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거지 (진이정)
내겐 추억 없다
찰나찰나 연소할 뿐
하얀 절망의 재도 한땐 창창한 나의 추억이었으리라
지금의 추억에 살고 지금의 추억에 사라진다
지금에게 추억의 주소를 묻는 시골영감의 순진함
추억으로 가는 지하철은 음탕하다
서로 비벼대며 참을성 있게 추억한다
가지 않는 자여 추억의 고자여
추억의 재가 날리는 아침
크게 심호흡하라
난 추억 실조에 걸려 있으므로
내 옛연인만은 추억이 아니리라
기억의 사다리 타고
일천구백육십사년의 지붕으로 올라간다
아직 내 연인은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빨간 마후라를 목에 두른다
죽으러 가는 백마부대 용사들이
하얀 말 대신 트럭 타고 간다
눈물 대신 노래 부르며 간다
나는 그 가사들을 전부 기억한다
용사들의 겁에 질린 고함마저 용케 기억한다
나는 기억한다 그러므로 악몽이다
다행이다 내 연인은 태어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해머 대신 싯누런
크래용의 햇님이 고향을 북북 문대고 있다
어느새 추억은 해바라기처럼 치근덕댄다
추억의 까아만 씨앗들로 주전부리하다보면
나도 몰래 또 어른이 되어 있다
추억 다오
나는 추억 거지
나는 추억 부랑자
내 앞의 줄이 끝이 없구나
추억 되지 않으려 필사적인 최신유행들,
쉼 없는 첨단이며 전위여
촌스럽게 기다리련다
추억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