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러시아 고전산책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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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다가오는 무섭고 얄미운 죽음만이 유일한 진실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거짓이었다.”(90)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모험은 강상중 교수의 <살아가는 힘>을 읽고 나서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그래서 섭렵하게 되고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최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다보니 <이반 일리치의 모험>이 중요한 예로 등장하고 있어, 다시 한번 이 책을 들춰보게 된다.

 

이번에는 역술가의 입장에서도 보게 되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는 남들에게 화려하면서도 고상해 보이는 집안 장식을 원한다. 그래서 직접 일꾼들을 거든다. 그러다가 작은사고가 일어난다.

 

한 번은 이해를 못 하는 도배공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보여주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건장하고 행동이 민첩해 굴러떨어지지는 않았고 옆구리를 액자틀 모서리에 부딪히는데 그쳤다. 부딪힌 곳은 무척 아팠지만 통증은 곧 가셨다.”(46)

 

부인의 지나가는 걱정에, “난 이래 봬도 한가락 하는 체조선수야. 다른 사람이라면 큰일 났겠지만 난 여기에 부딪히는 데 그쳤어. 건드리면 아프긴 해. 하지만 뭐 괜찮을 거야. 멍든 것뿐이야.”(47)

 

 

하인리히 법칙처럼 모든 사고는 작은 혹은 눈에 잘 잡히지도 않는 사고로 먼저 발생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즉 노자가 말한 것처럼 見小曰明, 즉 작을 것을 볼 줄 앎을 현명한다고 한다고 한다면, 바로 이 작은 사고가 큰 사고를 예고하는 무의식이란 절대지의 경고였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델포이의 신탁의 주재자는 말하지도 감추지도 않고, 다만 징표를 보일 뿐이다.”(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235-236)

 

멈추고 바라 볼 줄 아는 힘의 상실, 명상과 침묵의 부재가 우리에게 징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잠재의식에서 느끼는 불안을 타조처럼 모래 속에 머리를 박는 것으로 우리는 흔히 외면한다. “뭐 괜찮을 거야.”라며.

 

분명 잘못된 욕망이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던 이반 일리치. 다행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 전체를 반성하며 본래적 의미를 되찾긴 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아쉬운 맘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경우, 저 심심막측한 잠재의식 속에서 불안의 진동이 가늘게 떨려오고 있음 정도는 알고 있다. 그것을 밖에서 알려주는 것이 징표와 융의 용어로 하면 동시성 혹은 촉매적 외화현상이다.

 

역술의 많은 분야들이 바로 이 촉매적 외화현상으로 징표를 만들어 내 찾아내고 있다. 몰입해 퇴락한 에고를 잠시 가라앉히고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을 뚫고 들어가 한 점으로 쫄아든 자기를 찾아내 말()로 그 뜻을 알려주는() ()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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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여행
정창환 지음 / 도솔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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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유명한 소설집 달려라, 아비에는 매일 밤 이런저런 온갖 잡다한 생각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 환자를 다룬 단편이 있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가 바로 그 작품인데, 그녀는 매일 저녁 털, 퀴즈, 팬티 등 딴에는 하찮은 일들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직장에서도 실수가 잦아 미운털이 박혀 있다.

 

아마 여주인공의 얼굴형은 형상의학에서 신과(神科)라고 말하는 역삼각형일 가능성이 높다. 신과의 특징을 거의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삼각형인 신과(神科)는 생각이 많아서 우유부단한 경우가 많다.”[정창환, <얼굴여행>, 도솔, 25.] 주인공인 그녀가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김애란, 그녀에겐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 달려라, 아비, 창비, 2006, 87. 이하 쪽수만 표기.]일 정도로 온갖 잡념에 시달린다. 또한 그녀는 뭔가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마다 곤혹을 치르[90]는데, “그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처럼 느껴[90]지기 때문이다.

 

신과는 잘 불안해하고 그러다 보니 신경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다. 신경이 예민하여 감정적으로 상처를 잘 받고, 그로 인해 병을 얻는 수가 많다. …… 자신이 만든 화로 인해 뜬눈으로 밤을 새운다. 잠이 안 들어서 또 화가 난다. 그러면 잠을 더 못잔다.”[얼굴여행, 24.]

 

여주인공 역시 어떤 빛도 어떤 소음도 없는 상태에서[라야] …… 숙면을 청할 수 있[106]을 정도로 민감하다

 

그녀는 옛 애인이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여자와 사귄다는 소식을 듣고 잠 못 들고, …… 친구에게 빌려줬다 받지 못한 이만원 때문에 잠 못[93]든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주인공은 말로는 이것 역시 그녀가 잠 못 드는 진짜 이유는 아닐 것이다.”[92]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화가 난 상태인 듯하다. 분노로 가득 차 있는데도 스스로 그걸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매일 밤 잠 못 들면서, 매일 사람들과의 관계에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서럽게 울지도 모르고 어쩌면 한번 더 자세를 틀며 진짜 이유 같은 건 없어라고 중얼거릴지 모른다.”[111] 이런 증상이 심해지면 정신질환을 앓을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신과의 사람은 성질temper'이 나쁜데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해서 성격character’이 나쁜 것이[얼굴여행, 30. 강조와 영단어는 인용자. 이 책의 저자는 성격은 인격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성질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라고 한다. 여주인공인공 스스로 고백한다. “불면의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성격일 때문일 것이라[90].

