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와 앨리스
이와이 슈운지 감독, 스즈키 안 외 출연 / 엔터원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자주색 교복을 입었던 그 해 4월. 넘들과 다른 나를 보여 줄 수 있는 거라곤 짧거나 유난히 길게 내린 치마길이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누가누군지 구분이 안갈만큼 똑같이 보이는 그 모습이 싫어 암모니아를 뿌려 탈색시킨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나, 누구요! 하고 외쳤던 그 해 4월. 반성문을 쓰라는 말에 학생부실로 잡혀 온 나. 먼저 와 반성문을 쓰던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삼십분 동안 반성문도 쓰지 않고 서로를 멍하니 처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런 말들을 던졌다. 빈정 상하는지도 모르고, 빈정 상할꺼라 생각도 하지 않고 마른 빵부스러기처럼 그렇게 건조하게 이런 말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밀가루 반죽처럼 지루한 얼굴이군. 소금기 없는 바닷물처럼 싱거운 목소리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 없는 발걸음이군. 삭정 가지처럼 바람에 툭 하고 부러질 듯한 몸이군.  풍선껌도 한번 씹어보지 못한 재미없는 입이군.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이군.  깊은 우물처럼 속내는 도통 보이지 않는 눈동자군.

 
   영화< 하나와 앨리스>속의 예쁘장한 두 소녀들의 하루하루는 밀가루 반죽처럼 지루하고 싱겁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첫사랑에 빠지고 자기정체성 찾아가기도 시도한다. 그녀들의 중심에는 첫사랑과 그로인한 갈등이 중심에 놓여있고 그 변두리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통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찬람함과, 나름대로의 청춘 상행 곡선을 그리고 있는 소녀들에게는 그 정도가 딱인걸까? 더 이상의 깊은 사고의 성장통, 그 시간을 감독은 왜 허락하지 않는걸까. 그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교복을 입고도 등교길이 유쾌할 수 있고, 신날수 있고, 설렐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둘의 우정이  가능하다니. 교복을 입고도 환희 웃을 수 있고 속삭일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행동의 제약없이 끊임없이 혹은 마구 움직일 수 있다니. 과연 교복 예찬자,  이와이 šœ지야! 라고 나는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비꼬는 듯 한 중얼거림을 던지면서도 재채기 할때마다 들썩거리는 마은 한켠이 들썩거리는 건 아마도 하나와 앨리스의 모습에서 그해 4월, 학생부실에서 만났던 그 아이와 나를 발견 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쩌면 우리도 하나와 앨리스처럼 중심엔 성적, 대학입학(사랑이 아니라니, 비극이다)을 주변엔 자기 존재와 내가 보증선 삶의 무게들을 두었을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나는 감독의 깊이와 중심의 순서를 오해한 것을 꼬집고 싶다.)

   철학이 무언지, 연기하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하나와 앨리스 그리고 4월의 나와 그 아이. 욕망하는게 뭔지, 안에서 꿈틀 거리는게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궁금하던 그 느낌의 공통점은 아마도 무게를 넘어 뛰어오르고만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하나와 앨리스가 발레 동작인 아라베스크를 하며 날기를 꿈꾸웠다면, 토슈즈를 신지 못하고 종이컵에 테이프를 동여맨 채 춤을 추어도 그 어설픈 움직에도 최선을 다했다면, 나와 4월의 그 아이는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깜깜한 운동장을 또 달리고 달렸다. 중력을 지워 날수 있을 때 까지 달려보자며.  

   4월의 소녀들은 그‹š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천역덕 스러운 연기자가 되었고 내 다리를 움직여 달리는 것 보다는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에 더 익숙해 졌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록 잘 알아채고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이게 챙긴다. 세월이 흐른 어느날 <하나와 앨리스>도 그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시간이 올까. 뼈가 굳어 발레 동작을 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남들이 시선이 두려워 아라베스크 동작을 잃어버렸다하고 혹은 자신 아이들의 발레 동작을 보며 위안을 얻겠지. 그리고 만담을 하면서 웃었던 그때가 유치해져 이제는 만담을 하는 것도 아니,  만담을 들을때 웃음에도 인색해져 살아가겠지. 주위는 여전히 어지럽고 복잡하고 변한게 없지만 비밀 하나씩을 가슴에 담아가며 성장하던 시간을 봉인 시킨듯 영화는 어른이 된 나와 마주섰을때 그리고 어른이된 하나와 앨리스를 상상하는 순간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과대평가 되고 있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들. 스타일리쉬로 포장한 네러티브의 빈약성. 그리고 감독 이름 자체의 상품성.(물론 그의 영화 전부를 본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단적으로 평가내리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내가 본 영화들의 몇 편은 그리했으니.) 그래서 나는 매번 그의 영화를 보면서 뭔가 씹을꺼리를 찾아보려 한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이 감독의 영화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지독한 감상과 봉인 된 추억을 들먹거려 이렇게 꼼짝 못하게 하다니. You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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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2-03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와 앨리스는 극장에 가서 볼 만큼 끌리지 않더군요.
이와이 šœ지 감독이 우리나라에서 좀 과대평가되고 있는가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가 예쁘장하다는 건 인정합니다. 러브레터의 겨울풍경은 참 좋았어요.^^

