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드 Googled -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
켄 올레타 지음, 김우열 옮김 / 타임비즈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구글은 네이버와 다음이라는 강력하게 현지화된 검색사이트로 인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검색사이트로써의 영향력은 크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다방면에 엄청난 속도로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인터넷 기업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개인적으로는 (아마 처음인것으로 기억하는데) 저장공간 1G를 제공하는 이메일(G메일)과 우리집까지 보이는 위성사진서비스(구글 맵스)에 감탄하고 놀랐던 경험이 있다.
 
이 책은 3년간 구글을 취재한 저자가 그 결과를 구글의 역사와 함께 시간순으로 풀어 놓은 글이다. 때로는 창업자 때로는 직원, 때로는 경쟁기업과 자신의 말을 통하여 구글의 발자취와 현재의 위상, 그리고 미래상을 증언하고 있다. 그 시작은 미약하였고 기업이라면서 수입원조차 뚜렸하지 않았던 구글이 불과 10여년만에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한 원동력은 과연 무엇인가?
그 요소에는 남다른 아이디어와 이를 뒷받침할 기술, 얼마간의 행운과 경쟁기업의 실책, 직원의 열정을 일으키는 제도, 독특한 경영철학 등등으로 소개된 내용을 간추릴 수 있겠지만 사실 위의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꼭 구글처럼 되라는 법도 없기에 딱부러지게 성공의 정답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미래에 대해서 경쟁기업뿐만 아니라 구글조차도 아직은 확신을 못하고 있으니 그럴수 밖에 없지 않을까.  어쨌든 '사악하게 굴지 말라'는 돈에 연연하지 않는듯한 인상좋은 경영철학으로 역으로 엄청난 수익과 영향력을 확보하고 또 세상을 통채로 바꿀듯한 기세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면 두렵기도 하고 경영자의 마인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하는 것을 새삼 느낀다. 

  
책에서 소개하는 구글의 특징중 기억에 남는 2가지.
하나는 모든 일에 있어 항상 '왜?'라는 질문을 시작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업무시간의 20%(즉 5일근무중 하루)를 직원이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하는 제도이다.
'왜?'라고 하는 것은 오늘도 어제처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차별화되었는지 잘 설명해 주는 요소이며 20%의 자유시간은 그들의 아이디어가 왜 아이디어로 남지 않고 현실화되어 세계를 변화시켰는지 짐작케 해 준다. 

한국안에만 머물러 있다면 알 수 없는 사고의 다양성과 미래로 나있는 다양한 길들.. 세상은 참 넓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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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법정스님이 개고기 반대 소신을 펼치셨었다는 글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가에서 굳이 '개고기'를 특정하여 언급하신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것이라는 점과 '개고기 반대'파들의 주장 전개에 법정스님의 그 말씀이 비중있게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 나의 호기심을 발동한 것이다.

법정스님의 원문을 보고 나서는 어지간히 의문은 풀렸으나 감히 이의를 달고 싶은 부분이 있어 이 글을 쓴다. (공정하기 위해서는 법정스님이 그 글을 쓰시게 만든 문제의 원문(한겨레21에 실렸던 주강현의 '개고기 옹호'글)부터 확실히 이해하고 시작해야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링크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생략했다.)

먼저 이야기 하자면, 다른 고기도 많은데 왜 하필 '개고기'에 대해 언급하셨는지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렸다. 주강현씨의 '개고기 옹호' 글에 대한 반론차원이었기 때문이 첫번째 이유이고 불교의 교리에 따라 모든 동물에 대해 논의로 대상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말씀하실 이유도, 설득력도, 현실성도 없다고 생각하셨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며, 법정스님 본인이'개'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대감이 여타 가축들과는 다르다고 인식하셨기 때문이 세번째 이유이다.

글을 쓴 계기도 그렇고 원문의 내용도 그렇고 법정스님은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고 글을 쓰셨다기 보다는 철저하게 일반인의 눈높이에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하는 글을 쓰시고자 했던것 같다. 굳이 불교사상에 대한 인식을 떠올릴 필요없이 '인간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점이 이 글의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어버린게 아닌가 싶다. 특정종교에 갖힌 사고방식이라는 비난을 피할수 있었던 반면 그냥 일반인의 주장과 상당부분 동어반복이 되어버렸다는게 내 생각이다. 개는 인간과의 특별한 유대감을 갖는 동물로써 개를 먹는다는 것은 식인풍습과 비유될만큼 비문명적이라는 주장말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조금 심심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물론 글의 전체가 아닌 일부분에 대해서이다.)  