 

이런 타입은 불() 기운이 강한데, ()의 성질은 단단하게 굳힐 줄만 알고 부드럽게 굽힐 줄은 모르기 때문에 매사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똑똑 끊어지듯 날카롭게 행동한다.

 

아닌 게 아니라 여주인공은 아버지가 매일 텔레비전을 보는 것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가 화장실에 간 사이 가위로 텔레비전 유선을 싹둑 잘라버렸다.”[102] 그러고는 잠시 후에 자신이 실수를 한 것 같[103]고 후회를 한다.

 

여하간 신과는 불()이 많다. ()기인 불이 너무 많으면 음()기인 물이 부족해진다. 그 결과로 양기는 상체로 몰리고 음기는 하체로 몰려 하체가 약해져 다리의 병이 잘 생긴다. “옛날 남자친구가 자신의 다리가 발목만 얇다 하여 닭다리라고 놀렸던[108].일이 있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유독 발목이 얇은 것이다. 여주인공의 다리가 닭다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유장상법에는 족경무육足脛無肉 이라 하여 종아리 쪽에 살이 없는 상을 남녀모두 천()한 상으로 보고 있다. 여자의 경우, 특히 살림을 못한다고 나와 있다.

 

여주인공은 다행히 발목만 얇다. 상학(相學)에서 손목이나 발목이 가녀린 경우는 귀격(貴格)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신과는 머리가 좋고 총명하며 매사에 꼼꼼하고 분명하게 행동한다는 큰 장점 또한 가지고 있다. (경험상, 아마도 편인태과나 정편인혼잡격들이 신과일 확률이 높다)

 

신과는 백 가지 보약이 편한 마음 한 가지만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얼굴여행, 26.] 뭔가를 억지로 하거나 서둘러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신과에게는 걷기와 명상이 가장 좋은 요법(療法)이라고 한다.

 

---심심해서 상학을 중심으로 풀어봤는 데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오 역술의 그럴듯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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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탐 2014-12-2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잘 읽고 갑니다.
 
모비 딕 아셰트클래식 4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모리스 포미에 그림 / 작가정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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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아내와 딸만 장례식장에 왔다는 위대한 작가 허먼 멜빌의 쓸쓸한 삶을 생각할 때면 전율이 인다. 운명에 맞선 고독한 투사가 우리들의 애도를 바랐겠는가마는......

 

 

퀴퀘그는 철학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을 테지만, 우리들 인간이 참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살거나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누구가 철학자를 자처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은 소화불량에 걸린 노파처럼 위장을 망가뜨린 게 분명하다고 결론짓는다.”(96)

 

위 인용문처럼 허먼 멜빌은 발딱발딱 뛰는 구체적 세계의 현장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고래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고래잡이배에 대한 세세한 지식 때문에 전체 서사 구조를 간혹 놓치기도 하지만 섬세함과 웅장함이 바다 위에서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는 명저이다.

 

챕터9<설교>를 잘 읽어보아야 운명의 불가해함과 이유 없는 고통에 맞서 싸우는 바다위의 파우스트, 에이해브 선장 선장의 목숨을 건 고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음미될 듯하다.

 

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의 죄는 하느님의 명령에 고의로 복종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그 명령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쨌든 요나는 그것을 가혹한 명령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시키고자 하는 일은 모두 우리가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점을 명심해두셔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쓰기보다 우리에게 명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에게 복종하려면 우리 자신을 거역해야 합니다. 하느님에게 복종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거역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84)

 

뱀의 대가리를 찢어 삼켜버린 차라투스트라의 기개로 에이해브 선장은 ‘~해라’-신의 명령에 작살을 꽂고 만다. ‘그렇게 해야한다는 이슈메일과 그렇게 하지 않겠다의 에이해브선장. 둘다 삶의 끝없는 파탄에 지쳐버린 이들이지만 ‘~해라’-신에 대응하는 건 극적으로 다르다. 살아 남는 건,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이슈메일이다.

 

, 운명, 신 혹은 대타자와의 우주적 대 격돌은 장엄하게 바다의 심연으로 침몰한다. 아래의 마지막 말을 남기고 모비딕과 함께.

 

오오, 고독한 삶의 고독한 죽음! 오오, 내 최고의 위대함은 내 최고의 슬픔 속에 있다는 것을 지금 나는 느낀다. 허허,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먼 바다 끝에서 밀려 들어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뛰어넘어라!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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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길이 만나는 곳 세계신화총서 10
샐리 비커스 지음, 강선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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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필 다음날 발표하라고 해서, 시간이 없어 이렇게 발췌한 부분들만 파편적으로 올린다. 이 책은 융적인 테이레시아스 유령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프로이트의 병상에 나타나 프로이트의 독점적 오이디푸스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대화체 소설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예외적 대상자가 오이디푸스라든가, 이오카스테가 자기 아들인 걸 몰랐겠느냐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해석을 가져다 준다.)