비로그인 2005-02-0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하나와 앨리스는 별로였음. 스왈로우테일버터플라이는 언제 개봉하는 거지 기대하고 있는데 드레곤 피쉬도 마찬가지고 그게 바로 이와이의 결정판인데

어항에사는고래 2005-02-04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영화 포스터 속의 두 소녀가 끌려 아니 사실은 제가 감독을 예전부터 짝사랑하던터라(좋아하던 사람이랑 너무 닮아...그런데도 항상 영화평은 짜죠.)봤더랬죠. 러브레터의겨울 풍경...음...생각납니다, 그 첫사랑에게 그 눈밭에서 외쳐보고 싶네요. "오겡기 데스까?"

혓바닥, 우리 예전에 시네마테크에서 스왈로우테일버터플라이 보지 않았던가? 가물가물.


하루(春) 2005-02-05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러브레터와 4월이야기를 집에서 비디오로 봤는데, 집중이 안 되더군요. 특히, 러브레터는 내용을 봤는데도 내용을 전혀 모르고.. 그런데 이번 하나와 앨리스는 포스터가 참 맘에 들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어항에사는고래 2005-02-05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브레터의 인물, 풍경이 모두 정적이라 어쩌면 집중하기 힘드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집중이 잘 안된다는 건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와 앨리스의 인물들은 러브레터의 인물들보다 좀 더 동적이라 어쩜 덜 지루할 수도 있겠네요. 두 소녀의 움직임이 어떨땐 정신없기까지 하다니까요.^^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면 재미있었다, 라고 그냥 말해야 될 둣한 기분이 들 정도로 말이죠.

2006-12-19 1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6-12-19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lkor님, 글 제대로 읽고 시비조의 말씀 던지시지 그래요?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 다시 읽어보시지요.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E. 프랭클 지음 / 제일출판사 / 2000년 2월
평점 :
절판


혼자서 극장 갈 때가 빈번하다. 누군가의 방해받지 않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고싶다는 뭔가 근사해 보이는 핑계를 달지만 사실은 극장을 함께 갈 주변 사람들이 없어서 이다. 한 두 번의 혼자 간 극장 출입은 자연스레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고 처음의 그 어색함과 낯설음도 이젠 하나의 극장 찾는 즐거움으로 익숙해졌다.
 

