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전에 사모은 시집들을 들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기분이 심란할 때마다 구내 서점에서 사모은 것들이다.  친구들은 무슨 시집 따위를 그렇게 줄기차게 읽어대느냐고 물었지만, 사실 정말로 열심히 읽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번에 여러권씩 무슨 과일 떨이 사듯 사댄 속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때도 사놓고 대충 보는양 마는양 하고 재미없다며 한쪽으로 치워놓았던 이승하의 1993년 시집.  '환자들'이란 시를 발견하고  모처럼 펼쳤더니 그 새 누렇게 바랜 책이 아예 쩍하고 갈라졌다. 제본에 쓰는 풀이 딱딱하게 굳어서 정가운데로 쪼개졌다. 첫연의 총무는 도서관 총무일까? 독서실에 다니던 시절 고시공부나 공무원시험 공부를 하며 독서실을 관리하던 총무를 별다른 이유 없이 똥쭐 빠지게 패주고 싶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다같이 한심한 처지인데 단지 총무는 나보다 많은 버젓한 어른이라는 사실이 불러일으킨 그 심란함이 아주 처치곤란이었다.




환자들 / 이승하

탈출한 적이 있었지
영 형편없는 총무 녀석을 패준 뒤
병원의 쇠창살을 끊고 달려나간 거리
낚시꾼의 손에서 운좋게 놓여난 물고기처럼
집단에서 풀려나 개인이 되었을 때
난 자유를 만끽했었다

집단은 무섭지
내가 집단의 일원이 되면
아무 죄의식 없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고
아무 비판의식 없이 누군가를 숭배할 수 있지
환자들과 더불어
환자가 되는 슬픔 혹은 기쁨

저 정치인은 왜 저렇게 몰상식한가
저 공무원은 왜 저렇게 불친절한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를 들을 때마다
신문을 읽을 때마다 몇 번씩
당신 미쳤냐고 당신들 미치지 않았냐고
외치고 싶지만 ...... 참는다

참는 동안 난 미쳐가지

내가 미쳤음을 왜들 모르지?
당신들도 제정신이 아님을 왜들 모르지?
격리 수용되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당신일 수 있어
형사가 한 순간에 범인이 되고
법정이 한 순간에 병동이 되니

혼자일 때 난 의사야
스스로 진찰하고 스스로 처방하고
때로는 스스로의 팔에 히로뽕을 놓기도 하지
출근길에 승객의 일원이 되면
출근하여 조직의 일원이 되면
난 타인의 눈알을 갖지

타인의 눈알로 세상을 본다
퉅치를 보거나 눈살을 찌푸리거나
눈시울을 붉히는 나의 눈속임
피를 플리며
나 자신을 수술할 줄 모르는
철면피의 눈알, 환자의 눈알을



--<폭력과 광기의 나날>  (세계사)  pp.101-10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1-2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24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