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한 악기 (허수경)
불광동 시외버스 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 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켜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 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 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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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하도 못 읽어서 시를 읽으면 그냥 하고 싶은 말이 콸콸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아무 말도 없이 시만 올리면 무책임한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으려고 했더니 아예 시를 못 올리게 될 지경이라 그냥 시만이라도 올린다.
딱히 내가 감성이 메말라서라기보다 (그것도 사실이지만 ^^;;) 좋은 시는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다. 상처 덧내듯이 사람을 얼얼하고 쓰라리게 만드는 것. (나도 참 변명도 가지가지 한다 ^^)
허수경의 시들은 특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