 

콤플렉스/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일렉트라콤플렉스

 

콤플렉스란 용어는 융Jung에 의해 확립되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콤플렉스감정적으로 강조된 심리적 내용또는 그 내용을 중심으로 한 심적 요소의 어떤 균일한 군집을 말한다고 융은 정의한다. 콤플렉스는 하나의 핵요소를 중심으로 형성되는데 이 핵요소는 강한 정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핵요소는 무의식 속에 있으므로 자아가 그것을 인식할 수 없으면 그 정감의 정도는 주관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 핵요소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인과적으로 환경과 결부된 체험에 의하여 정해진 조건이며, 다른 하나는 소인적(素因的)인 성질을 띤, 그 개체의 성격에 내재하는 조건이다.”[이부영, 분석심리학, 일조각, 2012, 66.]

 

융은 콤플렉스를 무의식에 대한 왕도로 그리고, ‘꿈의 건축가라고 일컬었다. 이것은 ’, 그리고 다른 상징적 표현들이 콤플렉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앤드루 새무얼 외, 융분석비평사전, 동문선, 2000, 57.]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 초기의 성적 시기에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다. 이 시기 이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억압되고 잠복기로 이어지는 해체가 일어난다. 무엇 때문에 이런 해체가 일어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분석에 의하면, 부모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아픈 경험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혹독한 벌을 받으면서 이런 행복한 환영에서 깨어난다. 남자아이는 엄마를 자기만의 것으로 여기지만, 어느날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새 아기에게로 쏠려 있음을 보게 된다. [] 특별한 사건이 아니더라도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원하지 않는 아기로 인해 계속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거부될 때, 결국 아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파괴되어 간다.”[지그문트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1996, 47~48. 참고로 요즘은 소포클레스의 작품과 관련하여 주로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법적 개념을 둘러싼 논쟁이 부상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에띠엔느 발리바르 외, 인간사랑)전체주의가 어쨌다구?(슬라보예 지젝, 새물결)를 참조할 수 있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견해] 차이 중에 중요한 것은 라깡의 견해 가운데 주체가 남성이든 아니면 여성이든 상관없이 주체는 항상 어머니를 욕망하고, 아버지는 항상 경쟁자가 된다는 겻이다. [][다만]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와 대단히 비대칭적인 방식으로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경험한다. []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로부터 상징계, 상징적 관계 그 자체의 정복으로의 이행에 다름아니다. 상징계로의 이행이 복잡한 성 변증법을 경유한다는 사실은 주체가 성차의 문제에 직면함이 없이 상징계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상징계는 법의 영역이고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징계의 정복이기 때문에, 그것은 규범적이고 정상화하는 기능이다 :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실재계의 인간화된 구조에 순응할 수 있는 인간 존재에게 필수적이다.”(S3, 198)." [딜런 에반스, 외디푸스 콤플렉스, 라깡 정신분석 사전, 인간사랑, 1998, 263~267.]

 

엘렉트라콤플렉스Electra complex : 딸이 아버지에게 애정을 품고 어머니를 경쟁자로 인식하여 반감을 갖는 경향을 가리키는 정신분석학 용어.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프로이트가 이론을 세우고 융이 이름을 붙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3~5세의 남근기(男根期)에 여자아이들은 자신에게는 남동생이나 아버지가 갖고 있는 성기(penis)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남성을 부러워 하는 한편 자신에게 남성 성기를 주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한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음경선망(penis envy)이 여자아이로 하여금 엘렉트라콤플렉스를 갖게 하는 적극적인 원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욕구는 어머니의 여성적 가치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초자아(超自我)가 형성되면서 사라진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대비되지만 그만큼 중요시되지는 않는데, 이는 최악의 상황이라도 어머니가 딸을 거세(去勢)할 수는 없으므로 남자아이들만큼 거세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여성의 초자아가 남성보다 약하다고 믿었다. 명칭은 그리스신화에서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가 보여 준 아버지에 대한 집념과 어머니에 대한 증오에서 유래하였다. 미케네 왕 아가멤논은 10년 동안의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귀국한 날 밤에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간부(姦夫)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하였다. 엘렉트라는 동생인 오레스테스와 힘을 합쳐 어머니와 간부를 죽이고 복수하였다.[인터넷 두산백과사전에서 발췌.]

 

융의 비판 : “어린이가 근친상간적 느낌이나 환상을 경험할 때, 그 아이는 부모와 밀접한 감정적인 접촉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에 풍부한 경험의 층을 덧붙이려는 무의식적 시도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근친상간적 충동의 성적인 양상은 그 만남이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것임을 보증해준다---성적인 느낌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근친상간의 금기는 신체적인 표현을 금지하며, 그 자체로 정신적인 목적을 가진다.”[앤드류 새무얼 외, 근친상간, 위의 책, 125. 이하 모든 인용문에서의 강조는 인용자. 융의 오이디푸스 해석에 관해서는 로고스와 에로스의 균형과 관련한 해석을 참조할 것.]

