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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통판사 천종호의 변명
천종호 지음 / 우리학교 / 2018년 4월
평점 :
내가 맡은 학생부장은 모든 교사가 기피하는 업무다. 역설적으로 나에게는 천직이다. 학교에서 거절을 못하는 사람이 맡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호통판사로 알려진 천종호 판사가 8년 만에 소년 법정을 떠나면서 “삶의 기쁨이 통째로 사라진 기분”이라고 말했을 때 그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나쁜 행동을 한 소년들을 엄단하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소년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는 것이 의아했다.
학생부장을 하면서 왜 모든 교사가 이 업무를 기피하는지도 더 잘 알게 되었고, 천종호 판사의 심정도 이해가 되더라. 학생부장은 학교에서 경찰, 검사, 판사의 역할을 모두 해야 한다. 학생부장의 주요 업무인 학교폭력사안의 처리과정을 살펴보면 경찰, 검사, 판사의 업무 처리 과정을 큰 틀에서 보면 거의 같다. 사안을 조사하고(경찰), 재판에 회부할 것인지 검토한 다음(검사), 판결을 내려야(판사)한다.
워낙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문제가 많으니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아예 폭력사안을 처리하는 절차를 경찰, 검사, 판사의 업무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세 직업의 업무처리 방식을 따라야 하는 학생부장의 고충이 오죽하겠는가? 업무처리 절차에 문제가 생기면 사회적, 법적 책임도 면하기 어렵다. 늘 ‘오늘도 무사히’를 염원하는 것이 학생부장의 운명이다.
학생부장 업무를 하면서 전에 없던 묘한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더라는 것이다. 늘 학생들을 단속하고, 징계하는 일을 주도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학생들에 대한 애착이 샘솟는다. 내가 특별히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처벌을 한 대상을 가까이서 매일 지켜보다보니 그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느껴진다.
담임을 한 학생이 학교폭력과 관련되어서 출석정지 처분을 받았는데 그 학생의 학생부에는 학교폭력 연루 기록이 남아 있지만 내 마음에도 죄책감과 미안함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한층 밝아지고 모범적으로 변한 그 학생을 볼 때마다 대학이나 취업 처에 그 학생을 위한 추천서의 문장을 하나하나 생각하게 된다.
천종호 판사도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소년법정에서 일을 하지 않았나는 추측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