몇 해전 여름,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극장을 찾았다. 3시간이 조금 넘는 상영시간동안 단 한번의 움직임도 없이 구석자리에서 숨죽여 보던 영화...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뒤에도 젖어 있는 눈시울을 닦지 못했던 영화가 슬그머니 기억에서 빠져나온다. 스필버그의 "쉬들러 리스트"는 그 해 여름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지던 영화였다. 상업영화에 익숙해져 있던 다수의 관객들은 스필버그라는 생산공장의 잘 포장된 영화에 신선함을 느꼈고 그 영화가 예술 영화인양 떠들어댔다. 그리고 흑백Film으로 잘 포장하고 역사의 상처를 리본 끈 삼아 관객에게 내민 "쉰들러 리스트"에 지구는 열광했고 싸구려 눈물이라는 대가를 지불했다. 나 역시 그런 범민(凡民)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물론 영화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상처를 싸구려 감상쯤으로 처리했어야만 했을까? 상처의 흔적을 연고로 발라버린 식의 스토리전개와 감상은 공증 받은 천재라는 스필버그의 가장 큰 실수였다. (어쩌면 상처 건드리기에 망설이는 것이 스필버그의 가장 약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후속작인 "아미스타드"를 보면.)유태인들의 강제 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영화는 "인생은 아름다워"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전혀 아름답지 않는, 아름다울 수 없는 강제 수용소의 생활을 주연을 맞았던 감독은 역설적으로 아름답게 행복하게(?) 표현했다. 강제수용소에 가게 된 어린 아들과 아빠. 그리고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남편을 따라 나선 부인. 그들의 수용소 생활은 "쉰들러 리스트"의 수용자들의 생활처럼 처절하게 보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낭만적으로 유쾌 하게까지 해 보인다. 어린 아들에게 수용소 생활이 게임이라고 말한 아버지의 말에 관객은 체면에 걸린다. 지금은 게임 중.그러나 목구멍을 애이게 하는 쓰림에 침을 삼키는 순간 흐르는 눈물이 있다. 상처의 깊숙한 곳까지 들춰내는 상처에 연고를 바를 수 있는 능동형 동사를 관객에게 던진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인생의 상처이지만 관객은 연고를 바름으로써 감독의 역설적 표현에 수긍이 간다. 유태인들의 강제 수용소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이 밖에도 많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당대의 문제를 다룬 영화만이 아니라 그들 후손들의 차별을 다룬 영화들도 있다. 여전히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차별 당하고 있는 후손들에게 남겨진 그들의 상처가 있는 한 역사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고 상처 역시 쉽게 아물 것 같지 않다. 지나온 세월의 절반이 지나더라도. 요즘 이산가족의 상봉이 남겨주는 안타까움과 그들 가족들에게 다시 남겨진 그리움처럼. 역사의 상처를 감히 건드리면서도 영화를 예를 들 수밖에 없는 내 짧은 식견이 부끄러워 희롱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지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려 한다.


 이 책의 저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수용소 생활을 했던 사람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이여서 그런지 더욱 절실하고 인상적이었다. 수용소 생활의 어려움이 뼈 속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처절한 수용소 생활에서 인간들의 정신상태를 분석해 놓은 책이지만 난 정신분석보다는 수용소 생활의 끔찍함을 더욱 주시하게 되었다. 하루가 한 달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수용소.죽음이 언제 내 앞으로 올지 모르는 불안감과 암담하기만 한 미래에 실낮 같은 희망을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서술한활자 하나 하나를 따라 읽어 가는 동안 어떤 영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전생의 모습이 아니 였을까 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하게.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내뿜는 인간을 태워 눈발처럼 날리는 재. 강제노동과 구타. 그리고 소량의 음식. 수용자들은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다. 소량의 빵을 나눠 먹으며, 동상에 부어 들어가지도 않은 신발에 이미 발이 아닌 발을 쑤셔 넣으며 개, 돼지 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화에서 보면 살아남으려고 노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 보이려고 손에서 피를 짜내 얼굴에 발라 생기 있게 보이려는 노력까지 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왜 그토록 살아남으려 몸부림 쳤던 걸까? 그리운 가족들 때문에? 고향 때문에? 그들은 이미 삶의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아니, 이 현실을 견디기는 너무나도 끔찍하지 않은가?