 

도올 김용옥의 비판

 

어린아이가 생후 약 2년동안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성별(sex differentiation)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게 된다. 그러다가 2 년이 지나면서, 우리 나이로 3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남자아이는 여자몸에 자기가 가랑이에 달고 있는 대포같은 작대기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여자아이는 남자 몸에 자기의 몸에 없는 것이 불쑥 튀쳐나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런데 프로이드(어쩌면 서구인)에 의하면, 이러한 있음없음의 인식은 바로 그들에게 공포와 불안을 준다는 것이다. 즉 남자아이는 자기의 자지가 여자아이처럼 짤려 없어질 것”(castration, 거세)을 걱정하게 되고, 이러한 짤려 없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때마침 생기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엄마라는 존재를 하나의 성욕의 대상(love object, 이때 “love"는 정신적 사랑이 아니라, 정확하게 씹한다는 뜻임)으로 느끼는 심리가 발동함에 따라 그것과 가중하여 아버지가 죽이고싶도록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 즉 엄마와 씹하고 싶어지고 아버지는 내 자지를 짤라버릴 나쁜 놈, 즉 나의 정욕적 쾌감의 원천인 그 아름답고 좋은 자지를 탐낼 나쁜 놈으로서 공포의 대상이 되며 그와 경쟁의 관계(rivalry in love)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경쟁의 관계로부터의 탈피과정, 즉 아버지라는 권위의 우산으로부터의 탈피과정, 그리고 엄마라는 성욕의 대상에서 진짜 씹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의 이행과정이 곧 인간의 성숙과정이며 이러한 성숙과정에서 그러한 이행을 스무쓰하게 하지 못한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질환적 현상이 뉴로시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카스트레이숀 콤플랙스의 핵심이다.”[김용옥,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92, 156~157.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그의 범성론에 대한 도올 김용옥의 비판적 읽기는 같은 책 156~175쪽을 참조할 것. ]

“[] 내가 최소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은 프로이드의 학설이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의 구조인 이상, 그 해석의 구조는 어디까지나 그 해석이 자리잡고 있는 문화의 장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 곧 프로이드의 해석은 바로 프로이드의 현실적 해석의 대상이 있으며 그 대상은 곧 서구문화전통에서 자라난 인간들, 즉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적 신화적 지배의 가치체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프로이드의 해석은[] 서구적 인간관관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159)

 

우리가 개를 그토록 친근하게 느끼고 사랑하면서도 우리 말끝마다 개새끼, 개새끼(영어도 마찬가지 : “son of bitch")하면서 그토록 개를 경멸·저주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최초로 타부화시킨(금지시킨) 속성들을 개가 구현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163)

 

외디푸스는 신탁을 통해서 자기가 바로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씹을 하게되리라는 매우 부도덕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운명을 거부하려는 그의 인간적인 노력을 묘사하고 있는 동시에 소포클레스는 그러한 운명을 관철시키려는 신의 부도덕적인 노력을 찬미한다. 이 신화는 외디푸스의 도덕적 노력을 찬미하는데 그 위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 신의 섭리와 그로 인한 인간의 운명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장난에 불과한 것인가를 인간에게 숙지시키는 데 그 위대성이 있다. / 희랍인이 말하는 운명(fate)이라는 것은 부도덕적(immoral)인 것이 아니요 비도덕적(amoral)인 것이다.”(163, 강조는 원문) ]“신탁에서 도망칠 수는 없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탁과 함께 살아갈 길과 방법을 찾는 것뿐이라오.” (샐리 비커스, 세 길이 만나는 곳, 강선재 옮김, 문학동네, 2014, 194.]

 

들뢰즈/가타리의 프로이트 비판

 

