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 - 미래의 역사> 는 전작 <사피엔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사피엔스> 흥미로웠다면, <호모데우스>는 섬뜩했다고나 할까.

읽는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무서운 예감이 마침내 실현되리라는 불길함 말이다.

작가는 자신의 책이 예언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오래 생각하고 바꾸어나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의 예측에는 사피엔스가 지금 흘러가는 이 기류를 바꾸기 힘든 까닭도 포함하고 있다.

 

영화<말할 수 없는 비밀>은 아직 못봤다.

아직 영화를 보기 힘들다.

지난주는 이상하게도 눈물이 시도때도 없이 터져나왔다. 근무중에도 사람들 없는 서가를 쓸고다니며 눈물을 훔쳐야했다.

그 동안 잘 참아오던게 더 희안할 뿐이다.

게다가

어쩌자고 이번주에는 나처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많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파리대왕>을 읽고있다.

<파리대왕>쯤은 고등학교때 다 읽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 문득 떠올랐다.

엄마의 서가에 꽂혀져 있던 낡은 <파리대왕>.

지금은 골동품 수준이 되었지만,

엄마가 재밌다고 읽어보라고 권해줬을 때는 - 그야말로 고등학생때인데- 그냥 오래된 책, 엄마가 젊었을때 읽던 책이었다.

생각해 보니 엄마의 서가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다.

 

무엇을 하던지 엄마가 그리운 하루하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 혹은 그림자>를 다 읽고 <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를 읽고 있다. <사피엔스>도 좋았는데. 이 책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문맥상? - <사피엔스>가 더 신선했고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련다. 아주아주 한참 전에 동생이 권해준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말해준 영화이기도 하다.

12세 이상이라 아이들과 함께 봐도 좋을 것 같다.

 

 뭐 특별한 일은 없다. 이번주는 외삼촌들을 만난다. 가끔은 엄마 잃은 나보다 여동생을 잃은 외삼촌이, 게다가 작년에는 엄마도 잃었던 외삼촌이 더 위태위태해 보일 때가 있다.  그래도 삼촌들은 10년에서 길어도 30년 후에 엄마와 여동생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운이 좋으면 4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 지루하겠지만 그래도 운이 좋기를 빈다. 그래서 그 시간이 오면, 정말 나는 엄마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호모 데우스>를 읽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도, 5분도 채 안되어 사후 세계를 꿈꾸다니.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중에도, 인간은 우둔해 깨닫지 못하는 존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대에 와서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들은 파라오의 몰락과 신의 죽음을 모두 긍정적인 변화로 생각한다. 어쩌면 인본주의의 붕괴도 결국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 본래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위대한 상수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다. (p.103)

진화론이 영혼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영혼‘이 분리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그런 실체는 단계적 진화를 통해 생긱 수 있다. 자연 선택을 통해 인간의 눈이 만들어진 것은 눈이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 만일 사피엔스의 영혼이 에렉투스의 영혼에서 단계작으로 진화했다면 그 단계들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사피엔스 영혼의 어느 부분이 에렉투스보다 더 발달했을까? 하지만 영혼에는 부분이 없다.(p.151)

인간의 영혼은 진화하지 않았고 어느 화창한 날 영광스러운 완전체로 출현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화창한 날은 정확히 언제인가? (...) 영혼을 지닌 최초의 아기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그 아기는 어머니 아버지와 매우 비슷했다. 아기는 영혼이 있고 부모는 없다는 것만 달랐다. 각막이 부모의 각막보다 조금 더 구부러져 있는 아기가 태어나는 이유는 생물학 지식으로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마 어떤 유전자에 일어난 작은 돌연변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혼의 ‘영‘자도 없는 부모에게서 불멸의 영혼을 지닌 아기가 탄생하는 이유는 생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하나의 돌연변이 또는 여러개의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해서 한 동물에게 죽음을 포함한 모든 변화에도 끄떡없는 본질이 생겨날 수 있을까? (p.151~152)

