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시를 위시한 도덕적 정체성의 동기화론자들은 도덕성과 정체성의 통일을 도덕적 성숙의 지표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 정체성이 성숙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내적 자아감과 일관되게 유지하려는 삶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고 이 내면의 자아가 도덕적 관심에 집중할때 강력한 도덕적 동기를 얻는다. 이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의 의미와 일치하도록 행동을 규제한다. 불일치는 부정적인 감정을 생성하고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 의미와 더 잘 일치하는 결과를 생성하기 위해 다르게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로써 우리는 도덕적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통해 앎과 행동의 관계에 대한 보다 확장된 헤안을 얻을 수 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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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도는 천지자연이 만물을 낳고 질서를 세우며 조화를 이루는 원리로서 덕의 기초가 되며, 덕은 그러한 도의 원리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얻게 되는 품성의 상태를 말한다. 즉, 도는 시공을 초월한 자연의 기본 원리인 보편 원리에 해당하며, 덕은 시공에 대처한 인간 행위에 나타난 도의 구현, 또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실제 행동을 가리킨다. 이에 우리는 ‘도덕‘을 삶의 원리를 실천하는 행동의 내면적 규범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 ‘도덕‘은 단순히 ‘관습의 범위에 국한되지 않고 절대적이자 보편적인 원리에 따른 행동의 내면적 규범을 구체화한 것이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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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만들어 내고 있는 시대에, 왜 우리는 일자리라는 생존 수단을 고민해야만 할까?" 다시 말해 "인류가 탄생한 이래 가장 파이가 커진 시대에, 나눌 것이 가장 많은 시대에, 왜 우리는 내 몫의 파이를 어떻게 지켜 내야 할지 걱정하는 것일까?"
제 생각엔 우리가 고민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요.
‘생산력 증대가 필요했던 결핍의 시대의 분배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필요했던 이들(독서인 주; 자본가들)은 과거에는 전혀 윤리적 문제가 아니었던 ‘노동‘을 선악의 문제로 바꾸는 시도를 해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선이요, 게으른 것은 악‘이라는 노동 윤리를 만들어 낸 것이죠. - P64

이 커다란 파이를 함께 나누지 않겠다고, 노동을 통해 필사적으로 그 자격을 증명하라고 말하고 있는 건 인간일까요? 아니면 기계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위험은 인간일까요 아니면 기계일까요? - P66

"미국 로스쿨에 입학한 전체 흑인 학생 3,435명가운데 시험 성적만으로 입학할 수 있었던 학생은 687명뿐이었다." 현실이 이런데도, 성공한 다수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산계급들이 어이없게 차별철폐조치 폐지에 동조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요? 그 이유는 우리들 대다수가 자신이 이룬 성공을 오로지 자기 노력만으로 얻었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결국 자신의 성공을 만들어 준 사다리를 다음 세대들이 쓸 수 없게 걷어차 버리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난 거예요. 바우만은 이처럼 복지국가가 만들어 낸 자신감에 넘치는 세대가 복지의 힘을 평가절하하고 자신의 노력과 재능만으로, 국가의 도움 없이도, 시장을 통해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 일어났다고 분석하죠. 이런 바우만의 분석은 복지국가의 수혜자들이 스스로 복지의 축소에 동의하게 된 주요 원인을 잘 설명하고 있어요.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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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시간의 개념을, 시간에 내재한 우연성과 삶에 내재한 예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니 인간이 기계에게 그것들을가르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인간과 기계의 궁극적 차이에 대해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너무 심각하게 고민할 이유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문제는 기계를 통해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지,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와 인간의 구분‘은 아니니까 말이죠.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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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전체주의자는 확신에 찬 나치나 확신에 찬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진리와 거짓, 경험적 현실과 사상적 규범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한나아렌트의 지적이다.
…..
전체주의는 자신이옳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권력을 진리로 믿는다. 전체주의는 권력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을 "진리"라고 부른다. 전체주의는 "학문"으로 시작해서 "기만"으로 끝난다. 거짓 진리와 거짓 학문은 겉으로는 아주 명확한 것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근본이 없다. 나치의 생물학주의나 스탈린의 역사주의가 그렇다.
…..
알랭에 의하면, 진리는 복종하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진리는 자유로운 것이다. 더 나아가 진리는 명령하지도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삶이 죄가 될 수는 없으며, 살인이 정당화될수는 더더욱 없다. 우리는 거짓말도 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주의자들이고, 불성실하며, 배은망덕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말이 성실한 사람, 관대한 사람, 감사를 아는 사람에게 해를 입혀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 P200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심지어 힘의 사용도 불사하는 사람들과, 누구와의 어떤 전쟁이든 상관없이 전쟁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는 사람들은 구분해야 한다. - P231

회중이 재치가 없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두고서든지 농담을 할 수가 있다. 실패를 두고, 전쟁을 두고, 죽음을 두고, 사랑을 두고, 병을 두고, 고문을 두고. 그러나 그때 유머는 비참한 세상에 조금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어야 하고 유순과 가벼움을 줄 수 있어야지, 증오와 고통과 멸시를 얹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두고 웃을 수 있지만, 아무렇게나 그래서는 안 된다. - P258

유머는 의미가 어느 정도 유지될 때 웃음을 자아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머는 근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대화시키거나, 불안정하게 만들거나 또는 그것과의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근엄이 폐지되는 것은 아니다. 유머는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우리의 욕망, 우리의 신앙, 우리의 환상은 여전히 현실의 일부이다. 유머는 즐거운 각성이다. 그것이 두 가지 미덕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각성이라는 점에서 유머는 명철을 얻게 하고, 그래서 정직에 이르게 한다. 즐겁다는 점에서 유머는 사랑에, 즉 전체에 이르게 한다.
알랭의 말을 다시 반복해보면, 정신은 전체를 조롱한다. 정신이 혐오의 대상을 또는 멸시의 대상을 조롱하면 그것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사랑의 대상을 또는 존경의 대상을 조롱하면 그것은 유머이다. 유머의 가장 손쉬운 대상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 내가 가장 존경하는 대상이 아닐까? 데프로주가 말했듯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유머의 위대성, 또 희귀성은 바로 거기에 연유한다. 그러니 유머가 어찌 미덕이 아닐까?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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