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대학 졸업식 날 선물로 받아 읽고 언젠가는 다시 읽으리라 여기며 늘 눈에 띄는 곳에 꽂아두었던 것 중의 하나이다.
25년 후 11월, 어둠이 고즈넉한 명상을 즐길 수 있도록 넉넉할 때 이성적이며, 단정하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한 독일인이 생각났다.
쓸쓸함 중에 신성한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
저자가 한 친구의 퇴색된 회고록을 서랍에서 발견해 세상에 발표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싸늘한 밤기운 속에서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별을 보던 유아기부터, 지성적이며 다정한 부모 곁에서 반듯하게 성장해가는 소년기, 늘 병석에 누워있던 고향 집 근처의 후작의 성안에 살던 백작 마리아를 만나 시작되는 조심스런 사랑. 마리아와 함께하는 신에 대해, 인간적 고뇌에 대한 순수하고 진지한 대화의 소중한 시기. 깨져가는 맑은 영혼을 지켜보아야 했던 가슴, 밑바닥을 적시는 고통. 고통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고결한 성실함으로 삶을 살아가던 중년기까지를 8번의 회상으로 나누어 기록했다.
조용한 일요일 홀로 숲속에 앉아 있노라면 가슴 깊숙이 매몰되었던 상념이 신비한 사랑을 지닌 존재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느끼고 끝없고 영원한 사랑 앞에 숙연해지던 한 지성인이 그리워지리라 예감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이 50에 이르러 다시 접하고 보니, 서랍 깊숙이 간직하는 책갈피 속의 장미꽃잎 같은 성스런 유물(?) 하나쯤 갖고 싶다는 욕구가 인다. 청아한 향기는 없으나 눈물과 미소를 한없이 품고 있는 내 비밀스런 삶 자체 같은 것......
마리아의 어머니를 사랑했던 가난한 청년은 애인을 후작에게 양보함으로써 잃은 사랑을 세상 속에 베푸는 의사가 되어, 끝까지 마리아의 임종을 지켜보는 그 깊은 침묵의 노인이 젊은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을 선물한 내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 주었던 상지회(혜화동 성당)의 요한 선배는 내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그분은 나를 일찍이 잊었으리라. 나는 이렇게 ‘여백의 메모’를 보면서 그분을 기억하는데, 모든 것을 웃음으로 얼버무리던 여윈 얼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