이와 다르게 '문화다원주의에 입각한 개고기옹호론'을 비판하신 부분은 좀 충격이 있었다. 그것도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뭐가 다르냐고 질타를 받았으니 충격이 더 컸다.   과연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것은 일종의 사기이자 거짓말이지 문화다원주의를 적용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아직 우리나라에 적용하기는 이르다'라는 말을 거짓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 '나 그냥 독재 할래.'라고 읽어야 한다. 그걸 문화다원주의가 무능과 나태를 가린 한 예라고  하신 말씀을 읽으니 서운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역설적으로 법정스님은 박정희가 어쨌거나 민주주의를 실천했다고 주장하신걸로 읽힐수도 있는 주장이다. 더불어 결국 최고의 진리 하나 만이 사람들에게 선택되어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스님을 잘몰라서 이런 생각이드는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문화상대(다원)주의를 애초에 인정하시지 않았던게 아닌가 싶고, 만약 그렇다면 더이상의 언급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생명존중사상에 입각한 논리전개 속에서 새로이 배운 바도 적지 않다. 동물애호정신이 불교의 정신적 영향력이 컷던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에 비춰볼때 서구만의 사상, 사대주의로 발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흘러내려오는 정서라고 봐야한다고 지적한 점이나 중국의 식인풍습이 상당히 보편적이었다는 사실등등 말이다.

사실 법정스님의 논지중 중요한 부분은 바로 생명존중 사상, 그리고 인간과 견공이 꾸준히 맺어온 상호 보완 및 타 동물들과 구분되는 유대관계에 대한 것이다.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동물이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 수록 마치 인류문명이 식인문화를 야만으로 취급하고 점차 퇴출시켜왔던 것처럼 개고기식문화도 퇴출되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개고기를 먹어봤던 사람으로서, 딱히 개고기만 먹지말자고 하기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법정스님의 '문명의 (자연스러운) 개고기 퇴출론'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편이다. 사실 개만이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각별히 유대감을 갖는 존재를 인간처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자연스러운 모습이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사회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회로 이동중이라고 생각한다. 

 나만해도 개고기를 태어나서 딱 3번 먹어보았는데 한번은 대학생때 아르바이트로 속칭 공사판 노가다 하면서 어울렸던 아저씨들과 한 번, 군대가기 전날 아버지와 단 둘이 한 번 그리고 군대 고참들 따라가서 한 번, 이렇게 3번인데 상황을 짐작해보면 알겠지만 굳이 거부하기 쉽지 않은 그런 자리에서 개고기를 경험한 것이 전부다.(가장 최근일도 10년이 훨씬 지났다) 내 또래중에 먼저 개고기를 먹자고 제안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즉 세대가 뒤로 갈수록 (우리 사회가 점점 먹고 살만해질수록) 법정스님의 예언(?)에 들어맞고 있는 중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 문화는 여건상 진즉에 그렇게 되어야 했겠으나 문화지체현상으로 인해 개고기문화도 남아있는 것은 아닐런지.

개고기 찬반논란도 이러한 문화지체현상속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시적(한 100년쯤?^^) 마찰음이 아닌가 싶다. 다만 개를 식육으로 사용하는 계층과 반려(애완)동물로 활용하는 계층과는 (개고기문제와 상관관계가 1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갈등요소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팻샵에서 벌어지는 돈잔치를 보노라면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도 마음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감정이 생기는 건 어쩔수 없다.) 난 아직 개고기반대를 외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돈벌이가 된다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도 불구덩이에 밀어 넣어버리는 이런 야만사회에서 문명이 가져올 순수한 '동물애호정신'을 외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한 동물애호가(그들 또한 적지 않은 수가 동물을 길거리에 내다버리곤 한다. 먹지는 않았으니 잘한건가?)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시장통에서 싸구려 보양탕으로 내일의 힘든 노동을 견뎌보려는 서민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은 아닌지...


원문이 짧지 않은 데다가 내 글이 점점 길어지다보니 초점도 흐려지고 일관성도 유지하기가 힘들것 같아 더 늘어놓기는 어렵겠다. 법정스님 글에 대한 촌평은 이쯤하고, 기회가 되었으니 개고기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조금 더 적어본다.  

