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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러시아 고전산책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고일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6월
평점 :
“끊임없이 다가오는 무섭고 얄미운 죽음만이 유일한 진실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거짓이었다.”(90)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모험은 강상중 교수의 <살아가는 힘>을 읽고 나서였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그래서 섭렵하게 되고 이 책까지 읽게 되었다.
최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다보니 <이반 일리치의 모험>이 중요한 예로 등장하고 있어, 다시 한번 이 책을 들춰보게 된다.
이번에는 역술가의 입장에서도 보게 되었다.
그가 죽을 병에 걸리게 되는 결정적인 장면이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는 남들에게 화려하면서도 고상해 보이는 집안 장식을 원한다. 그래서 직접 일꾼들을 거든다. 그러다가 ‘작은’ 사고가 일어난다.
“한 번은 이해를 못 하는 도배공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보여주기 위해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진 적도 있었다. 다행히 건장하고 행동이 민첩해 굴러떨어지지는 않았고 옆구리를 액자틀 모서리에 부딪히는데 그쳤다. 부딪힌 곳은 무척 아팠지만 통증은 곧 가셨다.”(46)
부인의 지나가는 걱정에, “난 이래 봬도 한가락 하는 체조선수야. 다른 사람이라면 큰일 났겠지만 난 여기에 부딪히는 데 그쳤어. 건드리면 아프긴 해. 하지만 뭐 괜찮을 거야. 멍든 것뿐이야.”(47)
하인리히 법칙처럼 모든 ‘큰’ 사고는 작은 혹은 눈에 잘 잡히지도 않는 사고로 먼저 발생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즉 노자가 말한 것처럼 見小曰明, 즉 작을 것을 볼 줄 앎을 현명한다고 한다고 한다면, 바로 이 작은 사고가 큰 사고를 예고하는 무의식이란 절대지의 경고였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델포이의 신탁의 주재자는 말하지도 감추지도 않고, 다만 징표를 보일 뿐이다.”(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아카넷, 2005, 235-236)
멈추고 바라 볼 줄 아는 힘의 상실, 명상과 침묵의 부재가 우리에게 ‘징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잠재의식에서 느끼는 불안을 타조처럼 모래 속에 머리를 박는 것으로 우리는 흔히 외면한다. “뭐 괜찮을 거야.”라며.
분명 잘못된 욕망이었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던 이반 일리치. 다행히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 전체를 반성하며 본래적 의미를 되찾긴 했지만,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아쉬운 맘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경우, 저 심심막측한 잠재의식 속에서 불안의 진동이 가늘게 떨려오고 있음 정도는 알고 있다. 그것을 밖에서 알려주는 것이 징표와 융의 용어로 하면 동시성 혹은 촉매적 외화현상이다.
역술의 많은 분야들이 바로 이 촉매적 외화현상으로 징표를 만들어 내 찾아내고 있다. 몰입해 퇴락한 ‘에고’를 잠시 가라앉히고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을 뚫고 들어가 한 점으로 쫄아든 ‘자기’를 찾아내 말(口)로 그 뜻을 알려주는(卜) 일(占)을 하는 것이다.