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얼어 죽을 때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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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올리려고 어제 기껏 다 쳐놓고 날렸다. 그렇지만 다시 하나하나 친다. 좋은 시는 아무리 읽어도 충분치 않은 것, 평생을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시어를 쳐넣을 때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팔뚝으로 가슴으로 찬 계곡물처럼 쏟아져들어오는 전율은 온통 나의 것이 된다.

오늘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왜 이 시는 나를 그토록 혹하게 하는지. 이 시는 나를 즐겁게 하지 않는다. 읽을 때마다 맘이 저리고 속된 말로 찔리고 갑자기 발도 저리는 것 같고. 급기야 언제 추운 겨울날 나도 귤값을 깍은 적이 있나 싶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기까지 한다.

부정적 연상을 단 하나도 갖지 않는 대상이 내 마음 속에 있다면 그것은 귤이 아닐까. 찬 겨울밤 퇴근길에 사람들이 사들고 들어가는 달고 시원하던 귤 한봉지. 귤은 아늑함이며 저렴한 위안, 노곤함을 달래주는 달콤함이다. 내게 이 시의 매혹은 귤이다. 그런 귤을 들먹이며 시인이 인간을 고발할 때 그래서 나는 숨이 막힌다. 너 자신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아느냐고, 시인은 인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또 하나, 이 시의 신비는 어조에 있다.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 시의 어조를 정확히 뭐라 규정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고? 위협? 명령? 그러나 세상에 어느 누가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거나 '기다림을 주겠다' 따위의 말에 경고받고 위협당하겠는가? 마지막 몇 시행에는 약해빠진 마음의 시인의 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인은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고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시의 어조는 사태를 평범하게 서술하는 평서문의 어조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러이러하다,고 실제로 그러한 상황을 서술하는 것 뿐이다. 시인이 도끼를 지고 사람들 머리를 뽀개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시는 때로 도끼보다도 막강한 힘을 지니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나 절절한 목청인가. '겨울밤 추운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 귤값을 깎으며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라고 그가 거의 냉정하기까지 한 어조로 담담히 이야기할 때. 떨지 않는 심장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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