나는 자질구레한 문제(도륙과정 ,유통,위생 등등)을 제외하면 개고기를 후진문명으로 재단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식인풍습조차도 문화에 따라 (죽은이의 사체를 먹음으로써 그의 영혼을 승계한다던가 하는 제의적인 모습등) 인정할 수 있을터인데 자신이 갖고 있는 개와의 유대감이라는 정성적인 기준을 복잡 다양한 문화에 일률적으로 적용할수 있다는 생각자체가 반문명적인 태도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구세대와 신세대의 이질적인 문화가 혼재하는 모습이 더 도드라지기에 더 조심스러워야한다고 본다.  어쨌거나 점점 한국의 개에 관한 문화는 똥개에서 애완견으로, 다시 반려동물로 인간관계에 가깝게 점진하고 있는만큼 자연스럽게 개고기 식문화는 사라질것이라고 예상한다.

사실 개고기 옹호론자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계속 개고기가 먹고 싶다"가 아니다. 개고기가 좋아서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을것이라고 생각한다.(적어도 나는 다시 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단지 "당신의 문화적 잣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특히 문화재 약탈자 프랑스 너희들 말이다.)  

 

ps.1 가끔 했던 상상인데 조선시대 선비를 모셔다가 지금의 서양의 생활상을 보여주면 "천하에 잡것들! 짐승같이 사는구나. 인간이 아니로고!"하며 불호령을 내리실것 같다. 일단 짧은 머리의 나부터 된통 혼나겠지만..)

ps2. 개를 잔인하게 도살하거나 식육과정에서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그런 행위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하며 법정스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리고 그게 '개'였는지와 상관없이 사라져야 할 요소들이다. 설마 주강현씨가 그런것도 옹호했을라고.... 법정스님의 글중 상당부분은 개고기를 반대하든 옹호하든 무관하게 공유하고 지켜야할 내용이 상당부분이다. 그게 '개'든 '소'든 '닭'이든 '양'이든 말이다. 

ps3.법정스님이 예로 드신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장면들.. 그건 우리가 먹는 달걀과 치킨, 소고기 생산과정에도 있다. 오히려 공장식 생산으로 전문가들에 의해 엄청난 양으로 자행되고 있기에 더 잘 가려져 있을뿐.  차라리 똥개들이 잠시나마 살아있는 동안 호강하는 편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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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세상 2010-03-16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새벽 6시 20분 저희집 강아지 녀석이 집나간지 16일만에 컴백했습니다. 거의 패닉상태로 찾아다니기를 수십일. 고관절이 아프고, 목이 쉴만큼 다녀도 흔적조차 보이질 않길래 교통사고가 났나, 개장수에게 잡혀갔나 아님 굶어 죽었나 (네.. 한번도 대문밖을 혼자 나가본 적 없었으니깐요..)별별 생각이 다 하면서 1132일(뭔 남친도 아닌데 같이 지낸 날짜 막 계산도 해보고..) 동안 못해준 일만 생각나더군요. 밥먹을 때마다 잠들기 전마다 녀석이 생각나 미칠 것 같았는데 아무렇치도 않게 멀쩡하게 돌아왔습니다. 옆집 아줌마가 대문 앞에 강아지왔다고 전화 안해줬음 몰랐을 그 시간. 새벽부터 엄마랑 부여잡고, 감동의 대하드라마를 찍었답니다. 삼십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것 같은 시원함.
개고기 먹는 것 반대하지는 않지만 제가 먹을 생각 없습니다. 비단 우리집 녀석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런 마음이 들더라구요. 원문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냥 우리집 똥강아지가 돌아와서 기쁜 날이라 몇자 적어봅니다. ^^

귀를기울이면 2010-03-16 18:27   좋아요 0 | URL
말씀을 읽다보니 약간은 생뚱맞은 어릴적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께서 살림에 보태실양으로 강아지 두마리를 데려다 키우셨드랬죠. 저만 보면 좋아서 날고 뛰고 반가워 하던 녀석들... 어느날 학교다녀와보니 사라져 있더라는.. 어려서 그랬는지 소심해서 그랬는지 그냥 먼산만 바라보다 말았던 그때 그 심정이 김서린 거울 뒤편 내모습처럼 떠오르는듯 합니다. 16일만이면 정말 드라마가 따로 없군요
 

