 아내와 딸은 이 파일을 영구 소장할 것이다. 틈나는 대로 내 앞에서 그 노래를 틀면서 나를 놀려대겠지.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아내의 생일을 기념하여서 노래를 불러주었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아내에게 나의 불후의 명작을 보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넋이 빠져나가 있는데 아내의 답장이 왔다. 아내에게 난생처음 듣는 찬사를 들었다. “아주 감동적이야” “고마워”라는 답장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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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8-05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임영웅 노래 어려운데ㅜㅜ;;;; 녹음 성공 축하드립니다. 저도 음치박치라ㅠㅠ 막 웃으며 읽었지만 그 노력에 공감하고 감동받습니다^^

박균호 2020-08-05 23:43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어렵더라구요. 근데. 전 모든 노래가 다 어려워서..ㅎㅎㅎ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2020-08-06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0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6: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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