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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ㅣ 온우주 단편선 1
곽재식 지음 / 온우주 / 2013년 5월
평점 :
품절
1. 사람과 사람이 만나 연애할 때 개인적으로 가장 달달한 시기를 꼽자면, "오늘부터 우리 사귀는 거야."라고 말하기 전, 서로의 마음을 분명하게 확인하기 전이라고 생각한다. 친구라고 하기엔 더 가깝고, "둘이 사귀어?" "에이, 우린 그런 사이 아니에요."라고 답하는. 그래도 보고 싶고 함께 있으면 좋고 편하고. 가끔 '혹시 얘가 날 좋아하나?' 생각하지만 '설마, 아니겠지. 그럴리가.'하는 사이. 하지만 이 사람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그러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는... 그런 애매한 관계가 조금씩 조금씩 사랑에 물들어가는 시기.
곽재식 작가는 그런 달달한 시기를 정말 잘 그려낸다. 특히 공돌이의 사랑을. 남녀 관계만이 아니라 부모 자식간의 관계도 그렇다. 어머니를, 딸을 사랑하는구나.. 깨달음이 오는 명료한 순간. 하지만 고백해서 관계를 만들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용기를 갖춘 사람들의 이야기.
2. 5편의 중단편이 실려있다. 굳이 장르를 묶자면 판타지다. 그건 몇몇 설정들 때문이지 허무맹랑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겪었을 수도 있고. 재미있다. 재치있어서 웃음이 터지고, 발랄해서 유쾌하다. 디테일 깨알 같아서 감탄이 나오고. 잔잔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인데다 술술 쉽게 읽힌다. 이렇게 온갖 미덕을 갖춘 소설인데 왜 이제야 알게 됐을까. 왜 더 뜨질 못하나. PC통신 시절부터 인터넷을 해온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글은 쉽게 보여서 그럴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유명한 듯한데 아직 대중적인 인기는 아닌가보다. 세 번째 단편까지 보고 너무 마음에 들어 곽재식 작가 팬질을 시작했고 다른 작품들도 독서 대기열에 올려뒀다. 비슷한 시기를 살아서 공감이 가고 (근데 나보다 어리다니 ㅠㅠ) 내가 좋아하는 공대 감성이 물씬 풍겨서 좋다.
3. 남들이 최고라고 꼽는, 책제목과 똑같은 단편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가 마지막에 나오는데 넘 기대를 해서일까 기대에는 조금 못 미쳤다. 이야기를 끌어가기 위한 몇몇 설정이 작위적이어서 약간 거슬리기도 했고. 하지만 아이슬란드의 화산이 폭발해서 유럽 비행기들 발이 묶였듯이, 결혼을 2주 앞두고 미국에 출장온 예비 신랑이 백두산이 분화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자, 준비 과정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사랑은 언제나 옳다.
4. 내가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최악의 레이싱'이다. 난 자덕이니까. ㅎㅎㅎ 나도 자전거를 늦게 배운 사람이다. 어렸을 때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까지 타다가 결국 그 보조 바퀴를 떼고 타는 법은 못 배운 채 자전거에서 멀어졌다. 도시에서 살았으니 탈 공간도 없었고 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어디 놀러가서 자전거를 대여해 타본 적은 있었지만 그때마다 무릎에 상처를 하나씩 남겼었다. 내겐 왜 타는지 모르겠는 불편한 교통수단일 뿐이었다.
해외에 나와 살면서, 자전거 타기 좋은 환경이 되었지만, 여전히 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몇 번 기회가 있어 타봤지만 타고 싶었다기 보다 남들이 탈 때 나만 혼자 남을 수는 없어서 몇 번 탔다. 내 몸에 맞지 않아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는 공포감에 부들부들 떨며 탔고 언제나 마지막은 사고로 - 무릎, 손바닥이 까지거나 끌바해야 하는 수모로 끝났다.
그러다.. 계기가 기억이 안 난다. 저렴한 대여 프로그램을 봐서였을까, 관심이 있었기에 눈에 띈 걸까. 미니벨로를 알게 됐고 시에서 저렴하게 대여해주는 걸 알게 됐다. 한 달이면 만원 남짓, 세 달이면 2만원 정도에 미니벨로를 대여해준대서 시험삼아 빌려왔다. 안장 높이 조절이 가능하니 안정감이 느껴지는 높이로 맞추고 동네 공터에서 배웠다. 그렇게 맛을 들이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예전에는 안 보이던 자전거 도로도 눈에 들어오고 귀찮은 존재였던 라이더들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경험이...
그래서 이 단편이 더 좋았다.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한참이 더 지나 처음으로 배운 자전거 타기가 떠올라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모여 쓸데없는 일에 열정을 불살라가며 뭔가를 하던 대학 시절도 떠올랐다.
5. 이 책을 가장 좋아할 만한 독자는 공대생 또는 석사나 박사 과정을 해본 공대 출신 연구원들.. 이라고 생각하지만, 설렘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거다. 그냥 읽어보세요. 감성이 말랑말랑해집니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