어렸을적 외국에서 활약하던 어떤 선수가(아마도 차범근?) 골을 넣고 골 세리머니로 무릎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명을 받았던 적이 있다. '아! 저 훌륭한 선수도 나와 같은 교인이구나. 저런 순간에도 신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 즉 동일한 종교를 갖고 있다는 동질감과 흥분되는 순간에서도 해야할 일을 잊지 않는 저 성실함에 존경심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지금 더 자주보게되는 세리머니는 수상소감 세리머니(?)다. 무슨무슨 영화제나 OO선발대회나 XX대상 같은 TV로 중계되는 시상식을 보면 "우선 하나(느)님께 감사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공인(公人X 共人O)이어서 더 쉬울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어려울 수도 있는데 아무튼 대중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더군다나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불리며 비판이 드높은 시대에) 구태여 드러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은 세리머니가 그저 아름답게만 비춰지지 않고 비판에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러한 세리머니가 벌어지는 시공간이 대부분 제로섬게임의 성격을 가진 행사라는데 그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상을 먹으면 상대는 반드시 물을 먹고 내가 골을 넣으면 반드시 상대는 골을 먹게되어 있다. 이건 신도 바꾸지 못하는 불변의 법칙이다. 즉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내가 신의 축복으로 골을 넣거나 상을 받은 것이라면 상대방은 신의 저주 또는 좋게봐줘도 신의 무관심에 빠지게 된 셈인 것이다. 그나마 상대방이 다른 종교를 가졌거나 무신론자라면 궤변이 될지언정 변명이라도 가능한데 만약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조차 불가하다.  신은 불공평하거나 편협하거나 또는 축구나 영화에는 무관심하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감사의 세리머니가 뻘짓이 되버리는 패러독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다른 종교를 믿거나 무신론자라면 문제가 없을까? 이건 '엄마아빠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공식적으로 엄마아빠는 승부에 영향을 줄수 없으니까. 굳이 신에 대한 감사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혼자서 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신이 도와 주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은데 신이 운을 가장하여 승부조작이나 하는 파렴치한 존재냐는 말장난은 둘째치고라도 공공장소에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은 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상대방에 대한 무례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종교가 있든 없든 같은 종교이든 다른 종교이든 무관하게 패배자로써의 쓴 맛을 보고 있는 시점에 신에 대한 감사라니 오해(?)하기 딱 좋지 않은가. 자신의 종교에 대한 대중의 오해까지 키우면서 말이다.  사실 화려하고 큰 돈이 좌우되는 일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관심있어 하실만큼 중요한 일은 아닌것 같은데 좀 오버 아닌가?
 
(약간 다른 이야기인데 비슷한 이유로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 같은 것은 아주아주 못마땅하다. 이건 합격후의 감사기도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의도가 불순하다. 이건 기쁨에 저절로 우러나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불합격은 나의 합격, 나의 불합격은 남의 합격인게 빤히 보이는데도 자기 자식은 무조건 합격시켜 달라는 떼쓰기는 정말... 절대자로 믿던 신을 그냥 흔한 굿판의 귀신 하나로 전락(?)시키는 쓴웃음나는 자학개그다.)
 
물론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또다른 이유도 있기는 하다. 축구의 득점이나 1등 수상은 큰 기쁨이고 인간이라면 누군가와 기쁨을 나누고 자랑하고 감사하고 싶은 생각,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때문에 수상한게 아니더라도 인생에서 이런 기쁜 감동을 느끼게 해 준 것에 대해 자신이 믿는 신에게 감사할수도 있는 것이다. 다 나 잘나서 이렇게 된거라고 목 뻗뻗이 세우는 인간을 오히려 우리는 모자란 인간, 아직 덜 자란 인간으로 보지 않는가! 하지만 그건 일종의 습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순수한 기쁨에 대한 표현이라면 인간의 다른 욕구가 충족될때에도 그러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들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식욕과 성욕과 배설의 욕구가 충족될때마다 감사 기도를 하시는지...  유독 밥이 앞에 있을 때랑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될때만 그러는 것 같다. 뭐, 상먹는 일은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라서 기쁨이 더 크기는 하겠지만...) 
   


한때 열심히 살았을때 음악이나 영화나 책을 읽으며, 연애를 하며 기쁨을 느끼는 것이 혹 의의로운 삶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기도가 중요하고 신앙에 절대가치가 있다면 음악 들을 시간에 기도하고 봉사활동이라도 해야 옳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한동안 그런 고민을 하다가 나대로 살기위해 나를 위한 변명같은 결론을 찾았는데 그 결론은 이렇다.
음악이란 소리의 높낮이 변화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고 그러한 인간의 감성은 인간이 만든게 아니라 신이 허락해준 선물이다. 연애감정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음악을 듣던 연애를 하던 그것대로 열심히 하고 순수하게 기쁨에 빠지는 것 그 차체로 하나님의 선물을 만끽하는 것이며 그로인한 기회비용에 대해 의무감이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음악들으면서 음악에 빠지면 되지 '아 이걸 제공한 존재에게 감사해야 하는데...' 하며 몰입하지 못하는 건 신의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거라고 말이다. 
   