도대체 프로이트가 자기 분석에서 오이디푸스를 발견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정말 자기 분석에서인가, 그렇지 않고 그의 괴테적 고전의 교양에서인가? 그는 자기 분석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고는 : 그래, 이건 오이디푸스를 닮았다!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이 어떤 것을 그는 먼저 <가족의 이야기>의 한 변형으로 본다. 즉 욕망이 바로 가족의 규정들을 폭파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편집병적 등록의 한 변형으로 본다. 이와 반대로, 가족의 이야기를 오이디푸스의 한갓 부속물로 삼는 일을 아주 조금씩만 해나간다. 또 무의식 속의 모든 것을 오이디푸스화하는 동시에 신경증화하는 일, 무의식 전체에다가 가족의 삼각형을 덮어씌우는 일도 조금씩만 해나간다. 정신분열자는 여기서 적()이다. 욕망하는 생산은 인물화되고, 혹은 오히려 인물론화되고 상상화되고, 구조화된다. [] 생산은 이제 환상의 생산, 표현의 생산일 따름이다. 무의식은 참된 자기, 즉 하나의 공장, 하나의 작업장이기를 그치고, 하나의 극장, 즉 무대와 연출이 되고 만다. [] 고전적 극장, 표상의 고전적 질서가 되고 만다. 정신분석가는 생산의 단위들을 조립하고 생산과 반생산의 집단적 동인들과 싸우는 기사나 기계 기술자가 되지 못하고 사적인 극장의 연출가가 되고 만다.”[질 들뢰즈 외, 앙띠 오이디푸스,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88. 이하 쪽수만 표기.][정신분석은 이러한 신경증적 욕망을 인간일반의 심리로 보편화하여 욕망 자체를 금욕주의적 입장에서 억압과 부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욕망은 삶의 본질로서의 힘에의 의지라고 할 때, 정신분석은 삶을 억압하고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의 비판처럼 니힐리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단죄의 성격을 가진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 따르면, 금욕주의적 이상은 죄라는 관점에서 모든 고통을 해석하고,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한다. 즉 서구 형이상학은 이데아, 형상, 내세, 도덕 등 초월적인 세계나 가치 등의 무=부재에 의지해왔으며, 이는 그 자체로 삶을 가치절하(부차화)하고 부정하며 억압하는 금욕주의의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정신분석은 니체가 비판한 서구의 전통형이상학과 금욕주의 도덕의 현대적 판본이라 할 수 있다.” (한정헌, 들뢰즈/가타리의 정신분석 비판, 웹진 파이데이아)]

 

정신분석이 비난받는 것은 오이디푸스적 언표들만을 골라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언표들 역시도 어느 정도까지는 기계적 배치물에 속하는 것이어서, 오류를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는 계산처럼 이 배치물에게 교정 지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이 비난받는 것은 환자에게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언표들을 갖게 될 것이고, 마침내는 자기 이름으로 말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오이디푸스적 언표행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함정에 빠져 있었다. 늑대 인간은 결코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늑대들에 대해 말한다 해도, 그가 늑대처럼 외쳐댄다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듣지도 않고 자기 개를 쳐다보며 <그건 아빠야>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프로이트는 신경증이라고 말하고 그것이 파열되면 정신병이라고 말할 것이다. (중략) 늑대 인간은 <예닐곱 마리의 늑대가 있어!>라고 계속 소리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뭐라고? 아기 염소들이라고? 거 참 흥미롭군. 아기 염소들을 빼도록 하지. 이제 늑대 한 마리만 남지. 그러니까 그건 네 아빠야......>라고 대답한다.”[질 들뢰즈 외, 천개의 고원,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3, 80~81.]

 

