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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
이와이 슈운지 감독, 스즈키 안 외 출연 / 엔터원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자주색 교복을 입었던 그 해 4월. 넘들과 다른 나를 보여 줄 수 있는 거라곤 짧거나 유난히 길게 내린 치마길이 뿐이었다. 멀리서 보면 누가누군지 구분이 안갈만큼 똑같이 보이는 그 모습이 싫어 암모니아를 뿌려 탈색시킨 머리카락 몇 가닥으로 나, 누구요! 하고 외쳤던 그 해 4월. 반성문을 쓰라는 말에 학생부실로 잡혀 온 나. 먼저 와 반성문을 쓰던 그 아이를 처음 만났다. 삼십분 동안 반성문도 쓰지 않고 서로를 멍하니 처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이런 말들을 던졌다. 빈정 상하는지도 모르고, 빈정 상할꺼라 생각도 하지 않고 마른 빵부스러기처럼 그렇게 건조하게 이런 말들을 서로 주고 받았다.
밀가루 반죽처럼 지루한 얼굴이군. 소금기 없는 바닷물처럼 싱거운 목소리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 없는 발걸음이군. 삭정 가지처럼 바람에 툭 하고 부러질 듯한 몸이군. 풍선껌도 한번 씹어보지 못한 재미없는 입이군. 플라스틱처럼 딱딱하고 차가운 마음이군. 깊은 우물처럼 속내는 도통 보이지 않는 눈동자군.
영화< 하나와 앨리스>속의 예쁘장한 두 소녀들의 하루하루는 밀가루 반죽처럼 지루하고 싱겁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첫사랑에 빠지고 자기정체성 찾아가기도 시도한다. 그녀들의 중심에는 첫사랑과 그로인한 갈등이 중심에 놓여있고 그 변두리에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통의 시간이 존재하고 있다. 나름대로의 찬람함과, 나름대로의 청춘 상행 곡선을 그리고 있는 소녀들에게는 그 정도가 딱인걸까? 더 이상의 깊은 사고의 성장통, 그 시간을 감독은 왜 허락하지 않는걸까. 그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교복을 입고도 등교길이 유쾌할 수 있고, 신날수 있고, 설렐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둘의 우정이 가능하다니. 교복을 입고도 환희 웃을 수 있고 속삭일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니. 교복을 입고도 행동의 제약없이 끊임없이 혹은 마구 움직일 수 있다니. 과연 교복 예찬자, 이와이 지야! 라고 나는 한마디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비꼬는 듯 한 중얼거림을 던지면서도 재채기 할때마다 들썩거리는 마은 한켠이 들썩거리는 건 아마도 하나와 앨리스의 모습에서 그해 4월, 학생부실에서 만났던 그 아이와 나를 발견 했기 때문이다. 그때 어쩌면 우리도 하나와 앨리스처럼 중심엔 성적, 대학입학(사랑이 아니라니, 비극이다)을 주변엔 자기 존재와 내가 보증선 삶의 무게들을 두었을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나는 감독의 깊이와 중심의 순서를 오해한 것을 꼬집고 싶다.)
철학이 무언지, 연기하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하나와 앨리스 그리고 4월의 나와 그 아이. 욕망하는게 뭔지, 안에서 꿈틀 거리는게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어 답답하고 궁금하던 그 느낌의 공통점은 아마도 무게를 넘어 뛰어오르고만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하나와 앨리스가 발레 동작인 아라베스크를 하며 날기를 꿈꾸웠다면, 토슈즈를 신지 못하고 종이컵에 테이프를 동여맨 채 춤을 추어도 그 어설픈 움직에도 최선을 다했다면, 나와 4월의 그 아이는 숨이 턱에 찰 때까지 깜깜한 운동장을 또 달리고 달렸다. 중력을 지워 날수 있을 때 까지 달려보자며.
4월의 소녀들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어른이 된 지금, 나는 천역덕 스러운 연기자가 되었고 내 다리를 움직여 달리는 것 보다는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에 더 익숙해 졌다. 내가 욕망하는 것을 지나칠 정도록 잘 알아채고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이게 챙긴다. 세월이 흐른 어느날 <하나와 앨리스>도 그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시간이 올까. 뼈가 굳어 발레 동작을 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남들이 시선이 두려워 아라베스크 동작을 잃어버렸다하고 혹은 자신 아이들의 발레 동작을 보며 위안을 얻겠지. 그리고 만담을 하면서 웃었던 그때가 유치해져 이제는 만담을 하는 것도 아니, 만담을 들을때 웃음에도 인색해져 살아가겠지. 주위는 여전히 어지럽고 복잡하고 변한게 없지만 비밀 하나씩을 가슴에 담아가며 성장하던 시간을 봉인 시킨듯 영화는 어른이 된 나와 마주섰을때 그리고 어른이된 하나와 앨리스를 상상하는 순간 묵직하게 다가왔다.
한국에서 과대평가 되고 있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영화들. 스타일리쉬로 포장한 네러티브의 빈약성. 그리고 감독 이름 자체의 상품성.(물론 그의 영화 전부를 본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단적으로 평가내리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내가 본 영화들의 몇 편은 그리했으니.) 그래서 나는 매번 그의 영화를 보면서 뭔가 씹을꺼리를 찾아보려 한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이 감독의 영화에 손을 들어주고 말았다. 지독한 감상과 봉인 된 추억을 들먹거려 이렇게 꼼짝 못하게 하다니. You W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