내 결론은 이거다.
즐겨라. 이기면 그냥 기뻐하고 지면 그냥 짜증내고.  100년도 제대로 못사는 인간들이 잠깐 재밌자고 만든 장난인데 뭣하러 지들 놀이판에 신까지 끌어들이나.  그냥 즐겨라. 기도할 제목은 당신의 건강이지 골득점이 아니며 예술이 주는 감동이지 수상소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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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3-11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많이 배우고 느꼈습니다. 결론, 저도 공감합니다.^^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 현대의 지성 111
카를로 진즈부르그 지음, 김정하.유제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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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평을 믿고 구매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제 2/3 정도 읽은듯 한데 그만 보려고 합니다.
다 읽지 않고 그만두는 이유는
 
첫째, 평이한 대중서적보다는 수준이 높다라는 점. 역사관련 책을 좋아해서 자주 보는 편인데 이 책의 서평이나 인지도를 보아하니 다른 대중서와 비슷하리라 생각하고 구매했으나 실제로 원활히 읽기 위해 독자에게 필요한 기반지식이 적지 않아보입니다. 용어, 사전배경 등등...  서문의 분위기나 문체, 불친절(?)한 용어사용등을 볼때 읽기 편한 대중서라기보다는  준전문가를 대상으로 발표한 서적처럼 느껴집니다.  참고로 주경철교수의 [대항해시대] 난이도를 100으로 본다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는 70, KBS의 한국사전 60,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사 80 정도라고 주관적인 평가를 하고 싶은데요 바로 이 책 [치즈와 구더기]는 120정도 주고 싶습니다.
 
둘째, 번역의 질 문제입니다. 이렇게 널리 알려진 책이 이정도라니.. 솔직히 의외입니다. '번역의 탄생'을 읽고난 후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번역 문제는 정말 할 말이 많네요. 다만 조목조목 원문을 찾아서 나열하자니 시간이 없기도 하고 아깝기도해서 오류사항의 유형만 기억나는 대로 적습니다.
우선 지시대명사의 오류 가 눈에 띕니다. 예를 들면 "이들(심판관)의 지적때문에 저들(농민들)은 돌아설수 밖에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고 칩시다.  여기서 '저들'을 '이들'로 잘못 번역해 놓으면 아주 이상한 문장이 됩니다. '이들'만 두번이 나오니까요.  이건 원문을 확인하지 않아도 전후 문맥으로 알아챌 수 있는 오류입니다.  또, 원문의 수동태 문장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서 어거지로 읽히는 부분도 많습니다.  지금 우리말이 많이 그런데 익숙해져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정도가 심하다고 느꼈습니다. 직독직해하다보니 마무리하는 동사가 어거지스러워진다는 느낌. '나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와 '이 책은 나에게 재미있게 읽혔다'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하나 더, 문장들이 내용이 서로 연관성없는데 나란히 연결되는 경우도 자주 보입니다. 사실은 연관성이 있는 문장인데 번역이 매끄럽지 않아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요. 해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읽으면서 마치 부모님이 돋보기안경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듯이 꼼꼼히 봐야 문맥이 이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번역을 좀 성의있게 했으면 훨씬 많은 독자들이 좀 편하게 봤을텐데 참 아쉽습니다.
 
 
거시사,미시사, 고대사,현대사 다 좋아하고 종종 읽습니다만  이건 좀 아니다 싶네요.  물론 주관적인 느낌일뿐이고
저의 경우에는 잡식성의 아주 일반적 지식수준의 독자이기때문에 다른 분들에게는 다르게 다가올수
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일단 책을 사기전에 책에 있는 저자 서문 두가지중  한국어판서문 말고 이탈리아판 서문 정도는 꼼꼼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서문은 본문보다는 이해하기는 쉽기도 하구요 거기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한 흥미나 재미를 느끼신다면 사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책 전체적으로 문장이 좀 서걱서걱 읽히는 건 새번역이 나오지 않는 한 어쩔수 없으니...)
 

  

ps. 지금보니 역자가 두명이군요. 어쩐지... 전반부는 읽기 힘들었는데 후반부로 가면 왠지 모르게 수월해지더라니.. 다른 사람의 번역이라 그런가 봅니다.(그러니까 뒤로 가면 번역은 상대적으로 나아진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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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동물 내셔널 지오그래픽 자연대탐험 1
제니퍼 C. 우르쿠하르트 지음, 바바라 깁슨 그림, 김연수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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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놀이가 잘 결합된 책입니다. 너무 실감나서 뱀같은건 아이가 무서워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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