내 생각과 삶에 대한 입장이 짧고 철이 없어서 인지 그들의 그런 억척스러움을 이해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들 중 누군가가 날 설득하려 덤볐다면 난 그들을 바보라고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내가 삶에 대한 애착이 부족해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그런 현실 속에서 망가져 가는 내 모습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물리적 억압과 압박만이 아닌 내 정신적 황폐화에 난 자살을 택했을 것이다. 죽음이 모든걸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죽음이라는 수단으로 편안해지고 싶다. 그렇다고 그들을 모함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내 현실이라면 난 그렇게 선택할 뿐이라는 소신을 이야기 한 것뿐이다. 수용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짐승보다 못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어갔고(자살이든 타살이든)많은 사람들은 희망을 꿈꿔왔다. "죽이지 않으면 난 더욱 강해진다"라는 니체의 말처럼 살아남으려 했던 사람들은 강하게 현실을 견뎌내었다. 죽음과 삶이라는 경계에서 그들은 하루하루 그 선에 올라서서는 줄을 타듯 아슬아슬하게 살아왔다. 비록, 선택은 그들에게 있었지만 선택 후의 현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졌지만.
최악의 상황에서 잔인한 사람들은 더 잔인해져갔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더 큰 감수성을 가진다. 사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극한 상황에서야 느껴지고 아름다움을 배운다.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의 이상한 이분법적 관계가 정리된 후에도 수용소의 기억은 쉽게 정리되지 못하고 그 흔적을 남긴다. 먹지 못해 긂주린 배는 매일을 먹는 걸로 소비하게 하고 행복한 미래를 그리던 꿈은 수용소 시절의 끔찍한 악몽을 그린다. 잠들지 못한 자, 잠든 자 모두 악몽의 현실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이 그런 현실을 지나쳤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우리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괴롭다고.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는 우리는 현실에서 존재할 이유를 가지게 한다. 그렇게 보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어야 한다 . 고통은 사랑, 행복처럼 삶의 한 부분의 형태임이 분명하기에. 그래서 일까?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들의 선택이 자살이 아니었던 것은. 그들을 존재케 해주는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다. 유태인을 도와준 쉰들러의 무덤에 도움을 받았던 유태인들이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던 그 모습.그들을 학대하던 나찌당원의 한 사람이었던 사람,쉰들러. 사실, 쉰들러는 그들에게 취할 것은 다 취하면서 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태인을 학살하는 도시를 지나다 유난히도 붉은 코트를 입은 어린 여자아이의 시체를 본 뒤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유태인들에게 남은 것은 없다. 자유.그 어색함뿐이다. 마지막까지 쉰들러를 위해 이를 뽑아냈다. 인생은 아름다워 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은 게임 종료와 함께 탱크에 타게된다. 아이의 아버지는 죽음으로. 아이와 아이 엄마에게 남겨진 것은 앞으로 닥쳐올 또 다른 암담함뿐이다. 자유라는 모순이 만들어낸 구속과 절망. 그들은 또 다시 얼마만큼 행복해 질 수 있을까? 그들이 지불한 희생의 절반이라도 자유라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들에겐 이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는데. 가족, 재산, 건강.

 어쩌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고통은 계속 치료해야 할 그들의 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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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1-12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나 같은면 자살을 하겠다.

그런데....생명을 향한 사람의 의지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상황이 어려워 질 수록...

나치는 유태인들을 의도적으로 더럽고 짐승같은 생활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야 독일군들이 유태인을 학대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데요.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느끼게,

이 비참한 상황에서 짐승 보다 못한 생활을 하면서 생명을 구걸하는 비루한 인간들로 보이게 하면, 가해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나....

슬픈건....수용소에서는 자살을 할 수 있는 자유로움 조차 없다는거죠.

나치에 의해 죽지 않는한, 스스로 죽을 수 있는 방법이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어항에사는고래 2004-11-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다보니 감정이 조금 격해진 부분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습니다. 뜻없는 죽음 그리고 소용없는 학살 속에서 결국 얻으려던 것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득 아직도 그런 죽음들과 폭력들이 내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 씁쓸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수선님! 근데 이상하게 왜 자꾸 전 수선님을 수선화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걸까요?^^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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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삼촌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을 얼마전에서야 읽었다. 워낙 책과 담쌓고 지내는 지라 이제야 책을 집어든 나의 게으름을 탓하며 책을 읽어갔다.

책을 읽는 동안 한 영화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타임투킬>이라고 96년도에 개봉한 그 영화가 언저리에서 자꾸만 맴돌았다. 혹시 그 영화의 원작이었나하고 뒤져보니 그 여화의 원작자는 존그리샴이었다. 어쩌면 흑인문제를 다루어서, 백인의 폭력적 횡포 그 우월주의가 뭍어나는 영화와 소설이어서 비슷한 코드가 보였는지도 모른다. <타임투킬>이란 영화를 볼 고등학생이었던 당시는 어찌나 영화 속 백인 우월주의와 횡포에 부아가 치밀던지 금방이라도 인권운동가로 나서야 되는 건 아닌가 생각했었다. 

만만치 않은 두께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란 소설은 두께가 주는 거북함과는 다르게 잘 읽혀나가는 소설이었다. 잘 읽힌다는 것은 단순히 가볍다거나 경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 읽기의 편안함은 화자의 나이, 어린 소년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특성 때문이다. 어린이의 눈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  어린 화자의 서술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세계의 아이의 목소리처럼 듣기 좋게 들린다. 그러나 귓바퀴를 돌고 그 안으로 들어가 머리속에 입력되는 순간 그 세계는 결코 편안하지도 경박하거나 가볍지도 않은 처절한 현실이 된다. 폭력과 이기심 그리고 우월주의가 팽패한 세계. 그 세계는 추악하며 구토를 하게 만든다.  어쩌면 작가 하퍼리는 그것을 노렸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눈을 통해 듣고 본 세계의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 그 세계는 공포이며 지옥이라는 것을 더 강하게 독자에게 접근시키고자 했던것 같다.