파괴하라, 파괴하라: 정신분열자-분석의 일은 파괴를 통해서 행해진다. 즉 무의식을 깨끗이 청소하고 깨끗이 소화함으로써 행해진다. 파괴하라, 오이디푸스를, 자아라고 하는 착각을, 초자아라고 하는 꼭두각시를, 죄책감을, 법률을, 거세를······.>(457)[헤겔은 동물을 비웃는다. 동물은 존재하는 직접적인 상태를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고 다른 동물에 의해서만 벗어난다. 그렇게 벗어나는 일이란 만신창이가 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다. 개가 더 큰 개에게 물려 죽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을 벗어나듯. 반면 인간은 내적 부정을 통해 직접적인 자기 상태를 지속적으로 벗어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할 장애로 여기고, 이 장애를 부정함으로써 발전한다. 난 이보다 더 잘 할 수 있어! 다음 목표는 수학에서 50점 받는 거다! 이렇게 나날이 장애물 같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고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 바로 이런 사상의 정반대 편에 스피노자의 제자로서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있다. 들뢰즈는 동물을 이렇게 찬양한다. “동물들은, 비록 필연적으로 서로 죽이기는 하지만, 죽음을 자신 속에 품고 있지는 않다.” 동물은 직접적으로 주어진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존재를 즐길 줄만 안다. 오로지 버려야만 하는 인간의 어떤 악습만이 내면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니체가 말하듯 자기 존재를 가책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 가책은 후에 프로이트에 와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죄의식이 된다. 삶은 내면에서 죽음을 선고하는 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며 주어진 존재에 대한 긍정과 기쁨으로 차 있다. 이런 삶에 대한 찬가가 들뢰즈의 [앙띠 오이디푸스] 철학이다./ 정치철학서이자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앙띠 오이디푸스라는] 이 작품은 17세기 스피노자가 [신학정치론](1670)에서 제기했던 물음을 당대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이어받고 있다.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투쟁하는가?” 물리적 억압을 동원하는 제도적인 장치들은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예속 없이는 결코 성공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결국 그것들이 인간본성에 위배된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도적 억압의 성공은 그 요인을 개개 인간 내면에서 물어야 한다. 왜 사람들은 예속을 원하는가? 스피노자 시대에는 여러 형태의 교회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었다면, 들뢰즈 시대 유럽에선 정신분석학이 그 역할을 했다. 오이디푸스에 반대한다는 뜻의 저 작품 제목 앙띠오이디푸스가 알려주듯, 내면적 예속은 부성적(父性的) 법에 의해 우리 마음이 부정적으로매개되는 데서 이루어진다.(오이디푸스란, 부성적 법의 금지를 통해 죄의식과 함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발생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오이디푸스의 작동이 단지 개개 가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으로 펼쳐진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오이디푸스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찾자면 이른바 위대한 인간이 그것이다(가령 독재자들). 프로이트는 [인간모세와 유일신교](1939)에서 사람들은 자연적으로위대한 인간에게 예속되길 원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버지 역할을 하는) 위대한 인간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고 질문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인간의 집단이면 어디에든 권위에 대한 강렬한 희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존경을 보내고,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지배를 받든 학대를 받든 강력한 권위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는 바로 이런 견해에 맞서 싸운다. 위대한 인간이라는 갑각류 동물과 여기에 열광하여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 대중이라는 미친 무척추동물을 세계사에서 내쫓고자 하는 것이다. /존재론에서는 탁월한, 초월적인 원리가 피안으로부터 차안의 존재를 규정하였다. 이 초월적인 원리는 기독교 시대에서는 신이었고, 현대에 와서는 오이디푸스가 된다. “아버지의 문제는 신의 문제와 같다.” “오이디푸스는 신과 같다. 아버지는 신과 같다.” 바로 이 아버지가 앞서 살펴본 부정성이 기능하도록 만든다. 즉 오이디푸스 때문에 나 자신은 긍정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양되어야 할 것, ‘가책의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분석학은 외부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억압에 호응하여 개개인을 내면에서 옭아매는 학문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내 욕망이 아버지 아래서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노동자(아이)로서 나는 영원히 자본주의 체제(아버지) 아래에서 각종 억압과 금지를 통해 가책을 겪어야만 하는 숙명이다. “아버지, 어머니, 아이는 자본의 이미지의 환영(‘자본 씨, 대지 부인’, 그리고 이 둘의 아이인 노동자)이 된다.” 이런 식의 억압적인 오이디푸스, 부성적 법, 초월적 지배자로부터 차안의 욕망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 [앙띠오이디푸스]의 과제이며, 그 해방의 결과는 부성적 법 앞에 가책을 느끼는 인격화된 욕망이 아니라, 정체성을 지정 받지 않는 다수의 익명적 욕망의 자유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욕망은 초월적인 법 내지 부성적 법이 제어할 수 없는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초월적 원리에 지배 받지 않고 유목민처럼 탈주하는 이 욕망의 긍정성을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하는 작업은 [앙띠오이디푸스]의 후속편인 [천 개의 고원](1980)이 떠맡게 된다.(서동욱, 질 들뢰즈 : 어떻게 삶을 긍정할 것인가,네이버캐스트 중에서 발췌·재구성)]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비판

 

프로이트는 [근친상간이라는] 그 강렬한 감정 자체가 무의식적 욕망의 증거이고, 특히 남성이 어머니와의 성교를 생각할 때 극도의 불쾌감을 느끼는 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런 논리라면, 사람들은 개똥을 먹거나 바늘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갖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스티븐 핑커, 7장 가족의 소중함in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김한영 옮김, 동녘사이언스, 2007, 702. 이하 쪽수만 표기.)]

 

근친상간은 "피를 탁하게 한다'는 민간 속설과, 고립된 산골과 왕가에 심신장애자들이 자주 태어나는 현상 뒤에는 일말의 생물학적 진실이 숨어 있다. 유전자 풀에는 해로운 돌연변이들이 꾸준히 유입된다. 어떤 것들은 우성이 되어 주인을 불구로 만들고는 곧 도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열성이어서 개체군에 누적되기 전까지는 해를 끼치지 않는다. 가까운 친족들은 유전자를 공유하므로, 서로 짝을 맺으면 해로운 열성 유전자의 두 사본이 결합하여 자손에게 갈 위험이 매우 높아진다. 우리 모두는 치명적인 열성 유전자를 한두 개쯤 갖고 있기 때문에 남매가 짝을 맺으면 이론상으로나 위험도를 측정한 연구에서나 손상 자식이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것은 모자간, 그리고 부녀간 교배(그리고 정도는 약하지만 더 먼 친족들 간의 교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그리고 다른 많은 동물들)은 가족 구성원과의 섹스에 대한 생각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을 진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자는 유전적으로 나이 많은 여자에게 끌리지 않기 때문에 모자간의 근친상간은 실질적으로 전무하다.”(702~704)

 

“[] 근친상간 사고의 절반에서 4분의 3은 계부와 의붓딸 사이에서 발생한다.”(704)

 

