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그루 1
김상현 지음 / 명상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참 오래 걸렸다. 12권까지 완독하는데 4~5달은 걸린 것 같다. 방대한 내용과 집중력 부족의 탓도 있겠지만, 제일 큰 이유는 소설의 구조인 것 같다. 이 [탐그루]는 액자 소설의 형식으로 쓰여졌다. 근 미래시대(주인공; 비류)와 바르도 대륙(주인공; 수르카, 라이짐)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탐그루라는 마을에서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수르카'와 '라이짐'이 나중에 다른 길을 가게 되면서 3개의 이야기로 다시 진행이 된다. 문제는 이런 3개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각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올 때 살짝 뛰어넘거나 중략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진행되는 이야기로 유추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흐름이 끊긴달까...거침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흡입력이 부족한 것 같다. 김상현 작가의 처녀작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또 후반부 12권에 접어들면서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도 매우 유감이다.

이야기는 근미래시대에서 사는 비류라는 소년으로 시작한다.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비류는 어느 날, 수상한 노인의 부탁을 받게 된다. 그 노인이 지니고 있는 랩탑을 줄테니 그 안에 있는 '세헤라자드'라는 프로그램을 삭제해 달라는 것. 랩탑이 마음에 들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세헤라자드'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게 된다. 그 프로그램은 바로 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죽어야 했던, 수상한 노인의 딸의 영혼을 에뮬레이터 시킨 것이다. '세헤라자드'는 자신을 살려주는 대신 비류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바르도 대륙의 탐그루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마치 술탄에게 천일 동안 이야기를 들려주어 목숨을 부지하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드 처럼 말이다. 

탐그루에서 함께 자란 수르카와 라이짐. 수르카는 마법의 말을 모으기 위해 자신을 쫓아오는 성황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라이짐은 억울하게 귀족에게 죽임을 당한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탐그루를 떠나 아케르 용병단에 들어가게 된다. 세상의 모든 귀족을 없애고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아케르의 이념에 매료되어 용병단의 생활을 하지만, 그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생명들을 보며 수르카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생명보다 우선시 되는 것은 없다며 용병단을 떠나 라이짐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용병단에 남은 라이짐은 정보를 다루는 정보부장으로서 승승장구하지만, 귀족을 없애고 자신들이 기득권 층이 되어버리는 아케르 용병단의 모습을 보고 그곳을 떠나 탐그루에서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수르카와 함께 탐그루를 아케르로부터 지켜낸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세계는 어느 일정 시점에서 조우하기도 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한 때는 8년 전, 찜질방에 갈 때 보려고 친구의 추천으로 빌려 본 때였다. 1권만 빌렸었는데 그 한 권도 다 읽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꼭 읽어봐야 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는데, 소설 도입부의 내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판타지 소설과는 많이 다른 것이 그 이유인데,(다른 판타지 소설을 많이 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탐그루에서의 마법은 마법사가 생각한데로 불이 붙고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는 마법이 아니다. 마법은 마음의 발현이며 마법의 말을 통해 구동된다. 가령 해리포터에서처럼 우리가 뜻도 모를 '윙 가르디움 레비오사' 같은 주문을 외우듯이, 탐그루에서는 우리 말로 주문을 외운다. 예를 들면 "해야할*일이*먼저고*하고*싶은*일과*할*수*있는*일은*나중이다" 이런 식으로 마법의 말은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마법의 말을 안다고 해서 마법이 발동되는 것은 아니며, 마법의 말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마법이 뜻하는 마음의 의미를 이해해야만 가능하다.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적이다.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다스릴 것인가에 대해 주인공은 고민하면서 성장한다. 

근 미래시대의 상황묘사는 10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참신하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현실적인 고민거리를 담고 있다. 세계전쟁 후 통합정부의 출범이라든지,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과 붉은 달이라든지, 인터넷의 다음 세대인 Earth Net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려는 한 거대 기업의 야욕이 그러한 것들이다. 

바르도 대륙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명칭이나, 상황으로 녹아들어있다. 바르도 대륙에서 수르카를 포함한 많은 수의 고아들이 생겨나게 한 '3년 전쟁'은 한국전쟁을, 고대의 아모리카 대륙과 고대어는 아메리카 대륙과 영어를, 아무런 의욕과 의지가 없이 누워서만 지내다가 죽게 되는 레디삐병은 'Beatles'의 'Let it be'를, 세상의 종말이라 일컫는 마칸의 강림은 'machine' 즉 기계화 문명을 뜻한다.  이 밖에도 많은 상징들이 나타나 있다.

 

열두 권을 한 번에 쭉 읽지 못해 완전히 기억은 못하지만, 열두 권을 읽으면서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도 참 많았다. 일일이 표시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말이라는 건 그저 사람의 마음이 남기는 흔적이라고 했다네. 그리고 우리가 흔적만을 이해하는 한, 결코 마음을 알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지."                                   - 11권 180쪽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글을 쓴 이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일세."               - 11권 181쪽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말을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지만 온전히 그대로 마음을 표현할 수는 없다. 어딘가 왜곡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표출할 때는 항상 신중해야 한다. 

 

"이곳 줄루 산맥은 타실을 동타실과 서타실로 나누는 반목의 장이었지. 이 돌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더군. 여기서부터는 동타실이고 저기서부터는 서타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야. 다 같은 타실 사람 아닌가? 그 이전에 비스토브레 왕국 사람이고, 또 그 이전에 바르도 대륙 사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 같은 사람일 텐데 말이야."                        - 11권 215쪽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강북에 사는 사람과 강남에 사는 사람은 다 같은 서울 사람이고,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은 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다. 더 큰 범주로 보면 우리는 아시아인이고, 우주로 나가게 되면 지구인인 것이다. 외계인이 침략하게 되면 우리는 서로 똘똘 뭉쳐 싸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반목하고 작은 이익으로 인해 다투게 된다. 다 같은 사람일 텐데 말이다. 

평민들 위에서 군림하고 착취하는 귀족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외치던 아케르 용병단은, 막상 귀족들을 없애고 나자 자신들이 지배계급이 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며. 내 생각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 않고 평등해질 수 없을 것이다. 제각기 갖고 있는 능력이 다르고, 주어진 환경이 다른데 어떻게 평등해 질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똑같이 분배한다고 해도 격차는 벌어지게 되고 다시 차별이 생길 것이다. 지배하고 군림하는 사람과 복종하고 유린당하는 사람. 현재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계급이 사라져서 지배하고 군림할 수 없지만,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의 말처럼 능력있는 사람들은 차별과 불평등을 원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존재가 가치있어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것들을 작가는 이 책에서 담아내려고 노력한 것 같다. 작가의 모든 의도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마지막 '후기를 대신하여' 부분에서 작가가 언급하고 있듯이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그 이야기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는 건 오직 이야기를 듣는 사람일 뿐이다. 탐그루를 읽고 느끼는 것은 읽는 이마다 다를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절판되어 쉽게 구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은 이 책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인상적인 마법의 말들  
 
  • 해야할 일이 먼저이고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은 나중이다. 
  • 모든 일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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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1-07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읽으신다고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셨네요? 물이수님 댓글이 없으니까 저도 깜빡해서 이제야 놀러오잖아요. 수르카랑 라이짐은 이름이 참 독특하네요. 멋져요. 내용도 신선하고. 리뷰가 좋네요.^^

2011-01-07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