나와 너의 교집합. 그 교집합이 아닌 부분은 타자일 뿐이다. 타자라는 것은 냉정함과 냉소의 타탕성을 갖게 해준다.  그 타자의 세계를 너와 나의 교집합은 끝임없이 사살한다. 목을 비틀기도 하고 칼을 드리대기도 하고 독가스를 살포하기도 하면서. 소설 속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앵무새, 흑인들은 백인들의 거만한 우월주의에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들어나는 죽음만이 아니다. 호적등본에 붉은 줄 긋는 사망선고만이 아닌 것이다. 타자와 그 타자의 세계에 대한 소외, 무시등의 찰과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기심과 욕심 거만한 우월주의 그리고 편협한 사고. 그것은 나 아닌 것들을, 우리가 아닌 것들을 타자로 만들어 버린다. 포함되지 않은 세계는 영원한 타자로만 존재되어지고 타자에 대한 냉정함과 냉혹함은 타타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나가 아닌 우리가 아닌 것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다. 나와 우리는 타자의 또 다른 타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타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그 아이러니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앵무새를 죽여야 타인을 나 혹은 우리의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아마도 끝이 없는 살인행위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 우리는 결정해야 할 것이다. 매일매일을 손에 피 뭍히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타인이라는 구분 그 경계선을 지우고 접근할 것인가.

 이럭저럭 글을 마치는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오늘 또 얼마나 많은 타자를 만들어 내 옆에 세워 두었는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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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1-11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좋아하는 책이라서요 ^^ 저도 이 책을 읽으며 같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

리뷰 잘 읽었습니다. ^^

어항에사는고래 2004-11-11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스님도 좋아하시는 책이었구나.
 
4teen_포틴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3
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를 쓰기전 내 나이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스물 여섯!(속으로 많이도 살아냈군.)그래서 내가 이렇게 근사하게 살지 못하는 건가? 그래서 이렇게 속 좁은 쫍쌀 할멈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건가. 열 네살이란 나이가 뭐 그리 대수이기에 이렇게 유난히도 스물 여섯이란 나이를 곱씹게 만드는지. 고얀 녀석들,. 고얀 열네살들, 

책에서 만난 녀석들은 정말이지 근사한 십대들이었다. 선입견이나 이기심이 없는 어른보다 성숙되고 풍성한 자아를 가지고 있는 보기드물게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그들에게는 틀이라는 것이 없고 규정된 가치관이라는 것이 없다. 그들에게 세계와 개인적 사고는 항상 열려 있으며 닫거나 혹은 손가락 하나 정도의 틈만 열어 놓지는 않는다. 열려있는 그들에게 달려 나갈 곳은 넓고 볼 수 있는 것은 많다. 그들의 시야는 140도만 기울어져 있는 나와는 달리 180도 열려있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그 만큼 포용하며 감싸 않는다. 그들에겐 거부의 손짓을 보낼 것들이 많지 않다. 아직까지 세상과 그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친숙한 이웃이 될 수 있다.  열네살 그 작은 나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이, 포용하고 끌어안을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니. 옆에 서 있다면 꿀밤한대 쥐어밖으면서 멋진 녀석들이라고 연신 말했을게다.

나이가 들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 용돈을 받아쓰는 학생들과 달리 내 스스로 번 돈을 지갑에 두둑히 넣고 내 생각과 의사에 따라 생각하고 고민해 물건을 살 수 있다. 내 생각에 따라 어디든 이동한다. 자동차를 이용하기도 하고 비행기를 이용해 어디든 여행을 가서 낯선 세계를 만나고 낯선 이방인을 만난다. 그러나 그 낯설은 속에서 이방인이 된 자신의 어색해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려 든다. 그렇기 때문에 모험도 없고 도전도 없다. 닫힌 마음으로 사고하며 자신만을 깜싸 안을 수 있는 작은 팔을 지녔을 뿐이다.

열네살이란 그 찬란한 나이, 그 녀석들의 삶을 통해 내가 얼마나 가지지 못한 사람인가, 왜 내 스스로 그 많은 것들을 버리고 살아왔던가 생각하게 된다.