마지막으로, 어떤 과학자들은 의식이 실재하고, 실제로 큰 도덕적,정치적 가치를 지닌다고 인정하는 한편 의식이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의식은 뇌의 특정한 작용에 의해 생산되는, 생물학적으로는 쓸모없는 부산물이다. (...) 의식은 복잡한 신경망이 발화할 때 생기는 마음의 오염물질인지도 모른다. 의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수억년 동안 수백억 생물들이 겪은 그 모든 고통과 쾌락은 단지 마음의 오염물질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생각해볼 가치가 잇는 가설임은 분명하다 아무튼 오늘날 현대 과학이 제시할 수 있는 의식에 관한 이론이 겨우 이 정도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p.167)

21세기 초, 진보의 열차가 다시 정거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열차는 아마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정거장을 떠나는 막차가 될 것이다. 이 기차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다시 기회가 없을 것이다. 좌석을 얻기 위해 당신은 21세기의 기술을 이해해야 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생명공학과 컴퓨터 알고리즘의 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주력상품은 몸, 뇌, 마음이 될 것이고, 몸과 뇌를 설계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의 결차는 디킨스의 영국과 마디의 수단 사이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클것이다. 실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간의 격차보다 클 것이다. 21세기 진보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창조와 파괴를 주관하는 신성을 획득하는 반면, 뒤처진 사람들은 절멸에 직면할 것이다.(p.378)

5만년 전 우리는 이 행성을 네안데르탈인 사촌들과 공유했다. 그들은 우주선을 쏘거나 피라미드를 짓거나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백히 우리와는 매우 다른 마음의 능력들을 지녔고, 우리가 지닌 재능들 가운데 많은 것을 갖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 사피엔스보다 뇌 용량이 컸다. 그들은 그 모든 뉴런들로 정확히 무엇을 했을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수 없는 일이다. 아마 그들은 어떤 사피엔스도 경험하지 못한 많은 마음 상태들을 지녔을 것이다.(p.488)

예를 들어 원시인들은 후각을 광범위하게 사용했을 것이다. 수렵채집인들은 다양한 동물 종과 다양한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다양한 감정들의 차이까지 멀리서 후각을 통해 감지할 수 있다. 예컨대 두려움의 냄새와 용기의 냄새는 다르다. 한 남자가 두려워할 떄, 그는 용기로 충만할 때와는 다른 화학물질들을 분비한다. 만일 당신이 이웃 무리와 전쟁을 할지 말지 논쟁하고 있는 원시인 무리 사이에 앉아 있다면, 말 그대로 여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p.493~4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를 보내고 3주가 지났다.

 비통함 보다는 우울함이 지배적인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아이들이 겨울방학 숙제로 연을 만들어 날렸다.

 미숙한 솜씨로 만들어 균형잃은 가오리 연은

 높이 오르지도 못한 채 제자리만 뱅글뱅글 돌 뿐이다.

 그 가오리 연을 보면서

 엄마 없는 나 같다고 생각했다.

 방향도 없이 제자리만 뱅뱅 돌며 퍼득 거리고 있다.

 

 엄마는 가면서 나에게 엄청난 것들을 남겼다.

 하나 하나 풀어볼 때마다

 엄마가 느껴지지만.

 차마 아직 풀지 못한 것들도 많다.

 천천히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아껴두고 풀어낼 거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돌아갈 일상이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엄마 잃은 아이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리고 어쩌면 서서히 엄마를 잊어가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지독히 우울한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삶이라는데.

 

 

 

 

 이번 주 읽을 책. <빛 혹은 그림자>

 예전에 사 놓고 첫번째 이야기만 읽고 그만 두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단편 소설들을 엮어 놓았다.

 생각 보다는 재미가 없다. 근데 왜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돈 내고 사서 아까워서 그런가보다.

 요즘은 그런 일들이 많다. 명료하지 않은 일들. 나 답지 않은 일들.

 엄마 없는 나는 어쩌면 엄마가 있었던 나와 조금은 달라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달라진 나에 익숙해져야 한다. 앞으로는 쭉 엄마가 없을테니까.

 

 이 책은 오늘 내일이면 다 읽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주는 여기까지만 하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