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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평점 :
글을 시간내서 쓴다는 게 직장이 있거나 일이 많은 사람은 쉽지 않다. 책을 읽을 시간조차도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간혹 청탁이 들어오거나 억지로나마 글을 써야 할 일이 있을 때는 기쁘기 그지없다. 뭔가를 정리할 기회가 온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타고난 문장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도 힘이 된다.
"글쓰기는 '헤파이스토스'(노동의 신)의 영역이며, '뮤즈'(예술의 신)의 영역이 아니다."
스티븐 킹도 유사한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를 절망시키는 문장가들을 보면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심이 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연 헤세나 카프카처럼 쓸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글쓰기는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니체가 "책이 책상과 펜과 잉크를 요구해야지, 책상과 펜과 잉크가 책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처럼, 사유의 노동이 우선일 듯 싶다. 마치 석류가 농익었을 때 갈라지는 것처럼.
결국 글쓰기를 배울 것이 아니라 사유함을 배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유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언급이 참조할만한다.
"사유란 수동성의 위대한 모험이다."
알다시피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게 된다. 책읽기 뉴스, 영화나 예술작품, 누군가의 이야기 등을 접하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수동성의 위대한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것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어떤 사태가 다가왔을 때 나는 그것이 나와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하며 '생각하게 된다'.
문제는 그 사태가 다가왔을 때, 다가왔음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우리들의 지향성이 문제일 것이다.
다시말해서, 내가 지닌 지향성이 사태의 스쳐지나감 또는 붙잡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지향성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보이고 혹은 누구가에는 다르게 보이고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의미론의 중심에 이 문제가 놓여 있을 것이다.
지향성의 형성은 아마도 관심에서 비롯된 인식론적 반응일 것이다. 관심은 주체적이냐 몰주체적이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주체적인 관심은 관찰이나 어떤 계기를 통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어 생기는 본질적 관심일 것이나, 비주체적인 관심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관심을 자연적 태도로 일반정립한 비본질적 관심일 것이다.
결국 주체적 관심에서 생긴 문제의식의 심화가 생각하게 됨을 낳고 생각하게 됨이 생각함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떤 정합성을 얻게 되거나 어떤 정복감을 이룰 때면 비로소 책상과 펜과 잉크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글쓰기의 기본학습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무색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최재천 교수가 "에나르 에르고 숨", 즉 "나는 설명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말은 설명하니까 존재한다는 말도 되지만 보통의 인간은 자기가 알게된 '존재'를 설명하려는 충동이 있고, 이 설명은 누구라도 이해가능하게 말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권장도서가 지닌 문제점과 마찬가지로 글쓰기의 법칙이나 닥치고 쓰란 식의 권유 역시 문제가 있다.
물론 쓰다보면 어쩌다 문제의식이 생길수도 있다. 그래, 그럴 때 이 책은 조그만한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