 

PS 요즘 일본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이 화자가 온통 십대라는 것이다.(내가 그런것들만 골라 읽어서 그런가?)십대의 화자를 다룬 소설을 가볍게만 보던 나였다. 그러나 십대만의 이야기 속에 무시못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시못할 십대라는 무기. 오늘 내 목에 들이대여진 십대라는 무기에 이십대의 나는 오랫만에 파란피를 흘려본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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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4-10-25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파란 피를 흘리시다니~ 멋집니다요
스물여섯에 저는 두 번째 연애를 시작했는데...
며칠전에 박민규 글귀중에 서른 넘은 놈이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구절이 가슴에 꽂히더군요

어항에사는고래 2004-10-2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물 여섯에 두번째 연애를 끝내고 우두커니 책과 씨름하고 있지요.
서른 놈은놈? 아니죠 연애를 끝낸 놈들이 하는 말은 믿지 않는다로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자기의 연애사를 어찌나 거창하고 황홀하게 이야기 하는지...스스로도 질려버릴 정도.^^
 
지구 끝의 사람들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으로 만났선 세풀베다. 환경과 생태를 소설 안에 녹여내어 유리공예를 하듯 입으로 불어 인물과 상황을 만들어 내는 작가. 그리고 입으로 후후 불 때마다 터지지 않을까 지켜보는 이를 긴장시키고 풍선이 불어나듯 불어나면서 환상적으로 잡힌 그 모형에 입이 떡 벌어지도록 만드는 작가. 이 작가의 힘은 바로 그런 아슬아슬함 속에서 보여지는 황홀경이다. 지구 끝, 발 아래는 온통 벼랑 뿐인 그 자리에 서서 책을 읽게 만든다. 독자는 읽으면서 벼랑 저 아래의 까마득함에 머리가 어질어질 하면서도 발 끝 아래에 솜처럼 뭉쳐진 구름의 폭신함을 상상하기도 한다.(개인적 취향이니 "노"라고 강력하게 붉은 레드카드를 내게 내미신다하여도..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시라)

<지구끝의 사람들>은 이기심으로 벼랑 끝에 몰리는 고래와 그 고래를 지키려고 벼랑 끝으로 다가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어린시절 고래잡이 배를 타고 고래의 포획을 경험한 화자. 성인이 된 후 고래를 지키는 사람이 된 화자와 그 화자 주변에서 거대한 인간의 이기심과 맞써 싸우는 사람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지킨 사람을 돕는 고래(이 부분의 묘사는 아름답기도 하면서 조금은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든 부분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 바다 한 쪽의 작은 배에서 지켜보는 것 만큼 황홀경에 빠뜨릴만큼의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묘사였다.)

마구잡이로 고래를 잡는 일본 함선의 거대한 횡포는 세풀베다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바다에만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거대한 횡포에 피흘리는 것은 고래만이 아니다. 거대한 횡포는 소설 속에서 움직이는 일본 인들만이 아니다. 작가 세풀베다는 바다에서의 횡포와 싸우는 고래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계라는 거대한 함선의 횡포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었다.

일본 고래잡이 함선은 미국이 될 수도 있고 북한이 될 수도 있고 한국이 될 수도 있다. 횡포에 사살당하는 고래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민족이 될 수 있고 종교와 문화의 차이로 끊임 없이 충돌하고 있는 사람들이 될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인간취급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일본이란 함선은 당신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래는 당신일 수도 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세풀베다는 고래잡이가 이루지는 바다와 그 바다에서의 저항을 통해 우리라는 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일본 함선일 수도 고래 일 수도 있다는 어느 하나로 구획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듯 지구끝, 벼랑에 설 수 밖에 없는 일이다. 생존이 곧 파괴가 되고 그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은.이런 세풀베다의 생각들이 소설을 읽는 동안 읽혀져 나는 얼마나 전율했다. 무한대의 공간과 그 공간안에서 살아가는 무한대의 인간 감수성과 폭력성을 세풀베다는 잘 읽혀지는 동화같은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얼마만큼의 이기심과 폭력적 횡포를 자제하느냐 행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나는, 당신은 고래잡이 함선이 될 수도있고 피흘리며 죽어가는 고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발 끝은 과연 벼랑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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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0-2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의식하지 못했지만 고래잡이 함선이 되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이기심과 폭력적 횡포의 자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당.

어항에사는고래 2004-10-27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다는 님의 말에 감사드립니다.(에고, 쑥스러워라.)
제가 고래인지라 요 소설에 약간 예민하게 접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