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내 앞으로 걸어가는 아주 몸매가 날씬한 청년을 보았다. 곱상하게 머리를 빗고 유행에 딱 맞는 차림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소위 man bag이라고 불리우는 남성용 핸드백을 맨 것이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이다. 일본에 가면 대다수의 남성들이 유행에 그렇게 민감하고 패셔너블하다던데 하긴 미래의 남성들은 점점더 그렇게 여성화되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체노동직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서 일과를 시작하고 끝내기 일쑤이니까. 
 
Joe Haldeman의 1974년도 공상과학 소설 The Forever War는 그런 미래를 보여준다. 이성애가 법으로 금지되고 모든 인간이 최적의 유전작 결합이라는 규칙에 따라 시험관 수정으로 생산되는 미래. 그로부터 더 나아간 미래를 구성하는 인간들은 모두 최적의 유전자 구성에 바탕을 둔 몇몇 소수의 복제형, 즉 클론으로 상상된다.

책의 뒷면에는 the Forever War는 액션으로 가득찬 박진감 넘치는 공상과학의 고전이라고 쓰여 있다. 기대를 잔뜩 하고 집어들었건만 소설의 주인공이 전혀 미래스럽지도 공상과학스럽지도 않은 75년생! 소설이 시작되는 연대는 보통 소설에서도 회고의 대상이 되는 1990년대! 하지만 소설은 3143 년도까지 커버하므로 때이른 절망은 금물이다.

주인공 윌리암 만델라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학교 선생이나 해서 먹고살 생각을 하고 있던 이십대의 청년인데 갑자기 터진 지구 대 타우론이라는 미스테리한 외계종과의 싸움에 그만 군바리로 징집되고 만다. 지구의 열혈장성들은 파워풀한 타우론과의 싸움에 대비해서 지상군을 위한 나름대로 정교한 수트도 만들어내고 하지만 아무래도 전쟁의 성격이 우주전쟁이다보니 지상군의 가장 큰 목표는 진지를 건설하는 일이다. 따라서 보병으로 징집된 만델라의 훈련은 주로 중력, 온도, 지질 등의 모든 조건이 매우 괴상한 외계 행성에서 거추장스럽기 그지 없는 수트를 입고 엉금엉금 움직이며 혹시라도 수트에 구멍이나도 날까봐 절절매며 타우론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자재를 옮기고 날라 진지를 짓는 것에 집중된다. 물리학도 좋았지만 토목공학을 공부했더라면 더 좋았을 불쌍한 만델라. 게다가 우주를 떠돌며 국방의 의무를 지키는 동안 지구의 시간은 훌쩍훌쩍 흘러 의무를 마치고 귀대할 즈음엔 지구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신세가 된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시간이 훌쩍훌쩍 흐르는 동안 월급에 이자라도 붙어서 부자가 되어 나머지 여생을 윤택하게 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인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외계의 적 타우론이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알려져 있다는 사실. 갖가지 살상법을 공부하지만 과연 타우론에게 인간 중심의 해부학이 적용될지조차 알 수 없다. 지구의 장성들은 별 고민 없이 모든 보병들에게 미리 살인마의 정신상태를 유도하는 최면을 걸어두었다가 전투 직전에 그 최면을 이용한다. 무시무시한 괴물--타우론으로 생각되는--들이 무고한 여인들과 아이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환영에 가득찬 보병들은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말로만 듣던 저 미스테리한 타우론들과 싸우러 나가는데. 과학기술이 인류보다 열배는 앞서 있다는 타우론들은 정작 도살장의 소마냥 반항도 못 고 최면에 눈이 뒤집힌 인간 보병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피바다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온 만델라. 지구는 그 사이에 전시경제가 지배하는 세계로 변해 있었다. 화폐단위는 전세계 공통의 "킬로 칼로리". 전지구를 통제하는 기구는 일종의 군산복합체가 된 UN이다. 수십년 동안 쌓인 (우주여행으로 인해 만델라가 실제로 먹은 나이는 4살이지만) 만델라의 월급은 그를 갑부로 만들어주기는 커녕 겨우 몇 년 먹을 칼로리의 양으로밖에는 전환되지 않고, 열심히 배웠던 물리학은 수십년의 세월 속에 낡아빠진 지식으로 전락해 있다. 퇴역군인 만델라가 얻을 수 있는 직업은 기껏해야 보디가드. 직업의 수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누구나 통과할 수 있는 학교를 다니고 그 이후에는 실업자로 전락해 유엔에서 배급하는 칼로리 쿠폰을 받아 연명한다. 어디를 가나 폭력이 횡행해 밖에 나가려면 보디가드를 고용해야만 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고 인구조절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동성애가 대다수에 적용되는 룰이 만델라를 맞이한 지구의 상황이다. 

결국 만델라는 군에 재입대해서 다시 싸움터로 나간다.

두 번째 전쟁에서는 지휘관의 결단(!)으로 타우론들과 싸우는 대신에 귀중한 정보를 입수해 본부로 돌아오느라 수백년을 보낸다. 

두번째로 귀대해보니 이제는 이성애는 법으로 금지된 데다가, 언어조차 너무 변해서 만델라가 거의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러저러해서 다시 한 번 만델라가 싸움터로 나갈 때는 우주여행으로 인한 시간 덕에 별로 경험도 없는 채로 졸지에 지휘관으로 승진을 한다. 전쟁 개시 이래 유일하게 살아 남은 병사라는 후광과 함께. 하지만 부하졸병들은 만델라 때문에 고어를 배워야 하고 게다가 너무 오래전 사람이라 이성애자라는 희한한 종류의 인간인 지휘관이 못마땅스럽기만 하다.

죽네사네 고생을 해서 세번째 출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물론 대부분의 병사는 전사하고) 한 줌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귀대하는 때는 3000년대. 전인구는 이제 모두 복제인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행한 것은 그 덕분에 드디어 타우론들과의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 알고보니 타우론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전에 문명의 진보를 이루어 인간들과 처음 전쟁을 개시했을 때 이미 전 종족이 복제 타우론인 상태였다. 무제한적 살상이 이루어진 길고 긴 우주전쟁 내내 인간들과 타우론들은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는데. 처음으로 복제인간 대표가 타우론을 마주하자 클론들 사이에만 가능한 대화가 시작된다. 

타우론들의 첫 질문은 "왜 너희는 이 전쟁을 시작했느냐?"

호전주의자들은 작동실패로 야기된 우주선의 파선이 마침 그 때 옆을 지나가던 타우론들의 공격이라 주장했고 그리하여 그 길고긴 수천년의 우주전쟁이 시작되었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의 박약함을 논증하던 평화주의자들은 모두 무시되었다고.

 The forever war는 저자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후에 자신의 경험을 살려 쓴 소설이라고 한다.
베트남전의 공상과학 버전쯤 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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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5-2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책을 재미있게 읽었어요...특히 바로 전에 스타쉽 트루퍼스를 읽고 바로 이 책을 잡았거든요..^^

검둥개 2007-05-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타쉽 트루퍼스와 이 소설이 종종 전쟁 찬성파와 반대파를 대표하는 공상과학소설로 읽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시간이 되면 그 책도 읽어봤으면 하는데 언제가 될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