“19세기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웨스터마크는 유년에 한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서 성장하면 뇌는 그 사람을 '형제' 범주에 넣는다고 추측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른이 아이를 양육하면 그 어른은 그 아이를 아들이나 로 지각하고, 아이는 그 어른을 어머니아버지로 지각할 것이다. 일단 그렇게 분류되면 성적 욕구는 사라진다. 이 알고리듬은 함께 자라는 아이들이 생물학적 형제이거나 반대로 생물학적 형제들이 함께 자라는 세계를 전제로 한다. 한 어머니의 자식들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대개 아버지도 함께 생활한다. 이 전제가 무너지면 친족 착각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막스 프리쉬가 쓴 호모 파버(봉원웅 옮김, 생각의나무)를 보라.] 친족이 아닌 사람과 함께 성장할 경우 서로에게 성적으로 무관심해지거나 거부감을 갖게 된다. 반대로 친족인 사람과 따로 성장할 경우에는 서로 [성적] 거부감을 갖지 못한다.”(705)

 

키부츠에서나 중국의 민며느리제도, 우리나라의 조혼제도 혹은 이와 유사한 제도하에서 자라난 남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결혼이나 섹스를 하지 않거나 결혼 생활은 불행하고, 불성실하고, 자식이 적고, 거나 마치 형제처럼 자라거나, “성적으로 냉담하고[] 이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현상이라고 한다.(706쪽 참조)

 

역으로, 근친상간을 범한 사람들은 함께 자란 경험이 없다. [] 시카고의 남매 근친상간을 조사한 한 연구는, 결혼을 생각했던 유일한 남매는 떨어져 자란 사람들이었음을 밝혀냈다. 딸을 성적으로 학대한 아버지들은 딸이 어렸을 때 함께 생활한 시간이 적은 경향이 있다. 어린 의붓딸과 생물학적 아버지 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보낸 계부들은 의붓딸을 학대하는 경향이 적다. [] 생물학적 부모와 형제를 찾은 입양아들이 종종 그들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느낀다는 이야기도 있다.”(706~707)

웨스터마크 효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근친상간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설명해 준다.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는 자신이 아들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아들을 낳자 라이오스는 아기의 발목에 쇠못을 박아서 산중에 내다 버린다. 오이디푸스는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길러진 다음 코린트의 왕에게 입양되어 왕자가 된다. 델포이를 방문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임을 알게 되자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코린트를 떠난다. 테베로 가는 길에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만나 사소한 말다툼 끝에 그를 죽인다. 그런 다음 그는 수수께끼를 풀고 스핑크스를 죽인 후 그에 대한 상으로 테베의 왕위와 홀로된 왕비를 얻는다. 그녀는 오이디푸스가 성장하는 동안 그와 떨어져 지낸 생물학적 어머니, 이오카스테였다. 두 사람은 네 자녀를 둔 다음 비극적인 소식을 듣는다.”(707)

남자아이들이 어머니와 자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생각이라고 느낀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옷 입는 것을 지켜보면서 성적인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썼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유모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프로이트 여사가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지각 체계에 경고하는 초기의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707)

 

르네 지라르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비판

 

대부분의 허구에 의한 작품들, 즉 소설에서 작중 인물들은 돈키호테보다 더 소박하게 무엇인가를 욕망한다. 여기에는 중개자가 없다. 오직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열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의 본성’(nature)이 욕망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할 때는 열정에 사로잡힌 주체로 관심을 바꾸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주체의 심리를 분석하게 되고 주체의 자유에 호소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봐야 욕망은 언제나 자연발생적이다. 즉 그 욕망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을 이어주는 간단한 직선을 하나 그리기만 하면 된다.[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김치수 외 옮김, 한길사, 2002, 41. “다시 말하면 욕망하는 주체와 욕망의 대상과 그 욕망의 중개자가 삼각형의 구조를 갖게 되고, 이처럼 간접화한 욕망을 삼각형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김치수, 같은 책, 24.)]

 

 

역술(易術)의 입장에서 바라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혹은 근친상간

 

“[] 수많은 해몽가들이 어머니와 관련된 꿈은 다양하고 복잡하며 많이 나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다. 이유인즉, 결합 자체는 의미 있는 일을 보여 주는 데 충분치 않으며, 몸의 얽힘과 위치가 매우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 일부 사람들이 자연스러운 방식이라고 말하는, [] 방식으로 어머니와 관계하는 꿈은 어머니가 살아 있고, 아버지가 건강하다면, 질투심에 의해 아버지와 증오의 관계가 된다는 뜻이다. 아버지가 병자라면 죽을 것이다. 꿈을 꾼 사람은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어머니의 보호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아르테미도로스, 꿈의 열쇠 : 예지몽, 아르테, 2008, 122~123.]

 

“[] 어머니와 성행위를 하는 꿈인 경우, 상징적인 미래예지 꿈에 있어서는 어머니로 표상된 부드럽고 자애로운 직장의 상사와 함께 어떠한 일을 함께 추진하는 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홍순래, 꿈의 상징표상에 대한 이해, 꿈이란 무엇인가?, 어문학사, 2012, 472.]

