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지옥--서시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새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한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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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처럼 빈번히 시의 소재가 되는 것이 또 있을까. 심지어는 이 시의 작자 유하 자신도 사랑이란 말이 제목에 들어가는 시를 대여섯편은 더 썼다. (사랑하는 사람을 잡으려고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썼다는 시인이니까 놀라울 일도 아닌지 모르지만.)

해서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것이 사랑시지만 내게 사랑시라면 역시 '사랑의 지옥'이라는 멋지구리한 제목을 가진 이 시가 빠질 수 없다. '사랑'과 '지옥'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 시.  다소 괴기한 상상력이라 할지 모르나,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지옥으로 또 천당으로 바꾸어놓을 수 았는 감정은 세상에 사랑 뿐이다.  그렇게 끔직스럽게 광대한 진폭으로 움직이는 마음이 지옥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 지옥이랴.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는 주인이 버려둔 공터가 있었다. 그 공터에 동네 사람들이 이런 것 저런 것들을 가져다 심었다. 누군가가 호박씨를 뿌렸는지 호박덩굴이 자리를 잡고 봄이면 흐벅지게 노오랗고 커다란 호박꽃들이 피었다. 어려서 그랬는지 내 눈에 그 호박꽃들은 무지하게 거대해 보였고 그 노오랗기만 한 꽃 때깔은 단순히 예쁘다 어떻다, 하기가 무렴하게 희한한 교태와 위엄을 동시에 가진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의 지옥"이라는 제목에다가 호박꽃과 벌을 등장시킨 이 시가 그렇게 딱 맞춤인 양 들렸는지 모른다. 꿀의 주막이다가도 환멸의 지옥이 되는 사랑. 그래서 실은 황홀하면서도 캄캄한 감옥에 다름아닌 사랑.

요새는 영화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졌고 그 전엔 압구정동 연작으로 유명했지만, 이 시인의 시골스럽고 서정적인 시들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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