 

“[] 우리의 몸과 삶은 별들의 각축장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별로부터 왔고, 다시 별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우주적 충동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결코 가족적이지 않다. 사회적이며 역사적이고, 또 초역사적이다. 아득한 시원을 오가기도 하고, 신화적 영웅이나 외계인, 혹은 네스호의 괴물에 대하여, 천상의 쾌락과 지옥의 고통에 대해 사유하고 느끼고 전율한다. 혹은 곰이 되고 싶고 용이 되고 싶고…… 이런 욕망들이 카오스처럼 들끓는 것이 무의식이다. [] 그것을 가족이라는 단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넣은 것이 근대적 국가와 자본이다. [] 결국 욕망이 오이디푸스화되는 그 배후에는 국가와 자본이 있는 셈이다. [] 그러니 사주팔자에서 육친법을 읽어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엄마는 어때? 아빠의 경제력은? 아이 성적은? 나머지 촌수와 관계에 대해선 아무런 질문도, 욕망도 없다. 또 혈연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와 공동체적 열정 따위는 아예 운명이라는 지도에서 아웃된지 오래다. 음양오행이 펼치는 별들의 생성소멸이 졸지에 가족삼각형 안에 갇혀 버린 형국이다. [] 생태계의 파괴가 전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듯, 개인들의 운명에서도 문명과 자연 사이의 왜곡과 간극은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그러니 모든 팔자가 험궂을 수밖에.”[고미숙, 육친법과 오이디푸스’, 나의운명사용설명서, 북드라망, 2012, 162~167. 이 인용문의 앞 부분에는 별들의 탄생과 원소의 관계 그리고 그 원소와 인간의 관계와 관련해 하인츠 오버훔머의 우주의 모든 것중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근친상간과 관련된 사주해석으로는 이당 태호영의 해운 천기누설의 실증, 박문각, 2006, 41장을 참조.

 

 

나가며

 

 

하지만 박사, 오이디푸스가 어떻게 진실을 우연히 발견했는지 생각해보시오. 술에 취해서였소.”(세 길이 만나는 곳, 162)

 

특정한 경우, 음주를 하게끔 하는 충동의 밑바닥에는 그림자가 자신을 주장하려는 노력이 깔려 있는 것 같다. [] 악에 맞서지 않으면, 때때로 악은 이전보다 더 크고 강력해진다.”(A. 샌포드, 융학파 정신분석가가 본 악, 심상영옮김, 심층목회연구원출판부, 182~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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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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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간내서 쓴다는 게 직장이 있거나 일이 많은 사람은 쉽지 않다. 책을 읽을 시간조차도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간혹 청탁이 들어오거나 억지로나마 글을 써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기쁘기 그지없다. 뭔가를 정리할 기회가 온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타고난 문장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힘이 된다.

"글쓰기는 '헤파이스토스'(노동의 신)의 영역이며, '뮤즈'(예술의 신)의 영역이 아니다."

 

스티븐 킹도 유사한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를 절망시키는 문장가들을 보면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심이 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연 헤세나 카프카처럼 쓸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글쓰기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니체가 "책이 책상과 펜과 잉크를 요구해야지, 책상과 펜과 잉크가 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처럼, 사유의 노동이 우선일 듯 싶다. 마치 석류가 농익었을 때 갈라지는 것처럼.

 

결국 글쓰기를 배울 것이 아니라 사유함을 배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언급이 참조할만한다.

"사유란 수동성의 위대한 모험이다."

 

알다시피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게 된다. 책읽기 뉴스, 영화나 예술작품, 누군가의 이야기 등을 접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수동성의 위대한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것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어떤 사태가 다가왔을 때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그 사태가 다가왔을 때, 다가왔음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우리들의 지향성이 문제일 것이다.

 

다시말해서, 내가 지닌 지향성이 사태의 스쳐지나감 또는 붙잡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향성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혹은 누구가에는 다르게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의미론의 중심에 이 문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지향성의 형성은 아마도 관심에서 비롯된 인식론적 반응일 것이다. 관심은 주체적이냐 몰주체적이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인 관심은 관찰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어 생기는 본질적 관심일 것이나, 비주체적인 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관심을 자연적 태도로 일반정립한 비본질적 관심일 것이다.

 

결국 주체적 관심에서 생긴 문제의식의 심화가 생각하게 됨을 낳고 생각하게 됨이 생각함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정합성을 얻게 되거나 어떤 정복감을 이룰 때면 비로소 책상과 펜과 잉크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글쓰기의 기본학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무색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최재천 교수가 "에나르 에르고 숨", 즉 "나는 설명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말은 설명하니까 존재한다는 말도 되지만 보통의 인간은 자기가 알게된 '존재'를 설명하려는 충동이 있고, 이 설명은 누구라도 이해가능하게 말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장도서가 지닌 문제점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법칙이나 닥치고 쓰란 식의 권유 역시 문제가 있다.

 

물론 쓰다보면 어쩌다 문제의식이 생길수도 있다. 그래, 그럴 때 이 책은 조그만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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